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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6)화 (6/123)

6화 미오, 북극여우의 사정

‘또 그 녀석 생각을 하다니…….’

미오는 곧 고개를 흔들어서 지오프리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그나저나 진짜 씻기 싫은데.’

여우는 그루밍을 하면 깨끗해지니까, 목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지금 몸에서 이상한 냄새만 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뜨거운 물에서 땀을 흘리고 나면 한기가 가실 거예요. 저는 내려가서 뱅쇼를 한 잔 데워 올게요. 감기 기운에는 그만한 게 없답니다.”

로렌이 문을 열고 나가자, 미오는 긴 한숨을 쉬었다. 얼마 만에 제대로 목욕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게 새해였나.”

미오는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작은 화면으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고 했었지.’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그녀는 밤새워 뒤척였다. 종소리가 끝나자 해돋이를 보러 나가 있는 수많은 인파가 화면에 비쳤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 기자의 질문에 힘차게 답했다.

‘우리 가족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애인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다들 얼마나 희망에 차 있는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인터뷰에 괜히 고무된 그녀는 24시간 운영하는 사우나를 찾았다. 새해 첫날 몸을 깨끗하게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뭐야. 나 같은 사람이 많은 건가.’

사우나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찼고, 여기저기 이야기꽃을 피웠다. 미오는 머리에 수건을 감고 근처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앉으니까 마치 일행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남자랑 입을 맞추려고 하는데, 누가 차 안으로 불을 비추는 거야.’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도.

‘시골에 사는 어머니네 보일러가 또 터져서 내일은 거기 가 봐야 해요.’

가족의 이야기도 있었다.

외로웠던 기분이 조금 가시자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서 읽던 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녀보다 더 외로운 이가 존재했다.

“하, 그때 생각은 왜 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미오가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 냈다. 꽃잎을 띄운 욕조라니, 난생처음 해 보는 사치에 괜히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여기가 어딘지 잊지 마.’

마음을 다잡고 등을 세우는데, 아까부터 몸을 파고드는 온기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잠들면 안 되는데…….”

“에구머니나! 아가씨. 물이 다 식었네요.”

데운 물을 더 들고 온 로렌의 음성이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이어 그녀가 머리를 감겨 주자 더는 버틸 수 없이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꼬르륵.

넓은 침실을 울리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란 미오가 번쩍 눈을 떴다.

‘뭐야!’

잔뜩 경계한 채로 사방을 살피는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굶주린 위장이 문제였다.

‘누가 못 봤으니까 괜찮지, 뭐.’

창밖으로 달이 보이는데, 실내가 대낮처럼 훤했다. 그제야 미오는 토끼 발처럼 생긴 앞발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다시 여우로 변했구나.’

아까 목욕할 때만 해도 저녁 먹고 당장 지오프리의 방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미오는 헐렁한 잠옷 더미를 헤치고 나오느라 낑낑댔다.

‘로렌이 갈아입혀 줬나 보네.’

한심해서 앞발로 이마를 콩 하고 한 방 때린 후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이불에서 간신히 탈출한 그녀가 그 위에 우뚝 섰다. 호박색 눈이 형형하게 빛을 내는 가운데, 그녀가 코를 벌름댔다. 탁자 옆에는 로렌이 준비해 준 우유와 빵이 있었지만,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영양 보충이 시급해.’

지금 허기를 채우려면 저런 빵 쪼가리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까 놓친 오리와 물고기 생각에 입이 헤벌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제대로 된 식사부터 해야 했다.

‘좋아! 당장 1층 주방으로 돌격~!’

단단히 기합을 넣은 미오가 높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아서 착지하는데 머리가 띵했다. 곧 정신 차린 그녀가 슬금슬금 침실 밖으로 향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왜 쉽게 되는 게 없지!’

손잡이까지 앞발이 닿지 않아서 점프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기진맥진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복도가 꼭 빈집처럼 스산했다.

‘유령의 집도 아니고 이게 뭐야.’

듣자니 고용인이 집사와 몇이 더 있다고 했는데, 그녀가 본 것은 로렌 하나였다. 양초도 밝혀 두지 않은 복도는 어둡기만 했다. 어쩐지 으스스해진 그녀는 등을 가벼이 떨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간다.’

몸을 낮춘 미오가 조심스레 층계를 내려가는데도 여전히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냄새는 1층 좌측 모퉁이에서 나고 있군.’

자세를 바싹 낮춘 미오는 먹이 사냥할 때처럼 아주 신중한 몸놀림이었다. 그녀는 벽에 찰싹 붙어서 목적지 내부를 살폈다. 장작불이 타고 있는 난로가 환한 빛을 냈고, 그 위에서 고소한 죽 냄새가 났다.

‘주방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행운의 여신이 나와 함께하는구나.’

그대로 그녀는 주방에 침입했다. 수프가 끓고 있는 솥단지를 가벼이 지나친 미오는 곧장 멈추어 섰다. 선반 어디에선가 강한 훈제 향이 났다.

‘저건 분명 고기다!’

하지만 그녀가 고기를 얻는 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선반이 있는 곳은 조리대 위쪽이라서 아무리 점프를 해도 닿지 않았다.

―크르르.(고기 꼭 먹고 말 거야.)

미오는 주방 구석에 있는 의자에 기어 올라간 후 탁자에 섰다. 탁자와 조리대와의 거리를 가늠한 후 그대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첫 번째 시도는 접시를 두어 장 깨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지금 미오의 고기에 대한 집념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다시 진지한 눈을 한 미오가 자라다 만 송곳니를 거칠게 드러냈다.

―크르르.(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작은 몸이 폴짝 뛰어올랐고 이번에는 조리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쳤다. 날카로운 발톱을 조리대에 박아 넣고 간신히 위로 올라온 그녀는 아주 쉽게 바구니 속에 보관된 훈제 고깃덩이를 꺼냈다. 일단 이를 고기를 박아 넣은 그녀는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가!

고개를 박은 그녀는 꼬리를 잔뜩 흔들면서 고기를 게걸스레 물어뜯었다. 고기는 정말 입 안에서 솜사탕처럼 녹아 버렸다. 미오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배를 채웠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신 후 벽에 걸린 팬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냥 대신 인간이 만든 훈제 고기 따위에 감동하는 꼴이라니.

‘누가 볼까 봐 겁나네.’

자괴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지만 애써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 내가 지금은 몸이 안 좋으니까…….’

미오는 앞발을 들어서 입 주변에 묻은 고기의 흔적을 닦아 냈다. 체력이 보충되고 나니까 머리가 잽싸게 돌아갔다.

‘일단 인간이 되어야 해.’

이 꼴로는 활동의 제약이 너무 많으니까.

‘그나저나 다른 상대를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갑갑했다.

게임이라고는 작은 농장을 지어서 감자나 고구마를 심거나 쿠키를 키워 본 게 전부인데, 대체 이 무슨 생존 게임이냐고!

‘나약한 생각은 버려! 이런 고민 할 시간에 당장 지오프리의 침실을 찾자.’

대충 계획을 짠 미오가 조리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려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점프도 하기 전에 누군가의 손에 목덜미를 잡혀 버렸다.

“……이건 또 뭐지?”

미오를 붙든 건 희미한 난롯불에 비치는 커다란 그림자였다. 그녀를 향해서 음산하게 웃는 상대를 향해 미오는 으르렁댔다.

―크르르.(이것 놔!)

그러자 꼴도 보기 싫은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를 얼굴까지 쳐든 지오프리가 미오의 오묘한 빛깔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크르르.(뭐가 아니야! 물기 전에 빨리 내려 줘!)

미오는 이를 드러낸 채 계속 사납게 굴었다. 하지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던 지오프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생 여우가 아닌가?”

지오프리는 그대로 미오를 데리고 주방 밖으로 나섰다.

―크르르.(너 진짜 가만 안 둬!)

몸을 버둥거려 봤지만, 지오프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층계를 올라와서 2층 가장 끝에 있는 침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내 예상이 들어맞는군.”

이곳은 아까까지 미오가 잠을 청했던 손님방이었다. 이불이 이리저리 흐트러진 흔적은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여인의 흔적이 없었다.

“이래도 수상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미오의 목덜미를 움켜잡은 지오프리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깨갱.(숨 막혀! 아파.)

그녀의 신음에 지오프리는 미오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하지만 위협적인 음성은 여전했다.

“네 주인이 올 때까지 너는 어디에도 못 가.”

―크르르.(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협박에 미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눈치를 챈 건가?’

어째서 여우와 미오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잡힌 채로 몸이 덜렁대는데 머릿속은 바쁘기만 했다.

지오프리는 2층 반대편에 있는 침실 문을 벌컥 열더니 그녀를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두었다.

‘뭐야! 왜 자기 침실로 나를 데려온 거야.’

어둠이 내린 침실에는 지오프리의 체취가 가득했다.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끌리는 향기에 미오의 후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몽롱해지고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젠장! 이건 전부 각인 때문이야.’

빠져들지 않으려 미오는 코를 틀어막은 채 몸을 한껏 말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에 와서 제법 많은 짐승을 만났다. 북극곰이나, 사슴, 다람쥐…….

하지만 미오의 심장은 그들에게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지오프리에게만 빠져들었어.’

몇 번을 반복해도 오직 그에게만 반응했다. 긴 한숨을 내쉬던 미오가 작은 입을 오물댔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지만, 입가에 남은 훈제 향 때문에 웃음이 났다.

‘일단 얌전하게 구는 척하자.’

그러면 멍청한 지오프리가 방심할 테고 곧 잠이 들 것이다. 그 후에 인간으로 변해서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 각인 상대가 지오프리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순간 바닥으로 뭔가 툭 떨어졌다.

‘뭐야! 왜 또 옷을 벗는 거야.’

미오의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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