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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화 (5/123)

5화 죽기는 누가 죽어!

로렌이 차려 주는 식사는 환자식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소화가 잘될 것 같은 죽과 한 입만 먹어도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달걀 요리.

“하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음식들이야.”

먹고 조금만 뒤척이면 그것들이 소화되어 버려서 곤란했다. 그녀는 이미 며칠째 고기를 먹지 못한 상태였다. 여우는 풀때기만 먹고 살 수 없는 잡식 동물이었다.

‘그래! 저걸 잡아먹자.’

사냥 본능에 눈을 번쩍 뜬 미오의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오리야!’

쇠꼬챙이처럼 마른 두 손으로 재빨리 바퀴를 굴렸다. 의자에 달린 바퀴는 손만 댔는데도 스르륵 움직였다. 두 눈은 오직 오리에 고정되었다.

‘약간 내리막인가.’

서서히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의자가 너무 빨리 굴러갔다.

‘뭐야. 멈출 수가 없어.’

이대로라면 호수에 그대로 처박힐 게 뻔했다.

“어, 어…….”

곤두박질치기 전 그녀가 재빨리 의자에서 뛰어내려 옆으로 굴렀다. 바퀴 달린 의자는 곧장 호수로 돌진했고, 풍덩 빠졌다. 그 바람에 놀란 오리가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오는 그 광경을 보면서 슬픈 음성을 냈다.

“……가지 마.”

쓰러진 충격으로 팔과 다리가 쓰라렸지만, 그녀는 일어섰다.

‘반드시 일어서야만 해.’

오랜만에 두 발로 걷는 것이라서 몸이 풍선 인형처럼 비틀댔다. 고통을 참아 가면서 미오는 비척비척 호숫가로 걸어갔다.

‘오리가 아니라면 물고기라도 먹겠어.’

본능에 완전히 잠식당한 미오의 눈은 물속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잉어의 지느러미에 닿아 있었다.

‘지금 상태가 좀 별로긴 하지만…….’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 대 내리치면 저런 물고기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 크큭. 달아난 오리를 원망해라.”

불안정한 걸음으로 물가에 다다를 때쯤의 일이었다. 툭 튀어나온 돌에 발이 걸려서 그대로 철퍼덕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라서 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풍덩~!

호수에 두 번째 커다란 물결이 일렁댔다. 얕은 호수에 그대로 얼굴이 박힌 미오는 잠시 충격으로 꼼짝하지 않았다.

“……으.”

몇 초 후 그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렀다. 맨몸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호숫물에 빠진 탓에 심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누구 없―.”

말을 하려고 하자 입 안으로 물이 잔뜩 들어왔다. 두 팔로 땅을 짚고 얼른 일어나야 했지만,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하, 이게 뭐람.’

이번에는 이상하게 지오프리를 노리기도 전에 사방에 설치된 함정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침대에 더 있고 싶었는데…….’

숨이 막혀 오자 절로 몸이 버둥거려졌다.

미오는 이런 어이없는 엔딩에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지는 게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철벅철벅.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죽음의 천사가 다가오는 건가.’

그녀를 향해서 몸을 숙인 이가 그대로 미오를 들어 올렸다.

“……으응.”

미오는 누군가에게 번쩍 들린 채로 팔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녀의 코를 타고 물이 아래로 뚝뚝 흘렀다. 지나치게 선명한 감각을 보면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제정신인가?”

누군가 그녀를 강하게 비난했다.

코와 귀에 물이 잔뜩 들어가서 소리가 울렸다. 물비린내 사이에 희미한 체취를 맡은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그 인간은 아니겠지.’

지오프리에게 도움받다니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미오가 버둥대자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억센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안 받아 준다고 자살이라니! 미친 거냐고 묻잖아!”

‘……자살이라니. 누가 죽으려고 했어?’

겨우 정신이 든 미오가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잠시만 여기 있어.”

미오를 풀밭에 내려 둔 사내는 다시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빛을 등진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미오가 한 손으로 귀에 들어간 물을 빼려고 하는데, 코와 입 밖으로 물이 왈칵 쏟았다.

“쿨럭, 쿨럭.”

“골고루 하는군.”

그녀 곁으로 돌아온 사내가 미오의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앞머리가 젖어서 유독 애달픈 미모를 뽐내는 것은 진짜 지오프리였다.

“……공작님.”

“다시 공작인가?”

“……그게.”

고개를 푹 숙인 미오가 젖은 옷자락을 매만지자 지오프리가 다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저, 저 괜찮습니다.”

미오는 당장 내려 달라고 송곳니를 드러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한다면 여기서 당장 내던져 줄 수도 있다.”

지오프리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거든.’

고마운 기분이 살짝 들었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나를 구해 준 거야!’

미오가 계속 불편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싫어도 참아.”

그는 미오를 의자에 앉힌 다음에 망토로 온몸을 감쌌다. 다정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곤란하지.”

지오프리는 정체를 낱낱이 밝힐 때까지 이 수상한 여인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아까 건물에서 만난 로렌의 당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공작님, 제가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일이 생겨서 말이죠. 호수에 홀로 있는 미오 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 일이라면, 사무엘이나 집사를 보내.’

지오프리는 아직 여인의 수상한 점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그러니 도와주는 일 따위 할 생각은 없었다.

‘에구머니나, 그런 일을 아무한테나 부탁할 수는 없죠. 안 그래요?’

‘로렌. 정말 나를 곤란하게 하는군.’

로렌의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기 힘들었던 지오프리가 인상을 구겼다. 어머니가 처형당한 후 홀로 남겨진 그를 지지해 준 건 아버지나 황실의 친척이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공작님은 카스피언 제국의 주인이십니다.’

로렌과 집사 알프레드, 그리고 사무엘 세 사람은 숱한 소문 속에서도 지오프리를 믿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작님. 해 주실 거죠?’

‘가서 데려오기만 할 거야.’

그래서 호수에 있는 수상한 여인을 데리러 오던 참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 걸음이 유난히 느렸다.

‘저기 있군.’

걷다가 커다란 사과나무 아래 등을 기댄 여인을 발견했다. 아직 적인지, 아닌지 전혀 파악되지 않은 탓에 지오프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연을 무척 사랑하는 타입인가.’

그에게는 전혀 감흥을 주지 못하는 하늘과 호수, 바람에 제법 집중하는 눈치였다.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흰색에 가까운 은발이 신비롭게 흩날렸고, 지오프리는 그것을 가만 지켜봤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뭔가 결심한 것처럼 보이던 여인이 의자를 밀기 시작하더니 호수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지금 죽으려는 거야?’

처음에는 걷기만 하던 그가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의자에서 떨어진 여인은 얕은 물에 코를 박더니 그대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미오는 지오프리의 체취가 한가득 묻은 망토에 파묻혀 있었다. 게다가 그가 밀어 주는 의자에 앉아 있자니,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죽기는 누가 죽어!’

그저 오리와 물고기가 먹고 싶었을 뿐인데…….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속사정을 소리 없이 중얼댔다. 연신 화를 내는 지오프리의 음성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사랑이 뭐라고 죽으려는 거지? 나는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경멸한다.”

혼자 열을 내던 지오프리가 내리는 결론에 미오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경멸하다니…….’

그녀만큼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 또 있을까.

이런 개떡 같은 상황에 반복적으로 던져졌지만, 한 번도 자포자기한 적은 없었다.

에취~!

망토를 걸치기는 했으나 젖은 옷 때문에 이가 덜덜 떨렸다.

‘이건 추워서가 아니야. 화가 나서 그런 거야.’

그녀가 오들오들 떠는데 저 멀리서 로렌이 달려왔다.

“맙소사! 그냥 데리고만 오시라고 부탁드렸는데, 왜 아가씨가 홀딱 젖었답니까? 입술 파래진 것 좀 봐.”

로렌이 추궁하는 시선으로 지오프리를 노려보자 그가 헛기침했다.

“그건 여기 이 사람에게 묻도록 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지오프리는 손잡이를 로렌에게 넘긴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열감으로 눈이 흐려진 미오는 멀어지는 그의 셔츠와 바지가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얼른 들어가서 목욕을 하도록 해요. 몸도 안 좋은데 이 일을 어쩌나요.”

“별일 아니에요.”

여우가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것은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렌은 담담한 미오의 말에 더 화를 냈다.

“별일이 아니긴요! 우리 공작님이 어릴 때는 참 다정한 분이셨는데, 어쩌다 저리 매정하게 변하셨을까.”

의자를 밀던 로렌은 거의 울다시피 했다.

‘저 야수도 다정할 때가 있었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미오는 조용히 혼잣말했다.

* * *

침실에 딸린 욕실에 습한 기운이 가득 들어찼다. 로렌은 데워진 물을 한가득 준비해서 미오를 씻게 해 주었다.

“저 진짜 괜찮은데요.”

창백하게 질린 미오가 두 손으로 드레스의 앞섶을 끌어안은 채 도리질 쳤다. 누군가 앞에서 옷을 벗어 본 적도 없거니와 이런 목욕 시중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로렌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얼른 벗어요. 그러다 감기 걸립니다.”

로렌의 도움으로 의자에 앉은 채 물에 젖은 드레스와 슈미즈를 차례로 벗었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정말 어쩌시려고 그래요.”

“……그게 실수로.”

미오의 발치에 벗은 옷이 수북하게 쌓였다.

“몸이 이렇게 말라서야 원…….”

로렌은 작은 바가지에 물을 떠서 미오의 등에 뿌려 주었다.

“가볍게 몸을 헹군 다음에 저기 꽃잎 띄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으시죠?”

“……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를 바라보는 미오의 머릿속은 아까 지오프리의 서늘한 음성만이 가득 차 있었다.

‘죽으려고 하는 나를 비난하다니……’

그녀를 여러 번 죽음에 이르게 한 그에게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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