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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화 (4/123)

4화 카스피언가의 손님

천하의 지오프리를 단숨에 쫓아낸 여인은 가지고 온 것을 탁자에 올려 두었다. 곧 침대 근처 의자를 당겨 앉은 그녀가 손을 뻗어서 미오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녀는 비쩍 마른 미오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에구머니나, 이렇게 몸이 허약해서 어쩌나요.”

하지만 미오는 너무 살갑게 구는 상대가 영 못마땅했다.

‘지오프리를 한 손으로 제압한 여인이라니, 엄청난 인물일 거야.’

잔뜩 경계하던 그녀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자, 상대가 말을 이었다.

“저는 로렌이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마님을 모셨지만, 지금은 공작가의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음.”

여러 번 지오프리와 만났고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 집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로렌을 만난 적도 없었다.

‘아니지. 사람 자체를 오랜만에 보는 건가.’

“아가씨. 곧 의원이 올 거랍니다.”

“……아.”

당황스러워서 입을 열지 못하자 로렌이 수상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공작님을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거라는데 맞나요?”

상대의 홍조 띤 얼굴에 미오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그런 낭만적인 일이 전혀 아니야!’

하지만 이 푹신한 침대에 더 누워 있고 싶다면, 지금은 침묵을 지켜야 했다.

“……아. 뭐.”

“우리 공작님한테 푹 빠지셨군요. 어쩜 좋아.”

“아…….”

아무래도 로렌은 그녀를 지오프리에게 반해서 가출한 그런 여인으로 보는 것 같았다. 지오프리의 부츠에 머리를 비비면서 애교를 떨었을 때보다 더 수치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이대로 기절이라도 하면 좋겠다.’

미오가 대충 고개를 푹 숙였더니 로렌은 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우리 공작님은 흉흉한 소문하고는 전혀 다른 분이랍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그럼요. 그럼요.’

지오프리는 드러난 것보다 더 냉정한 인간이니까…….

미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상대가 염려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우선 회복에 집중해요. 카스피언가는 절대 손님을 내치는 법이 없답니다.”

“감, 감사합니다.”

로렌이라고 소개한 여인은 그녀를 향해서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뭐야.’

처음으로 받아 보는 따스한 눈길이었다. 당황한 미오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 * *

잔뜩 성질을 내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던 지오프리가 집무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그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표창을 쥐고, 문에 붙여 둔 이미 너덜너덜해진 종이에다 그것을 날렸다. 사방이 뾰족한 표창은 목표물의 목에 정확하게 꽂혔다.

“……카스피언 공작이라.”

비릿한 미소를 띠던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허울뿐인 작위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그는 황태자였다.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어머니, 어머니. 그냥 사실대로 말할게요.’

지오프리는 억울한 누명을 쓴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어제까지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자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린 그는 이런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잖아요! 괴물은……!’

눈물범벅이 된 지오프리가 외쳤고, 어머니는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냈다.

‘어미를 위해서 누구에게도 그것을 밝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사형대에 오른 어머니는 끝까지 당당하고 결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지오프리는 그럴 수 없었다. 슬픔으로 일그러진 그의 두 눈에 단두대 위로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불쌍한 어머니. 끝끝내 눈도 감지 못하셨지.’

지오프리는 곧 폐위당했고, 아첨을 떨던 몇 안 되는 귀족 모두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버지라고 뭐가 달랐을까.’

아니, 가장 비열한 인간이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지오프리를 멀리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루카스 카스피언 황제는 모두 앞에서 공표했다.

‘네게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주겠다. 카스피언 제국의 믿음에 따라서 큰 공을 세운다면, 네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모든 죄를 떠안고 희생했지만, 황제는 지오프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사실상 지오프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변방에 가지 않으면 지하 감옥에 갇히거나, 카스피언 제국을 떠나야 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과거의 일은 그에게 늘 두통만을 불러일으켰다. 성큼성큼 걸어서 문에 박힌 표창을 뽑아내는데, 불쑥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체가 뭘까.”

은발에 호박색 눈,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온통 수상한 주제에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 대는지.

‘저는 지오프리 님의 팬이랍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팬이라니, 그런 말을 누가 믿어 준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건지.’

말이 카스피언 공작이지, 그는 불길한 존재로 일컬어졌다. 어머니를 앞세웠고, 지오프리가 지나친 전장은 피로 물들었다. 연회장에서 그를 바라보던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그 증거였다.

“기막히다는 말이야.”

표창을 내려 둔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채찍을 세게 말아 쥐었다.

‘여기에 데려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기절한 여인을 버려두지 못한 이유는 황실에 흠집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에는 나를 감시하는 눈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지오프리가 머물렀던 방에서 그 여인이 쓰러진 채 발견된다면 괴이한 소문이 하나 더 추가될 게 뻔했다.

‘그나저나 정말 이상한 일이야.’

문을 지키고 있던 사무엘은 그런 여인을 난생처음 봤다고 했다. 그는 지오프리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거짓을 고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방을 찾을 것을 알고 미리 잠복했다는 건데…….’

수많은 방이 있는데 그가 그곳에 들 것을 어떻게 알았던 걸까. 또 그의 기민한 감각이 누군가의 잠복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나를 능가하는 실력자라는 말인가.’

그날 여자는 마음만 먹으면 지오프리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제 입으로 성공했다고 했지.”

깨어나면서 분명 여인이 하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뭘 성공했다는 거지?’

아까 더 물어봤어야 하는데 로렌의 훼방으로 일이 여의치 않았다.

“젠장! 이런 기분은 별로야.”

지금 그는 낯선 여인의 일 말고도 신경을 써야 할 게 잔뜩 있었다. 괜히 예민해진 기분에 채찍을 세차게 말아 쥐는데, 집무실로 사무엘이 들어섰다.

“공작님, 방금 의원이 다녀갔습니다.”

“거짓으로 병을 지어내는 게 아닌 것은 확실한가.”

지오프리를 만나자마자 그대로 기절한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의심 가득한 주인의 표정을 살피던 사무엘이 입을 뗐다.

“영양실조에 걸린 데다, 몸 이곳저곳에 경미한 골절이 있다고 합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라고 합니다.”

“……하.”

상태를 들어 보면 이제까지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심을 늦출 수야 없지.’

그의 눈을 속이려고 영양실조나 골절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그 돼먹지 않은 헛소리도 계속하고 있나.”

지오프리의 물음에 사무엘이 침을 꿀떡 삼키더니 입술을 열었다.

“그게, 전장에서 대승하신 공작님의 업적을 듣고 남몰래 흠모해 왔다고 합니다. 이건 제가 들은 건 아니고, 로렌이 알려 주었습니다.”

하늘색 단발머리를 한 사무엘이 괜히 볼을 붉힌 채 헛기침했다. 하지만 수하의 말을 들은 지오프리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사무엘, 그걸 진짜라고 믿는 건가?”

“하지만 그분의 눈빛이 진실해 보인다고―.”

“……맙소사.”

전장의 참혹한 단면을 모두 보고 듣고도 사무엘의 밝은 천성은 여전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수하의 운명적인 사랑 타령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지오프리는 얼른 장갑을 집어 들었다.

“정신 차리고 나가서 훈련이나 하지.”

그는 언제 다시 변방으로 차출될지 모르는 개 신세니까.

‘개는 개의 역할에 충실해야겠지.’

문을 나서는 지오프리의 반듯한 이마에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 * *

“아가씨. 어때요. 너무 좋죠?”

미오를 데리고 나온 로렌이 정원에 심어진 나무와 꽃에 대해서 잔뜩 설명해 주었다.

“저건 우리 공작님이 태어나신 해에 아가타 님이 손수 심으신 사과나무랍니다.”

정원 한복판에서 미오는 멍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나무고 꽃이고 다 관심 없었다. 아가타가 누구인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제발 나를 침대로 다시 데려다줘.’

친절한 로렌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어서 나온 게 벌써 후회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누우면 몸이 푹 꺼지는 푹신한 침구로 가득 차 있었다.

‘호텔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런 느낌일까?’

거동이 불편한 미오를 위해서 바퀴 달린 의자를 구해 온 로렌이 계속해서 정원의 이모저모를 알려 주었다.

“카스피언가의 정원은 소박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답니다.”

‘그 풀이 다 똑같은 풀이지.’

풀 구경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던 미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제 돌아가는 게 어떨까―.”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렌이 속사포처럼 답했다.

“방에만 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거든요. 이렇게 햇볕도 쬐고, 바람도 맞아 줘야 한답니다.”

로렌은 사람도 식물과 똑같다면서 산책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아, 네.”

하지만 미오는 이런 자연이라면 숲에서 진절머리 나게 경험했다.

‘당신이 뭘 알아. 가죽과 뼈 사이를 파고드는 냉기를 겪어 봤어?’

그것뿐인가. 건기가 오래되면 냇물이 말라서 땅에 주둥이를 박아 넣거나 나무를 벅벅 긁어야 했다. 나무에서 작은 물방울을 찾지 못한 날에는 작은 개미나 곤충이라도 씹어야 했다.

‘그런 건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았어.’

그런 이유로 미오는 포근한 침구 속에서 뒹구는 쪽이 더 좋았다. 언제 다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자, 무릎에 이걸 덮으셔요.”

직접 바느질했다는 퀼트 천을 미오의 무릎에 올려 준 로렌이 무릎을 쳤다.

“에구머니! 제가 주방에서 뭘 만들던 중이었는데 깜빡했네요.”

로렌의 정원 찬양을 그만 듣는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는 여기 호수를 구경하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가서 간식거리도 좀 챙겨 오겠습니다.”

로렌이 사라지자 곧 정원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이틀이 지났어.’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이러다 또 여우로 변하면 어쩌지…….

지금 그녀는 지오프리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만나야지 뭔가 시도라도 해 볼 텐데.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제까짓 게 황송해할 일 아닌가.”

고백의 순간을 떠올리자 수치심으로 얼굴이 홧홧했다.

물론 그녀도 지금 지오프리가 이전의 그와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 무턱대고 판단하면 안 되겠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찰나, 끝없는 죽음을 떠올리면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이러는 이유도 충분한 거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데,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머리가 살랑 날렸다. 손을 뻗어서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는데, 물 위로 오리 세 마리가 내려앉았다.

‘살이 제법 통통하게 올랐군.’

그녀의 입가에 침이 주룩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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