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공작님, 당신의 팬입니다
미오는 여우 수인이 나오는 부분만 책을 사선 읽기로 대충 훑었기 때문에 원작 내용을 거의 몰랐다.
드문드문 지오프리가 미친 짓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욕을 했던 기억만 있었다.
‘진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
여우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사랑에 빠졌고, 끝도 없이 죽었다. 그 경험으로 그녀는 몇 가지를 체득했다.
―지오프리와 입을 맞추면 그녀가 인간이 된다.
(효력이 대충 보름간 지속이 된다.)
―일 년 안에 각인의 상대를 찾지 못하면, 그녀는 영영 여우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결말까지는 가 보지 못했다. 그 전에 항상 누군가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각인 상대는 그녀를 인간으로 변하게 한다.
(아직 지오프리 외에 다른 후보를 찾지 못했다.)
‘결국, 알아낸 전부는 저 인간과 관련 있는 것뿐이었지.’
미오의 차가운 눈에 씁쓸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토끼 발처럼 생긴 앞발을 모은 후 고개를 숙였다. 종교가 없는 미오였으나, 이 순간만큼 누구라도 붙잡고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이제 제가 이 망할 책에 왜 들어왔는지 의문을 품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소원을 들어주세요.’
빙의 전의 삶에 딱히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이곳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저런 냉혈한이 아니라 이상형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해 주세요!’
미오는 간절한 염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자!’
기도를 마친 미오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카펫을 가로질러서 소파로 돌진했다. 한때 숲을 주름잡았던 그녀에게는 이 정도의 임무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거대한 소파의 발 받침대 앞에서 첫 번째 좌절을 맛보았다.
‘젠장, 발이 닿지 않아.’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대다 다른 의자에 있는 쿠션을 물어 왔다.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중히 처리하느라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됐다. 됐어.’
쿠션을 밟고 도약하자 곧 소파에 올라갈 수 있었다. 미오는 송곳니를 살짝 드러낸 채로 살금살금 목표를 향했다. 그녀의 사나운 눈매가 지오프리의 조각 같은 얼굴에 닿았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미모가 만발했다. 날카로운 콧날 아래 살포시 맞물린 입술이 붉었다.
‘미운 놈치고 얼굴은 퍽 예쁘다니까…….’
그녀는 조심스레 지오프리의 배를 밟았다. 아랫배에 새겨진 식스 팩이 너무 단단해서 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자꾸 발이 미끄러졌다.
‘인간미 없는 놈.’
자고로 인간의 배란 약간의 지방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지오프리의 벗은 상체에 자꾸 정신이 팔려서 그녀의 입가가 축축해졌다.
‘미오. 집중해야 해.’
그녀는 곧 나비처럼 뛰어오를 자세를 한 후 목표물인 입술을 향해서 돌격했다. 주둥이가 그의 입술에 스치자마자 미오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다.
“……!”
흰 털이 풍성한 여우가 있던 자리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 번에 성공했어!”
양손으로 얼굴을 비비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맨살의 감촉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우 수인의 몸에 익숙해졌다 싶었지만, 그녀는 역시 인간일 때가 더 편했다.
‘이런 거로 감동하지 마! 미오. 넌 인간이라고!’
바삐 숨을 고르는데, 그녀가 앉은 자리가 지진이 난 것처럼 꿈틀댔다. 화들짝 놀란 미오의 귀로 아주 낮은 음성이 들렸다.
“……뭐지?”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잠에서 깬 지오프리의 단검이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런 바보!’
인간으로 변한 다음 조용히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여우의 몸에 머물렀더니, 아무래도 뇌가 굳어 버린 걸까. 한심한 상황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최단기간에 죽게 되는 건가.’
다시 상대의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내가 묻잖아. 너는 누구냐.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지?”
원작에서 지오프리는 여우의 정체를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미오는 그를 알고 있지만, 지금 지오프리는 그녀를 모른다. 처음 보는 여자가 배를 깔고 앉아 있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뭐라고 해야 하지.’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서 입 안의 침이 죄다 말랐다.
그의 새까만 눈을 정면으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제법 무서웠다. 긴장으로 그녀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는!”
오랜만에 내뱉는 음성이 온통 갈라졌고, 울컥거리는 감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진짜 많은 일이 있었지.’
처음에는 빙의했는지도 잘 모른 채 어버버대다 죽었다. 무슨 짓을 해도 미오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저놈을 안 만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었는데…….’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타국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싣기도 했었다. 심지어 그녀가 먼저 지오프리를 죽이려고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전부 수포가 되었다. 늘 그녀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으니까.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야.’
그녀가 먼저 지오프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것.
하지만 막상 그런 끔찍한 짓을 하려니 얼굴이 굳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거니까.’
미오는 입술의 근육을 당겨서 최대한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손을 포개서 가슴에 얹은 채 솜사탕처럼 달콤한 음성을 냈다.
“저는 카스피언 공작님의 팬이랍니다.”
그는 미오의 미소에 움찔대더니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손으로 우악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내쳤다.
“……미친 여자인가? 당장 비켜!”
“아니, 아닙니다.”
‘어떻게 이게 안 통할 수가 있지?’
고개를 연신 흔들던 그녀가 결백을 주장하면서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오랜만에 가진 인간의 다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곧장 비틀댔다. 너무 긴장했는지 맥이 풀리더니 머리가 한순간 어지러워졌다.
“……어, 어.”
“이봐, 이봐. 이게 무슨 짓이지?”
미오는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으려고 두 손을 버둥거렸다. 경악으로 물든 지오프리의 얼굴에 미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
간신히 방향을 튼 미오가 소파 팔걸이 쪽으로 휘청댔다. 곧 머리가 쿵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몸이 들썩거렸다. 지오프리가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 * *
미오는 밤새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는 꿈을 꿨다. 얼마나 행복한지 쩝쩝 소리가 절로 났다. 보통 때는 늘 악몽만 꿨던 것을 생각하면 참 특별했다.
‘너무 좋아.’
몸을 뒹굴뒹굴하는데도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배를 찔러 대는 뾰족한 돌멩이도 없었다.
‘최고야! 최고!’
미오는 두 다리를 배까지 끌어모은 채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흔들어 봤다. 하지만 엉덩이를 살랑 움직여 봤지만, 아무것도 흔들리는 것이 없었다.
‘……꼬리가 없어.’
꼬리가 없는 북극여우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순간 등에 식은땀이 쭉 흐르는가 싶더니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미오는 얼른 눈을 뜬 후 코를 킁킁댔다. 겨울 숲 특유의 마른 낙엽 냄새 대신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눈을 뜨는데, 앞발 대신에 손이 보였다. 그제야 지오프리의 입술에 박치기한 후 기절했던 게 떠올랐다.
‘맙소사!’
손으로 입술을 더듬는데, 복도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있었다.
‘이크, 누가 온다.’
미오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 자는 척했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다가와서 큰소리를 쳤다.
“그만 일어나.”
거친 손길에 의해서 이불이 저만치 날아갔다.
“……헉.”
잠옷 차림의 미오가 얼른 일어나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그제야 그녀를 잔뜩 노려보는 상대를 볼 수 있었다. 어색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던 그녀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지오프리.”
“내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했던가?”
미오의 말에 지오프리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검 소리에 창백해진 미오가 얼른 손으로 목부터 감쌌다. 지오프리가 긴 검을 그녀의 목 가까이에 뻗은 후 낮은 음성을 냈다.
“이제 슬슬 자백해.”
“네? 뭘 자백하나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거야 제가 팬이니까…….”
이런 변명은 정말 싫은데도,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미오는 어깨를 덜덜 떨면서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는지, 무감한 표정의 지오프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헛소리는 그만해라!”
“송구합니다. 제가 공작님을 너무 좋아해서…….”
“……알아듣게 설명해.”
당장에라도 목을 칠 것 같은 지오프리의 살기에 그녀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잠시 후 두 손을 공손히 겹쳐서 가슴에 모은 후 크게 심호흡했다.
“저는 평소 당신의 신부가 되는 역할극을 종종 하고는 했답니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한 실수이니 부디 용서해 주세요. 카스피언 공작님.”
급하게 지어낸 것치고는 완벽한 대답에 미오는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팬이라고 했으니, 네 가슴이 막 떨릴 거다.’
지오프리는 3년간 변방에 처박혀 있었고, 이런 관심을 받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간혹 그를 사모하는 여인이 있다손 쳐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야수, 지오프리 카스피언이니까.’
게다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그녀의 미모는 한눈에 반하지 않고는 힘든 편이었다.
지오프리의 감동한 얼굴을 잔뜩 비웃어 주리라 생각한 그녀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감동 대신 잔뜩 화가 나 보이는 지오프리만 있었다.
‘저, 저 얼굴은 뭐지?’
검은 거두었으나, 그는 핏줄이 불거진 주먹을 어루만지면서 으르렁댔다.
“누가 보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개수작이 내게 통할 것 같나?”
“……개, 수작?”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지 어떤 애교도 유혹도 먹히지 않았다.
당황한 미오는 그의 말을 가만 따라 하다 기침을 세게 했다.
“콜록, 콜록.”
“계속 아픈 척이라니, 연기가 제법이군.”
지오프리는 기침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에 혀를 찼다.
‘냉혈한 같으니라고! 이건 연기가 아니야.’
숲에서 한뎃잠을 잤더니 몸이 영 엉망이었다. 미오는 그녀에게 거칠게 구는 지오프리를 향해서 촉촉한 눈빛을 보냈다.
‘나 많이 아프니까,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그 입을 곧 열게 될 거다.”
지오프리가 셔츠의 단추를 세차게 뜯으면서 으르렁댔다.
‘역시 소용없구나. 저런 인간과 대화를 시도하는 내가 미쳤지.’
하지만 저 거친 손길에 그녀도 바닥에 나뒹구는 단추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건데!’
용맹스러운 여우 수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웬 중년 여성이 뛰어 들어오더니, 지오프리의 등을 사정없이 쳤다.
“아이고, 공작님. 아픈 사람한테 이게 무슨 횡포랍니까.”
미오는 낯선 인물의 등장에 긴장으로 등이 단단해졌다. 그 여인은 떨어진 이불을 털어서 침대에 올려 주면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마님이 보셨다면 퍽 속상해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로렌. 저 여인은 수상한―.”
“카스피언가를 방문한 손님이랍니다.”
그녀는 곧 지오프리를 문밖으로 밀어 냈다. 그는 문을 나서면서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이를 딱딱대는 미오에게 서늘한 시선을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눈빛으로 살인할 관상이구나.’
그녀는 지오프리를 못 본 척하면서 일부러 기침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