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45)화 (145/146)

145. 외전 Ⅸ

“사무엘을 꼭 닮았네요.”

프시케는 강보에 싸인 건강한 사내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엘의 이목구비를 쏙 빼닮은, 태어난 지 이틀째가 된 아이의 눈매는 순하고 똘망했다.

“그때, 프시케를 따라 나오길 잘했어요. 하마터면 사냥터에서 아기를 낳을 뻔했지 뭐예요.”

하르모니아가 어깨를 바르르 떨며 말했다.

상처받은 프시케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프시케가 상처받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 사냥터에 머물렀을 것이고, 그랬다면 상황이 위험해졌을 수도 있었다.

“에우로스는 어젯밤 잠깐 다녀갔어요. 오빠에게 아직 많이 화났어요? 괜찮은 거예요?”

하르모니아가 프시케의 낯빛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자신과 사무엘 때문인 것 같아, 하르모니아는 프시케에게 일말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

프시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르모니아의 아이가 태어나 기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사냥터에서 돌아온 뒤부터 내내 우울한 상태였다.

에우로스에게 서운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사냥터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에우로스를 만나지 못한 것이 우울한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괜찮지 않아요.”

연극제가 끝난 뒤, 하르모니아가 화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프시케의 답변은 ‘괜찮다’였다.

그때는 괜찮은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에우로스는 그녀가 괜찮지 않으면 안 되게 행동했으니까. 다소 무례하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에우로스는 그에게 꽂히는 시선을 외면했고, 다가오는 몸짓을 가로막았다.

그러니까 질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대처하는 사람을 향해 처신을 바르게 하라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이번 사냥대회에서의 에우로스는 여느 때와 전혀 달랐다. 그는 마치 벌을 꾀어내는 장미꽃처럼 향기를 내뿜으며 화사하게 웃고 예의 바른 친절을 베풀었다.

그 장미 주위로 몰려든 벌들이 위협적으로 날개 소리를 내는 통에, 리던 사교계의 노랑나비는 그 근처로 다가가 보지도 못했다.

그 순간 프시케는 깨달았다. 자신은 사실 괜찮지 않았다는 걸.

남편과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지고 물건을 떨어트리는 여자들을 보는 것이 사실은 매우 불쾌했었다는 걸.

스스로를 속이고, 남들을 속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었다는 걸.

프시케는 구역감이 밀려와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채스웍 하우스의 푸른 수염의 방에서 떨어지는 별처럼 저에게 찾아온 아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힘들게 한 적이 없었다. 하르모니아가 입덧으로 괴로워할 때, 프시케는 내심 그게 어떤 건지 궁금해할 정도로 아이는 어떠한 불편함도 주지 않았었다.

아기가 대신 화를 내어 주듯 위장을 뒤틀었다. 치받치는 느낌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냄새가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초록의 숲 내음도, 건조한 흙 내음도, 왱왱거리는 여자들의 향수 내음도 전부 거짓말처럼 역했다.

“마님!”

억지로 숨을 참고 마차에 탔을 때, 클라리사가 울상을 하고는 프시케의 손을 아프도록 주물렀다.

“괜찮으세요? 물을 좀 드릴까요?”

엉덩이를 들썩이는 클라리사를 보면서 프시케는 오른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폭신한 느낌이 없었다. 마차에 타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손수건이 없어진 것이다.

제 딴에는 열심히 자수를 놓은 그 보들보들한 손수건을 돌려줄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을걸, 후회가 밀려왔다.

“클라리사, 손수건이 없어.”

“손수건이요?”

힘없이 뇌까리는 말을 듣자마자 클라리사가 주변을 살폈다. 드레스를 들쳐 보고, 의자 아래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클라리사마저도 울적해졌다.

“안 그러시던 양반이 대체 왜 그랬담!”

그 말을 기점으로 클라리사의 화가 여태껏 잘 묻혀 있던 곳을 헤치고 벌떡 일어났다.

지금 심정으로는 그 잘생긴 낯으로 여자들의 손수건을 받아 주며 황금빛으로 웃고 있던 에우로스 캐번디시 소공작에게 한바탕해도 모자랐다.

도무지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고작 하녀인 제가 봐도, 소공작은 다른 한량들처럼 반반한 미색을 함부로 쓰는 인간은 아니었단 말이다.

오늘 아침 식사 중에 먹어서는 안 될 걸 먹은 게 아닌가, 클라리사는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싹싹 빌 때까지 용서해 주시면 안 돼요. 아셨죠?”

임신한 여자의 상처는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는다. 클라리사는 이번에야말로 프시케에게 단단히 일러 놓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이런 거지 같은 불상사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마님.”

클라리사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응.”

프시케는 속을 가라앉히며 힘없이 대답했다. 클라리사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저렇게 심각한 어조로 시작하는 말은, 대개 피곤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 내기할까요?”

“응?”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라리사는 밥 먹듯 내기하는 잉그린트인들을 두고 경박하다고 궁시렁거릴 정도로 내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클라리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우직하고 진중하며 신실하여 내기와 같은 불경한 행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거룩한 스코틀린인이었다.

“내기하자고요, 마님.”

프시케가 힘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클라리사도 이제 잉그린트 사람이 다 되었구나. 토할 것 같은 와중에도 호기심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내기를 하고 싶은 거야?

“어떤?”

“주인 나리가 사과해도 쉽게 받아 주지 마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마님은 너무 물러요. 그러니까 나리가 가끔씩 저렇게 삐끗하면서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 거라고요.”

“하지만 나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야.”

프시케가 자신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이 그랬다. 일단 말없이 인더스로 도망가 버린 전적이 있지 않은가.

“마님이 어때서요?”

클라리사가 가슴을 쳤다. 무슨 짓을 해도 프시케는 틀리지 않았다. 맹목적이라 해도 좋다. 그녀는 프시케에게만큼은 무조건적이었다.

“얼굴만 잘나면 다예요? 돈만 많으면 다예요? 신분이 높으면 다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클라리사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미모와 부, 지위. 그걸 다 갖춘 사람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건 기적이었다. 세 조건 중 단 하나 갖추기도 힘든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 그 기적적인 존재가 프시케의 남편이었다. 그 옛날 잉그린트 전설 속 아서 왕이 신탁의 바위에 꽂혀 있는 엑스칼리버를 뽑았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뽑기 운이었다.

“일단 부인에게 잘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클라리사는 또다시 자괴감을 느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에우로스 캐번디시 소공작은 프시케에게 잘했다.

부인에게 다정한 귀족 남자들은 희귀했다. 브라이튼 섬을 탈탈 털어도 부인이 잠결에 흘린 말 하나를 새겨듣고 온실을 짓도록 하는 남편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지만 클라리사는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우기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우겨도 프시케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프시케도 제 남편에게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이니까.

“그래, 맞아.”

“네?”

잘못 들었나. 이내 클라리사는 자신이 늙어서 프시케가 ‘그래 봤자.’라고 말한 것을 엉뚱하게 들은 거라고 잠깐 생각했다.

“클라리사의 말이 맞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프시케가 음울한 얼굴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게 아닌가.

“그, 그래요? 그렇지요?”

어색하게 맞장구치는 사이, 프시케 캐번디시의 어두웠던 얼굴에 강력한 의지가 타올랐다.

작고 도톰한 입술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 있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반가운 만큼 걱정되기도 했다. 프시케가 저런 표정으로 하는 말은 꼭 자기를 경악하게 만들었단 말이다.

“내기해.”

“…….”

자기가 들쑤실 땐 모르지만, 옆에서 밀어붙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왠지 불안해지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지금 클라리사의 심정이 딱 그랬다.

저러다 영영 화해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언제까지 받아 주지 않을 셈이지? 그런데 주인 나리는 용서를 구하려고 하기는 할까?

그냥 위로만 하고 가만히 있을걸. 클라리사는 후회했다. 맹목과 무조건이 불러온 참사였다.

“그럼 언제까지 안 받아 주실 건데요?”

“그걸 정해야 할까?”

“그, 그렇지요. 그래야 내기를 하지요.”

“아, 그렇구나.”

프시케도 내기에 익숙지 않은 스코틀린 출신이었다. 내기를 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메슥거림 때문에 눈을 꽉 감고는,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클라리사는 애가 탔다. 눈을 감다니, 단단히 각오한 것이다. 눈을 뜨기도 싫은 거다. 남편의 얼굴도 보기 싫다는 뜻이 아닐까?

프시케는 당장 아기를 가졌고 몇 달 뒷면 출산을 할 텐데, 그때까지 소공작 나리와 사이가 데면데면하면 어떡하지? 아이를 낳은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프시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하여간 요 입이 방정이다. 평생 하지도 않던 내기를 하자고 해서 일을 이렇게 크게 키우다니.

클라리사는 내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조건으로 걸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프시케가 1년이라고 하면 자신은 석 달을 주장해서 6개월 정도에서 타협을 하면 될 것이다. 아니면 프시케가 아주 대단한 관용을 베풀어 석 달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한 달이라고 하고, 그러면 두 달 후까지로 기한을 잡으면 된다.

아니, 프시케는 착하니까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만 화를 내고 아량으로 남편을 이해해 주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정했어, 클라리사.”

프시케의 결연한 말에 클라리사는 비장하게 고개를 들었다.

“부르세요, 마님.”

프시케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저건 소공작 나리를 따라 한 표정인가? 클라리사는 긴장감에 몸을 곧추세우고 귀를 활짝 열었다.

“사흘.”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언이었다. 세상에서 남의 연애를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다는 걸 잊었다. 클라리사는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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