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외전 Ⅵ
“잉그린트에서는 사냥대회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손수건을 준다면서요?”
“어, 그렇긴 하죠.”
꼭 부인만 주는 건 아니지만, 원칙은 그렇다. 리던 사교계에 원칙은 없고 변칙만 있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래서 준비해 봤는데, 어때요?”
하르모니아는 제 눈앞에 펼쳐진 손수건을 보다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데본셔 가문에서 쓰는 손수건이네요? 그런데 꽤 오래전에 쓰던 디자인이에요.”
3, 4년 전쯤에 캐번디시가 남자들이 쓰던 손수건을 어째서 프시케가 가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거.”
“네?”
“그 모퉁이마다 수놓은 거 말이에요. 그건 뭐예요?”
하르모니아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걸 이제야 가까스로 질문했다. 대체 그 시퍼런 덩어리는 무엇이냐고. 설마 파란색 돌멩이? 행운의 돌? 아니면 먹는 건가? 파란색 음식이 뭐가 있더라?
“제가 좋아하는 꽃이에요.”
프시케가 그 파란색 덩어리를 살살 쓸어내리며 고백했다.
“꽃…….”
하르모니아는 아연실색했지만, 간신히 제 감정을 갈무리했다. 완벽한 신붓감으로 자라기 위해 오랫동안 받아 온 교육의 긍정적인 결과였다.
“혹시 별로인가요?”
프시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하르모니아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아뇨! 정말 예쁜 꽃이네요.”
이것도 오랜 교육의 결과였다. 프시케가 뿌듯해하며 활짝 웃었다.
* * *
“사무엘!”
“하르모니아, 제발 천천히 걸어.”
사무엘이 벌떡 일어나 응접실의 문을 잡아 주며 말했다. 말괄량이 아내의 거침없는 행동에 사무엘은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아닌데 늘 속이 출렁출렁했다.
“그리고 혼자 계단을 내려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그러다가 넘어지거나 구르면 어쩌려고 그래? 큰일 날 수도 있어. 계단으로 오르내릴 때는 제발 하녀의 부축을 받든지, 나를 불러.”
배가 둥그렇게 부푼 뒤로 하르모니아가 계단을 사용하는 것에 부쩍 예민해진 사무엘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임신 초기,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바로 자신이 옆에 있지 않았다면 진작 무슨 일이 생겼어도 생겼을 것이었다.
“에우로스.”
하르모니아는 사무엘에게 콧잔등을 한 번 찡그리고는, 그녀의 오빠 앞에 가서 섰다.
“뭐야.”
에우로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일어나 하르모니아의 손을 잡고 천천히 소파에 앉혔다. 사무엘은 그녀가 앉을 자리에 방석 몇 개를 깔고 있는 중이었다.
“부탁이 있어.”
하르모니아의 사근사근한 말투에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르모니아는 제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만 착해지니까.
“무슨 부탁?”
“이번 사냥대회에 나도 참석하게 해 줘.”
그러나 부탁의 내용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에우로스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남편인 내가 여기 있는데, 그걸 왜 에우로스에게 물어?”
여기에 입매가 굳어지다 못해 딱딱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가 하르모니아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꾹 쥐며 물었다.
“그거야…….”
하르모니아가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사무엘은 내 말을 들을 테니까, 라고 말하면 안 되겠지.
“그리고 사냥대회라니? 하르모니아, 그 몸으로 그건 무리야. 절대, 절대로 안 돼. 난 무조건 반대야. 갈 생각 하기만 해.”
그런데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웬만하면 제 의견을 수용해 주는 사무엘 스태포드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에우로스보다 더 큰 산이 앞에 버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르모니아는 단호한 남편의 태도에 멈칫했다가, 살살 구슬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째서? 내가 말 타고 사냥하는 것도 아닌데.”
“사냥터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게다가 야외잖아.”
“사무엘, 사람이 많은 건 무도회장도 그래. 얼마 전에 갔었던 연극제도 야외에서 열렸다고.”
“사냥대회는 숲에서 열리고, 가끔 빗나간 화살이나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 사냥개가 달려들 수도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돼!”
하르모니아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난스럽기로 따지면 사무엘 스태포드가 아마 잉그린트에서 제일일 것이다. 그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외출을 반가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쏘다니긴 했지만.
“피 흘리는 동물들도 있을 거고, 또 다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어. 배 속의 아이에게 좋은 구경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지.”
“걱정 마. 우리 아기는 사무엘을 닮아서 대단히 둔감할 거야. 그런 걸 봐도 절대 흔들리지 않고 강인하게 버텨 낼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이었다. 사무엘은 그래도 끈질기게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사랑하는 하르모니아. 잘 생각해 봐.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그 말에 하르모니아가 갑자기 저려 오는 것 같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랑하는…….
그러다 문득 그녀가 얼굴을 왈칵 구겼다. 큰일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말을 꼭 해야겠어?”
“그렇잖아. 의사 선생 말로는 2주 정도 뒤에는 태어날 거랬는데, 설마 사냥터에서 무리하다가 아이를 낳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면 얼마나 끔찍하겠어.”
“그 의사 선생도 적당히 몸을 움직여 주면 좋다고 했단 말이야.”
“그래도,”
“사무엘, 리던의 공기가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에우로스와 사무엘도 이 오염에 일조한 사람 중 하나라서 내가 대놓고 비난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래. 사냥터에서라도 맑은 공기를 잔뜩 쐬고 싶은 이 마음을 정녕 이해해 주지 않을 테야?”
하르모니아의 간청에 사무엘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요즘 리던은 공장지대에 버금갈 만큼 공기의 질이 최악이었다. 쉴 새 없이 태워 대는 석탄 때문에 흰옷을 입고 나가면 금방 거뭇거뭇하게 변색되었고, 호흡기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기침을 달고 살아야 했다.
그 공장들 중 에우로스가 소유한 것들도 꽤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고 그 공장들의 지분을 자신도 가지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제 아내가 임신한 몸으로 더러운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건 무척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때 에우로스가 둘의 애틋한 대화를 뚝 끊었다. 꼴사나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왜, 왜?”
아니, 왜 갑자기 결혼 전 성을 부르고 야단일까. 하르모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에우로스를 돌아보았다.
“진짜 부탁이 뭐야?”
“말했잖아. 사냥터에 가게 해 달라고.”
“하르모니아.”
하아,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귀신이다. 저 시퍼런 눈동자 속에 얼음으로 만든 칼날 같은 게 숨어 있어서 남의 마음을 마구 들쑤셔 속내를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르모니아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손수건 이야기는 티 나지 않게 말해 보려 했건만, 결국 대놓고 말하게 되었구나.
“이번 사냥대회에서 손수건을 받을 거야?”
“손수건? 무슨 손수건??”
듣고 있던 사무엘이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물었다. 아마 자신과 에우로스가 하기로 한 내기에 대해 하르모니아가 듣게 된다면 제 오빠랑 닮은 저 시퍼런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거리다 못해 활활 타오르겠지.
“……그건 왜 묻지?”
에우로스도 차마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번에는 손수건을 받아 주라고.”
“무슨 뜻이야?”
“그냥, 그런 게 있어.”
하르모니아는 그 이상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프시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아하니 깜짝 선물로 주려는 것 같은데, 손수건을 받지 않겠다고 말해 버리면 그대로 마음을 접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에우로스는 프시케가 손수건을 내밀고 나면, 다른 여자들의 손수건에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기로 에우로스는 사냥대회에서 손수건을 받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영애들이 저를 통해 전달하려 했을 때도 어찌나 매몰차게 거절하던지, 괜히 중간에 있던 자기만 민망해진 적도 있었다. 게다가 거부당한 손수건을 다시 건네받은 영애가 시무룩하게 있다가 울기라도 하면, 그걸 달래 주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다.
사냥대회만 그랬던가. 무도회에서도 그랬다. 여자들은 왜 에우로스 앞에만 서면 손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일까.
물건을 떨어트리고 몸을 쓰러트리는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번 연극제에서도 그런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에우로스가 쓰러진 여자를 부축해 일으켰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프시케가 요청하지 않았다면 에우로스는 그대로 서 있었을 거고, 신사도라면 껌벅 죽는 사무엘 스태포드가 나서서 여자를 도왔을 것이다.
돌이켜 보니 늘 그랬다. 에우로스에게 달려드는 여자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건 늘 사무엘이었다. 그래서 사무엘 스태포드도 적당히 준수한 외모에 친절한 매너로 인기가 적지는 않았…….
한순간 하르모니아의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사무엘, 나 좀 잠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