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외전 Ⅴ
“잠시 바람을 쐬고 올게요.”
깊은 물처럼 평온하고 새털처럼 나긋한 어조였다.
본처의 패악을 상상하던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프시케가 누구의 에스코트도 없이 그 장소를 벗어나자, 하르모니아가 곧 뒤뚱거리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때 사무엘은 보았다. 에우로스의 관자놀이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을. 설마 저 여자를 내동댕이치려는 건 아니겠지.
“취하지 않았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내팽개쳐져 망신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리고 사무엘은 들었다. 들릴락 말락 한 크기로 에우로스가 제 무릎에 앉은 여자의 귓가에 대고 마치 욕을 하듯 씹어뱉으며 말하는 소리를.
에우로스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흥미진진한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의 귓속말을 했길래 만취한 여자가 순순히 무릎에서 내려오는 걸까.
수많은 추측 끝에, 리던 사교계를 달굴 하나의 가십이 새로이 창조되었다. 이후 다른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소공작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는 것.
다양한 추측들 중에서 그 소문이 채택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게 가장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을 벗어난 프시케는 담담한 표정으로 테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르모니아는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교계 최고의 미남을 남편으로 둔 여자도 참 여러모로 짜증 나겠구나 싶어서.
“그때 화나진 않았어요?”
하르모니아가 묻자, 침실 카우치에 앉아 자수를 놓던 프시케가 배시시 웃었다. 프시케의 손에 들린 바늘이 톡톡톡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수틀에 고정된 비단 천에 둥근 문양을 새겼다.
“……괜찮아요.”
“정말요?”
하르모니아가 수틀을 살피며 재차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시케의 자수 실력은 최악이었다. 하르모니아라고 그리 자수에 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도 도저히 저 비단 천에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자수가 놓이고 있었다.
그런데 자수 따위가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그놈의 연극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꼴불견 같던 여자들을 욕해 주고, 상처받았을 프시케를 위로해 주어야 했다.
하르모니아의 인생에서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을 꼽자면 바로 제 눈앞에 있는 프시케 캐번디시다.
프시케는 어두운 성격도, 자격지심에 갇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성격도 결코 아니었다. 상냥하게 웃고, 행복과 만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뭔지 모를 모양의 자수를 놓으며 본인은 기쁘게 웃고 있지 않은가.
“질투 같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거예요? 누가 사무엘 스태포드에게 그렇게 달려들면 난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프시케의 생각을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나 에우로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르모니아 자신이었다면 팔팔 뛰며 기분 나빠 했을 일들에 대해서도 프시케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게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쩐지 조마조마한 느낌이랄까. 언젠가는 끓는 용암을 부글부글 내뿜을 휴화산 같기도, 심해에 숨어 있다가 곧 충돌할 커다란 빙하 같기도 했다.
“질투…….”
프시케는 그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호감을 표하는 여자들에게 에우로스는 늘 단단하게 벽을 치고 반응하지 않았다. 그건 결혼 전에도 그러했다. 이번 연극제에서도 그는 다소 무례해 보일 정도로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등을 돌렸다.
“저는 괜찮은 것 같아요.”
프시케가 생각을 마치고 짧게 답했다.
연극제에 함께 가 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친 건 자신이었고, 에우로스는 연극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자신과 동행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일들이었을 뿐이었다.
하르모니아는 그렇게 대답하는 프시케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두어 번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털어놓고 싶어졌다.
“예전에 사무엘이 청혼했었던 영애 말이에요.”
프시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피한 채 방 안을 천천히 왔다 갔다 하는 하르모니아를 쳐다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래 나와 친했던 사이였어요. 성격도 좋고, 취향도 비슷하고.”
“그랬군요.”
“그래서 그 영애와 사무엘이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연극제에서 막상 마주치니까 울화가 치밀더라고요.”
하르모니아의 표정이 파삭, 하고 무너졌다. 어쩐지 낯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결혼 전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무엘을 실컷 놀려 주고,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걸 보면서 신나게 웃어 줬죠.”
“그런데요?”
“그런데 지금은 괜히 속상한 거예요. 난 원래 마음을 잘 감추지 못하니까, 그 영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사무엘에게 못된 말을 퍼부었어요. 내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사실은 알 것 같다. 아니, 안다. 그건 확실한 질투의 감정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다.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거야…….”
프시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르모니아가 사무엘을 사랑하니까요. 당연한 감정 아닌가요?”
“…….”
그 말을 듣자 하르모니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속내를 고백했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결혼도 하지 않았겠지만, 사실, 음…… 결혼할 때를 떠올려 보면 지금처럼 그런 질투하는 마음은 없었단 말이에요. 그땐 친구나 보호자 같은 느낌이 강했어요. 늘 옆에 있어 주는 그런 사람이요. 그런 게 좋았던 거예요.”
청혼을 받을 땐 좀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사무엘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박력과 용기에 감복해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무엘은 사무엘이었다. 열병처럼 지글거리던, 프레데릭에 대한 연심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프레데릭과 그런 일이 있었던 뒤로는, 절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들쭉날쭉하고 이리저리 튀는 감정은 불안했거든요. 사무엘은 한결같은 사람이고, 그런 걸 믿을 수 있고, 또 좋았어요. 그래도 사랑은 아니에요. 사랑은 안정적이지 않잖아요.”
하르모니아가 정의하는 사랑은 그러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고, 아슬아슬하고, 저릿저릿한,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사랑이었다. 언제 져 버릴지 몰라 아쉽지만 만개했을 때만큼은 심장이 아프도록 연약하고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이 그녀가 정의하는 사랑의 개념이었다.
사무엘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에게서는 그런 불안이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기댈 수 있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꽃처럼 연약하고 아름답지는 않지만, 꿋꿋하고 오래오래 변함없는 나무.
“그런데 요즘은……. 어째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데도 자꾸 불안해지는 걸까요.”
하르모니아가 복잡한 표정을 하며 프시케의 옆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런 게 아닌데, 내가 바랐던 사무엘과의 결혼 생활은 평화로운 것이었는데.
그런데 왜 튼튼한 나무에 기대어도 왜 자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게 되는 걸까. 그러면 다 망가질 수도 있을 텐데.
“나무에도 꽃이 피어요. 열매도 열리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물들었다가 추워지면 다 떨어져 버리잖아요.”
그때 프시케가 다가와 하르모니아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하르모니아를 보는 프시케의 얼굴은 한없이 다정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프시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에우로스도, 저도, 늘 같은 마음은 아닌걸요. 상황이 변하면 감정도 변해요.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마음은 수없이 뒤바뀌고, 가끔은 따라가지 못해서 숨이 차기도 하고.”
뒤이어 프시케가 덧붙인 말에 하르모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틀림없는 말이다. 상황이 변하면 감정도 변한다. 친구가 남편이 된 상황 때문에, 그리고 친구가 남자가 된 상황 때문에, 자신의 마음도 변화한 것이 맞다. 사무엘에 대한 마음도, 사무엘이 청혼했던 그 영애에 대한 마음도.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아요. 피어 있던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도, 나무는 그 자리에 있잖아요. 지금껏 그랬듯이 사무엘은 계속 그렇게 있어 줄 거라고 나는 믿어요.”
하르모니아는 프시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제 마음이 변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사무엘 스태포드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
“프시케도 그래요?”
하르모니아가 문득 물었다.
“무엇이요?”
“에우로스에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냐는 말이죠.”
그녀의 말에 프시케는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럼요.”
흐음. 역시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구나. 하르모니아는 미묘한 표정으로 프시케를 보았다. 프시케는 남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면서,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는 데는 둔하기 짝이 없었다.
화산 폭발도, 빙하 충돌도 뚜렷한 계기가 있어야 발생한다. 지각이 변동하고, 대해로 배가 나아 가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각의 변동이나, 배의 출항은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건 말 그대로 계기일 따름이다.
그래도, 옆에서 힘은 되어 줄 수 있겠지. 하르모니아는 부풀 대로 부풀어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발끝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제 큰 배를 어루만지며 결심했다. 이번 사냥대회에 자신도 반드시 참석하리라고.
“에우로스가 조금만 덜 잘생겼어도 좋았을 텐데.”
하르모니아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프시케가 그 말을 듣고 살풋 웃었다. 어느새 그녀는 자수를 마치고 수틀에서 천을 빼내어 살피는 중이었다.
흰색 비단 손수건, 갤러웨이 성에서 에우로스가 제게 건넸던 것이었다. 그때 바로 돌려주려고 했는데 여태까지 가지고 있게 되었다.
데본셔 공작가의 꽃, 장미가 화려하게 수놓아진 부드러운 질감의 손수건이었다. 눈물을 닦느라 얼굴에 대었을 때 섬유에서 장미 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와, 꼭 장미 꽃잎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걸 기억한다.
이윽고 프시케가 결심한 듯 말했다. 결의에 찬 말투와는 달리 얼굴에는 수줍음이 역력했다.
“잉그린트에서는 사냥대회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손수건을 준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