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외전 Ⅳ
“그 여자들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하르모니아가 들고 있던 수틀을 내팽개치며 말했다. 그녀는 연극제에서 만난 사교계 여자들의 행태에 대해 극심한 분노를 한 땀 한 땀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온 남자에게 수작질을 해도 분수가 있지!”
얼마 전, 두 부부는 테임 강변에서 열리는 연극제에 다 함께 참석했다.
축제의 첫날 사무엘과 하르모니아가 프시케를 데리러 저택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에우로스가 프시케의 어깨를 감싸고 현관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에우로스, 어디 가?”
사무엘이 묻자, 에우로스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연극제.”
“네가? 연극제에?”
사무엘은 에우로스가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건 프시케와 하르모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을 관람하는 것은 사교를 위해 꼭 필요한 소양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무엘이 극장에 가자고 할 때마다 에우로스는 무슨 오물 처리장에서 함께 뒹굴자는 말을 들은 것처럼 거부해왔다.
그 대신 그는 극본을 구해 읽고, 신문에 실린 평론을 훑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연극을 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도 에우로스는 완강했다.
“제가 부탁했어요. 아무래도 조금 불안해서요.”
프시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제법 불러온 배를 매만지며 살짝 에우로스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홍조로 곱게 물들었다.
그 까탈스러운 에우로스도 아내의 부탁은 여간해서 거절하지 못하는구나. 말로는 뱉지 못했지만 같은 생각을 하던 사무엘과 하르모니아는 서로 짓궂은 눈빛을 교환했더랬다.
그렇게 네 명의 남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테임 강변에 도착했다. 그리고 에우로스가 마차에서 내리는 아내를 살뜰하게 부축한 뒤, 몸을 돌려 소매와 목깃을 정돈하고 있을 때였다.
“아아!”
캐번디시가의 마차 앞을 지나치던 앳된 숙녀 하나가 그 자리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흰 레이스 양산을 힘없이 떨어트린 여자는, 에우로스의 앞에서 종이 인형처럼 폭, 하고 고꾸라졌다. 정확히 에우로스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설마 계산했을 리는 없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수백 번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만한, 말들에게 먹이기 위해 쌓아 둔 건초 더미 위로 몸을 뉘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그 옆에 서 있던 에우로스 캐번디시 소공작에게 이목이 쏠렸다.
“…….”
에우로스는 발발 떨며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있는 여자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녀가 몸을 날린 건초 더미에서 지푸라기와 먼지가 피어오르자, 보다 못한 프시케가 에우로스의 등에 조심스레 손을 대며 말했다.
“숙녀분을 어서 일으켜 줘요.”
그때 사무엘은 목격했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붉은 입매의 한쪽 끝이 0.02인치 솟아 있는 걸. 못마땅하기 이를 데 없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에우로스는 장갑을 낀 손으로 누워 있는 여자의 어깨와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여자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격하게 호흡했던지 가슴의 절반을 드러낸 살구색 드레스의 앞섶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괜, 괜찮아요.”
간신히 대답을 마친 여자가 에우로스를 향해 아련하게 몸을 돌린 뒤, 긴 속눈썹을 파닥이며 말을 건넸다.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다해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어 보였다.
“소공작님, 감사의 인사로 다음 달 제집에서 여는 시 낭독회 초대장을 보내도 될까요?”
“감사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에우로스는 허리를 굽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최고급 고래뼈 양산을 주워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마부에게 던지듯 건네고는 프시케의 손을 잡고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런 해프닝이야 한 번쯤은 농담의 소재도 되고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무엘과 하르모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나!”
에우로스의 구두 바로 앞으로 챙이 큰 모자 하나가 뚝 떨어졌다. 공작새의 깃털과 생화를 엮어 만든 장식 옆으로 대성당 종 크기와 맞먹을 만큼 커다란 리본이 달린, 끔찍하게도 화려한 모자였다.
그들과 조금 떨어져 있던 곳에 서 있던 늘씬한 여자가 달려와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앞에 섰다. 아까 보았던 건초 더미와 비슷한 색깔의 희멀건한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꽤 귀여운 인상의 숙녀였다.
“바람이 불어서…… 모자가 이리로 날아왔네요. 오늘 바람이 참 많이 부는 것 같아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고동색 눈동자에 에우로스의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눈물도 가득 들어찼다.
프시케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사무엘과 하르모니아는 감히 그 상황에 끼어들지 못한 채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는 오염된 테임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 중에서 표정에 변화가 없는 이는 에우로스가 유일했다. 그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더운 공기 속에 바른 자세로 곧게 서서 눈물로 그렁그렁한 여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바람이, 바람이…….”
불에 달군 집게로 두어 시간 동안은 공을 들여 모양을 낸 머리카락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애타게 바람을 외쳤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안해진 여자는 급기야 고여 있던 눈물을 뚝뚝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냥 약한 실바람이라도 불어 줘라. 하르모니아가 무심한 테임 강을 향해 작게 읊조렸다.
그 소망의 이유는 여자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여자들의 눈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프시케의 눈물은 아마도 예외겠지만.
“저, 이거…….”
프시케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작게 울렸다. 그녀는 에우로스의 발치로 굴러온 모자를 주워 들어 울고 있는 여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자 프시케의 호의로 엉겁결에 제 얼굴의 세 배쯤 되는 모자를 회수하게 된 여자의 눈에, 이번에는 눈물이 아닌 다른 것이 끈끈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부인께서는 참으로 친절하시군요.”
수치와 적의가 올라앉은 눈빛이 프시케에게 직진했다. 비꼬는 투가 역력한 말에 프시케는 자기도 모르게 제 배를 살짝 감싼 채로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에우로스가 움직였다. 예의 따위는 개나 줘 버린 태도로 여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프시케를 막아선 것이다. 그 결과 여자의 얼굴에는 수치가 가라앉고, 적의만 맹렬히 살아남았다.
“스완슨 영애.”
결국 하르모니아가 모자를 움켜쥔 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섰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티 파티 초대에 대한 답은 지금 드릴게요. 거절을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앞으로도 제게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국 왕자와의 혼담을 깨고 작위 없는 사무엘 스태포드와 결혼하긴 했지만, 하르모니아는 여전히 사교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데본셔 공작에게 내쳐지다시피 했어도, 소공작인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워낙 든든하게 그녀의 뒤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차츰 희게 질려 갔다. 하르모니아의 말은 사교계의 큰 축에서 밀려나게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프시케를 향한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하르모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메리 스완슨도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못지않게 오랜 시간 에우로스를 짝사랑해 온 여자였다. 아마도 그녀는 프레이아가 사라지자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애, 이제 그만 비켜 주세요.”
하르모니아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불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순진하게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에우로스의 재킷 위로 순식간에 얼룩이 번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와 거의 동일한 색상을 골라 프시케가 선물한 근사한 옷에 보라색 포도주가 쫙 끼얹어진 것이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당연히 남자가 아니었다. 연극 관람이 끝나고 근처에 마련된 가설 공간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에우로스의 앞으로 여자 하나가 취해 안겨 들었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잔에는 마침 포도주가 반쯤 차 있었다.
“바, 발이 걸려서 넘어져, 넘어졌…….”
리던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여자였다. 아마 지방 귀족의 딸이겠지. 하르모니아는 생각했다.
최신식 유행을 따르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에, 잉그린트 서부 악센트를 쓰는 수더분한 인상의 영애는 자신이 망가트린 에우로스의 옷을 보며 목덜미를 붉힌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에우로스의 무릎에서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는군. 하르모니아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우로스의 재킷과 셔츠에 묻은 포도주를 닦아 내려 하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잔뜩 예민한 얼굴로 손수건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에우로스와 그의 무릎에 앉은 여자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취한 숙녀를 밀칠 수도, 그렇다고 받아 줄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린 데본셔 소공작이 향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약식 내기도 조용히 진행 중이었다. 또한 그걸 다 지켜보고 있는 소공작부인의 표정을 틈틈이 지켜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 죄, 죄송해…….”
여자의 혀 꼬인 발음을 듣다 못한 하르모니아가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녀가 사무엘과 함께 에우로스에게 딱 달라붙은 여자를 떨어트려 놓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에우로스의 옆에 앉아 있던 프시케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