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39)화 (139/146)

139. 외전 Ⅲ

“에우로스,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

에우로스는 뜬금없는 내기 제의에 눈매를 찡그리면서도 일단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잉그린트인들에게 내기는 일상이었다. 본인만 해도 수시로 사무엘에게 내기를 제안하며 놀리곤 했으니까.

“에우로스 캐번디시 소공작께서 이번 사냥대회에서는 손수건을 받겠다고 선언해.”

사무엘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웃기면서도 안타깝고, 재미있으면서도 가여웠기 때문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에우로스를 상대로 안타깝고 가엾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속수무책인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좀 귀엽기도 했다.

프시케가 자취를 감춘 적이 있어서일까, 에우로스는 유독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답지 않아졌다. 사무엘은 그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구는 것 같아도, 프시케가 연관되면 항시 자신만만하게 빛을 쏘던 저 맑고 새파란 눈동자에 불순물이 섞여 든다는 것을.

불안은 아니었다. 불안이나 공포처럼 결핍에 의한 게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현재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고, 올가을 즈음에는 부모도 될 터였다.

결국은 그 불순물의 실체라는 것이, 질투나 아쉬움 따위의 유치한 감정놀음이라는 거다. 하늘이 내린 미남자에, 인기로 따지면 브라이튼 섬을 넘어 대륙에도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널린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질투라니. 세상은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사무엘은 질투는 질투로 잠재울 수 있음을 알았다. 본인만 해도 그랬다.

아까 에우로스의 도발로 프레데릭인지 누구인지에 대해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했으나, 연극제에서 제 옛 청혼 대상을 보고 짜증 내던 하르모니아를 떠올리니 위안이 되지 않던가. 분명 황당하긴 했지만, 은근히 만족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손수건을 받으라고? 왜지?”

여인들이 무운을 빌며 사냥대회 참가자들에게 건네는, 오색찬란한 손수건.

그런 의미 없는 의식 따위는 질색이었다. 에우로스는 여태껏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 손수건에 꽁꽁 싸매어진 뜻은 무운의 기원이 아니라 사실 성애의 표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스무 살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여우 사냥대회에서 그 누구의 손수건도 받지 않았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것도 애당초 거절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천하의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도 질투라는 것을 하겠지.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여자들이 선물한 손수건을 왕창 들고 귀가한다면 말이야.”

“글쎄.”

에우로스는 그다지 수긍할 수 없었다. 프시케는 늘상 부드럽게 흔들리는 수면과 같은 여자였다. 가끔 자신이 돌을 던지면 통통 물살을 튕겨 올리며 눈부시게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절대로 거센 물살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그게 불만이다.

아내의 바가지와 잔소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여타 남자들이 들으면 행복에 겨워 별게 다 불만이라며 거친 욕을 독하게 퍼부을 만한 생각이겠지만, 어차피 모든 감정은 느끼는 주체의 절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현재 절대적으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어린 시절 프시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마음 때문에 수없이 격한 파도에 휩쓸렸다.

그러나 프시케는? 데이모스나 프레이아로 인한 공포와 분노로 부침을 겪었을지언정, 자신이 이유인 적은 없었다. 아니, 적어도 제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밤하늘이다. 흔들림 없이 규칙적으로 순환하며 움직이는 우주. 정해진 자리에 별자리가 있고, 일정한 궤도 내에서 움직이는 검고 평화로운 우주.

한낱 미물이 뒤흔들 수 없는 광대하고 고요한 존재를 아내로 둔 에우로스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미치겠군.

에우로스는 데이모스의 가학성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비록 그 자신이 대단히 고매한 성품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데이모스처럼 남을 괴롭히면서 희열을 얻는 부류는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째서, 왜, 프시케가 저에 대한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인가. 저를 보며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마침내 그 발긋한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안겨 왔으면 하고 바라는 것인가.

프시케를 침대 밖에서도 울려 보고 싶다.

에우로스는 갑자기 가슴이 콱 뻐근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사무엘의 저 시답잖은 제안에 동하는 이유가.

“어쨌든, 이번에는 손수건을 받는 걸로 해. 그리고 우리는 내기를 하도록 하지. 자네 부인이 질투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어느새 사무엘의 눈에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넘어왔군. 에우로스의 오른쪽 눈썹 앞머리가 0.08인치가량 들리고, 뒤쪽이 0.05인치 내려앉으면, 겉으로 보기엔 무표정일지라도 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고려 중이라는 걸 이제 그는 알고 있다. 이 정도의 관찰력을 하르모니아에게 발휘한다면 브라이튼 최고의 남편이라고 칭송받을 일이었다.

“누가 어느 쪽에 거는 거지?”

에우로스의 오른쪽 눈썹 앞머리가 0.01인치 더 들려 올라갔다. 내기에 응할 것임이 이로써 확실시되었다.

“나는 자네 부인이 질투하지 않는다는 쪽에 걸겠어.”

사무엘이 뻐기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말투와 조금 달랐다.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은 제 남편을 사랑하는 여인이니 당연히 질투할 것이다. 질투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사랑 뒤편에 드리워진 치졸한 그림자니까.

물론 그 감정을 표출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본인의 선택이다. 사무엘 자신만 하더라도 굳이 프레데릭에 대한 자신의 옹졸한 마음을 하르모니아에게 굳이 표현한 적은 없었다.

이번 내기는 져 주기로 결심하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자신의 판단에 반하는 쪽을 선택해 먼저 자리를 잡았다.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께서 부디 질투라는 감정에 눈을 뜨시어 속 좁은 그녀의 남편을 기쁘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럼 나는 프시케가 질투를 한다는 데 걸어야 한다는 말이군.”

에우로스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구태여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괜히 내기에 응한 것 같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한편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실안개처럼 퍼져 오르는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지.”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에우로스가 산뜻하게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실안개 같았던 기대가 거대한 뭉게구름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내기를 하겠다고?”

적어도 몇 번은 튕길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가는 에우로스의 답에 사무엘이 흠칫 놀라 물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간이다. 이렇게 주관적이고도 평가 잣대도 애매한 내기를 군말 없이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었다.

“응. 그러자고 제안한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한데, 이렇게 쉽게?”

몇 번은 설득해야 할 거라고 여겼는데, 너무 쉬운 수락은 또 달갑지 않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 존재다.

“그렇다니까.”

에우로스는 한번 결심하면 물리는 적이 별로 없었다. 이번에도 결심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받아들인 내기였지만 늘 그래 왔듯 승리할 사람은 자신이 될 테니까.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라서.”

에우로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긴 속눈썹으로 덮어 버린 새파란 눈동자에 들어찬 호승심을 사무엘은 똑똑히 보았다.

뭐야 저건.

오늘따라 에우로스의 심경이 매우 종잡을 수 없이 날뛰는 것 같다. 처음에는 대단히 저조해 보이던 심기가 지금은 또 멀쩡히 회복된 것 같고, 이제는 그다지 근거도 없어 보이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기다렸다는 듯 내기를 받아들이다니.

“왜 그렇게 생각해?”

자존심이 상한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도무지 실패의 가능성이라고는 염두에 두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이 저 인간을 저렇게 만든 거지?

“무엇을?”

“아니, 왜 자네가 이길 내기라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야. 내가 이길 수도 있잖아.”

사무엘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대답 대신 픽 웃었다.

그거야, 이번 사냥대회에서 본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할 예정이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사무엘 스태포드는 이번에도 또 질 것이다.

“손수건만 받으면 돼?”

에우로스가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불순물이 섞인 것 같던 눈동자에 금세 번쩍번쩍한 패기와 자만이 깃드는 것이 보였다.

“뭐?”

하지만 이쯤 되니 사무엘은 슬슬 불안해졌다. 살살 흔들어 프시케의 질투심을 자극하자는 말이었지, 저렇게 강력한 의지로 무장한 채 내기에 임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져, 그는 스리슬쩍 발을 빼고 싶어졌다.

“과연 손수건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할까?”

그 말에 사무엘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느 여자가 제 눈앞에서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 손수건 백 장쯤 받는 것을 보고 질투하지 않겠는가.

“……그거면 되지 않을까?”

어쩐지 일이 커지는 느낌이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사무엘은 에우로스를 힐끗 보았다.

“그래?”

그때 에우로스가 사무엘과 눈을 맞춰 오며 환하게 웃었다. 사무엘은 오랜만에 보는 그 웃음에 움찔 몸이 굳었다.

아, 저건. 저건 아닌 것 같다.

“에우로스.”

사무엘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설마 사냥대회에서 여자들에게 손수건을 받으면서 그렇게 웃어 줄 건 아니지?”

말려야 한다. 에우로스가 한동안 저렇게 웃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저 환한 웃음이 가진 파괴력을.

“안 될 것 없지. 내기잖아. 내가 내기에서 져 본 적이 있던가?”

에우로스의 대꾸에 사무엘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젠장, 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기에 무엇을 걸어야 할지를 정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에우로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응접실로 스미는 햇살이 화사한 그 웃음을 단독 조명처럼 비추었다. 원하는 것이 있는 웃음. 사무엘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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