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외전 Ⅱ
“기분이 어때, 사무엘?”
……미친놈인가? 싸우자는 말인가? 사무엘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고작 아내의 풋사랑에 흥분하는 미성숙한 남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사뭇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기분이 어떻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하지만 사무엘의 목소리는 진심을 숨기지 못했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던 것이다.
왕립극장이라니 아주 한심한 작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사이 대단히 유명해지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프레데릭인지 프랜시스인지의 독주회 소식이 리던 시내에 파다해지겠지. 그럼 하르모니아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데 왕립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건.”
“꽤나 성공했다는 뜻이지.”
에우로스가 사무엘의 말을 끊고 간단히 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
프레데릭은 잉그린트를 떠난 후 갈리아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클럽과 식당을 전전하며 피아노를 치던 중, 갈리아의 거물급 인사의 눈에 띄어 유명해졌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하르모니아의 안목이 영 형편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프레데릭의 왕립극장 공연은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왕립극장은 왕을 비롯한 극소수 후원자들의 돈으로 굴러가는 곳이었다. 매년 적자를 내어 후원금으로 겨우 충당해 유지하면서도, 어찌나 콧대가 높은지 대귀족 가문 출신 정도나 되어야 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어떻든지 간에 왕립극장에 후원하고 싶어 했다. 왕립극장의 후원자가 된다는 건,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사업가로서의 에우로스는 지극히 실용적이고 타산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극장 후원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데본셔 소공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 이전에는 입적을 거부했던 거였다.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 하니까.
어쨌든 프레데릭의 공연 소식은 그 소수의 후원자들에게만 미리 알린 것이었다. 갈리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신진 음악가를 초청하겠다며 프레데릭의 이름과 작품명을 수록한 소책자를 보냈을 때만 해도 에우로스는 ‘그’ 피아노 반주자와 신진 음악가가 동일인임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프레데릭은 매우 흔한 이름이었으므로.
“그 사람이네요.”
그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프시케였다. 그것도 바로 오늘, 사무엘과 하르모니아가 방문하기 직전이었다.
“그 사람?”
“예전에 공작저에 피아노 반주하러 와 줬던…….”
에우로스의 물음에 프시케가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때 하르모니아가 그 반주자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된 에우로스의 반응이 부정적이다 못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프시케의 말을 듣자마자 에우로스는 소책자에 흐릿하게 인쇄된 음악가의 초상화를 확인했다. 그 사람이 이렇게 생겼던가. 과거의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에우로스의 성격답게, 그는 프레데릭의 얼굴을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어쨌든 초상화에 그려진 물오른 얼굴로 유추하건대, 잉그린트에서처럼 힘들게 지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러니까 왕립극장에서 연주회를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따가 사무엘과 하르모니아가 오기로 했으니, 이건 치워 둘게요.”
에우로스와 프시케가 리던에 머물 때마다 사무엘은 하르모니아와 함께 하루에 한 번 꼭 그들의 저택에 들르곤 했다.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차를 얻어 마시며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프시케가 그들의 방문을 무척 반겼기 때문에 에우로스 또한 별말 없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가면 한동안 만나기 어려울 테니까.
“사무엘이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에우로스의 의아한 표정에 프시케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프시케의 대답에 에우로스는 약간의 들뜬 흥미를 느꼈다. 프시케 캐번디시도 질투라는 감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이다.
당연히 사무엘은 질투하겠지. 에우로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실상 그만 해도 갤러웨이 성의 정원에서 프시케에게 청혼하던 말콤 월레스를 떠올리면 짜증이 났으니까 말이다.
“내가 널 걱정해, 프시케.”
“오랫동안 널 사랑해 왔어.”
“나와 결혼해 주겠어?”
감정이란 참으로 유치하고 변덕스러운 것이다. 에우로스는 최근 몇 년 새 그 사실을 너무나 확연하게 깨달았다.
감정은 인과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주어지면 결괏값처럼 도출되는 것이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타인의 마음을 얻기도 쉽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는 프시케를 만난 후부터 그런 제 믿음이 자꾸 허물어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랑으로 비롯한 변수들을 껴안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변수는 인과 공식을 저해하고, 결괏값을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말콤 월레스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프시케가 그에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썩 편히 놓아지지 않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당연히 에우로스는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말콤 월레스의 청혼에 대한 내용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무엘 스태포드처럼 신사의 도리니 뭐니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저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무엘은 확실히 저보다 귀족적이기는 했다.
“사무엘, 질투해?”
말을 잃고 어버버하는 사무엘을 지켜보던 에우로스가 마침내 질문했다.
“질투? 질투라니? 내가?”
사무엘은 얼굴을 붉히며 팔을 휘휘 내젓더니 급작스레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흐음, 사무엘이 귀족적이라는 생각은 잠시 보류할 필요가 있겠다.
“질투하는 게 확실한데.”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은 눈을 잠시 꾹 감았다가 떴다.
“에우로스.”
“…….”
“대체 무슨 심술인지 털어놔 봐.”
사무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본래 남의 과거에 관심이 있는 인간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도 잊고 사는 인간이 무슨.
그렇다면 왜 자꾸 프레데릭인지 프랜시스인지를 들먹이며 나를 떠보는가.
아까부터 희미하게 느꼈듯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현재 심경이 복잡하다. 그리하여 빙빙 말을 돌리고 있다.
자기 얘기를 털어놓자니 답지 않은 일이라 여겼을 거고, 그래서 이 사무엘 스태포드를 희생양으로 삼아 제물대 위에 올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심술이라니.”
에우로스는 잔의 바닥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전부 마셔 버리며 툭 말을 뱉었다.
그런 그를 응시하며 사무엘은 머리를 굴렸다. 이 근본 없는 대화의 시작은…….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과 연극제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자신은 프시케가 질투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드디어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다.
“에우로스, 질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무슨 질투.”
어처구니없어하는 에우로스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사무엘이 피식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했지. 대체 무슨 비뚤어진 생각을 하고 있길래 귀하게 여기는 여동생의 훌륭한 남편을 들들 볶는 거지?”
“훌륭하다니…….”
에우로스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빈 잔에 위스키를 조금 더 따랐다.
“대낮부터 술을 그렇게 마셔도 돼?”
사무엘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 꼴을 지켜봤다.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워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눈도 한번 깜짝하지 않을 위인이긴 했지만, 쓸데없는 음주는 지양하는 에우로스의 성격을 고려하자면 한번 말려 보기는 해야 했다.
응접실에 화하고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사악 퍼졌다. 처음 사무엘이 극도로 혐오하던 그 토탄 냄새도 물에 풀린 물감처럼 아스라이 함께 번졌다.
그 과거의 냄새가 풍겨 나오자, 에우로스의 오랜 친구이자 연대보증인인 사무엘은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말콤 월레스를 생각하기라도 한 거야?”
사무엘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잉그린트 정부의 주적, 말콤 월레스. 그는 한동안 용병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얼마 전부터 블랙워치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죽인 티모시 로스와 함께였다.
아직 소규모인 데다 근거지를 수시로 옮기는 바람에 정부는 말콤 월레스를 당장 잡아들일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블랙워치를 소탕하던 시기에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지만, 고든레녹스 총리의 퇴진 이후 그런 움직임은 많이 사그라든 상태였다.
게다가 현재까지 대외적으로 실종 상태인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고문실 만행 때문에 스코틀린의 친 잉그린트파 귀족들 사이에서까지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새로이 선출된 총리는 적당한 수준으로 반군들을 모른 척해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한 아직도 잉그린트어로 기초적인 인사말만 하는 조지 왕의 무관심도 작금의 상황에 한몫했다.
“…….”
에우로스는 이제 이 대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사무엘은 대충 때려 맞추는 데 괜찮은 소질이 있었다. 다트 보드의 정중앙에 핀을 단박에 꽂아 넣지는 못해도, 대여섯 개 핀을 마구잡이로 던져 중간 언저리에 맞춘 뒤 합산한 점수를 따는, 나름대로 실력이 출중한 선수인 것이다.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실력이 출중한 다트 선수 사무엘은, 자신이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과 치졸한 감정에 파묻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면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남자답게 인정하고 비웃음을 살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하고 자존심을 챙길 것인가.
에우로스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사무엘이 빙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에우로스, 우리 내기 하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