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36)화 (136/146)

136. 에필로그 Ⅱ

채스웍 하우스의 3층 맨 끝 방에는 여전히 커다란 천체망원경이 있다.

안개가 걷히고 밤하늘에 빼곡한 별들이 빛날 때면 에우로스는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빛의 무리들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프시케도 늘 그의 옆에 있었다. 에우로스는 그 시간을 아주 많이 좋아했다.

“먼 나라의 동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대요.”

망원경에서 눈을 뗀 프시케가 뒤를 돌아 에우로스의 입술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더비 경마대회가 끝난 후, 그들은 이클립스를 데리고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왔다.

리던에 머무는 동안 조금 해쓱해진 얼굴로 사과주스를 들이켜는 하르모니아를 보며 프시케는 어쩐지 조급해졌다. 사무엘과 하르모니아보다 결혼 기간은 더 긴데, 아직도 그들 부부에게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오는 며칠 내내 프시케는 그 이야기를 곱씹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읽어 주었던 순수한 내용의 동화를.

하늘에서 살던 별 하나가 지상에 내려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별은,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넘치는 부부를 찾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아직도 별은 하늘에서 살피며 기다리고 있답니다.

자신을 가장 사랑해 줄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예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어여쁜 아기가 된다는 얘기예요.”

그 별이 우리에게 와 주지 않을까. 프시케는 그런 기대를 했다. 그들은 매시간 매분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아직 그들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오지 않는 건, 그 별이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어서라고. 그녀는 그리 믿었다.

그때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별 하나가 새파란 꼬리를 길게 흘리며 떨어졌다. 에우로스는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별의 낙하를 똑똑히 보았다.

“아마도 그 동화는 오늘 현실이 되겠군요.”

짙푸른 눈동자에 별이 비쳐 떨어지는 순간 수면에 인 파문처럼 물결이 일었다. 프시케에게 입 맞추는 에우로스의 팔에 단단히 힘이 실렸다.

“침실, 침실로 가요.”

순식간에 들려 창틀에 앉혀진 프시케가 급히 속삭였다.

“밖에서 누가 보면 어떡해요.”

에우로스는 울상이 된 아내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곧고 매끄러운 목에 자잘한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젖혀진 창문 틈으로 밀려 들어왔다. 금세 서늘해진 피부 위를 뜨거운 입술이 살살 간질였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타오를 것 같은 체온 때문인지 오소소 소름이 돋아 프시케는 몸을 떨었다. 그러자 둘의 몸이 더 밀착했다.

“여기서 해야 별이 잘 찾아올 테니까,”

에우로스가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아서 프시케는 움찔움찔 몸을 조였다. 그러자 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니까 소리 내요. 별이 들을 수 있게.”

에우로스는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자신이 행복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침대 시트를 확인하고는 실망한 얼굴을 하던 프시케의 마음을 다독여 줄 때도, 그의 위로는 진심이었다. 그렇게 둘이서만 지내는 것도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프시케는 내내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사교 시즌을 맞아 새로 마련한 리던의 저택에서, 갓 결혼한 하르모니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날 이후로 죽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괜찮지 않고, 어쩌면 조금 아팠다. 에우로스는 괜찮지 않은 일은 되도록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픈 것은 넘기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아하고 느긋하게 초원을 노니는 것 같은 경기가 아니라, 이클립스의 마지막 경기처럼 전력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사랑하는 아내에게 엄청난 배당금을 안겨 주기로 한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드세졌다. 박자가 사정없이 뒤엉키고 신음이 흙먼지처럼 피어올랐다. 거칠고 빠르게 움직이는 말 위에 탄 기수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떨어지지 않게 꽉 매달려 버티는 것.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에우로스와 몸을 붙이고 있는 프시케 캐번디시의 최선이었다.

눈앞에 새파란 빛이 파뜩 튀었다. 아까 에우로스가 본 별빛이 그랬을까.

“일어나요, 프시케.”

어느새 별이 지고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조금 더 있으면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기 위해 파닥파닥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를 시간이었다.

살며시 뜬 눈앞에 파란색 눈동자가 잔잔하게 웃었다. 유독 붉은 입술이 풍성하고 까만 속눈썹을 톡 건드리다 비벼 왔다.

에우로스는 열정적인 사내였다.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그녀를 매만지다가도 마지막에는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곤 했다.

하룻밤에 여러 번 경기를 치러도 지치지 않는 엄청난 체력 탓에, 프시케는 아주 가끔은, 조금 다른 의미로 밤을 두려워했다. 물론 두려워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제는 심했다. 기수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쉼 없이 달리는 말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여기는……?”

“아직 3층이에요.”

에우로스는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잠든 프시케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나가 하녀들에게 폭신한 요와 이불을 가져오게 했다.

에우로스가 프시케의 입에 물잔을 기울여 대어 주었다. 꼴깍꼴깍 몇 모금 물을 마신 프시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3층 맨 끝 방의 창문은 훤히 열려 있고, 자신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어째서 침실로 가지 않았어요?”

프시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끔, 음, 드물게 침실이 아닌 곳에서 사랑을 나눌 때가 있긴 했다. 예를 들면 정원 꼭대기에 있는 분수나 서재, 아니면 에우로스의 집무실이라거나…….

생각해 보니 드물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항상 에우로스는 그녀를 안아 들고 마지막에는 침실로 향했다. 그 나름의 배려였다.

“내일까지는 여기서 지내요.”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약간 갈라진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푸른 수염의 방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으니까,”

엉망이 된 드레스에 긴 손가락이 닿았다. 난도질당한 것 같은 천 더미를 하나하나 끌러 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방해받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프시케 캐번디시의 크고 아름다운 말은, 이번 경기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이 마침내 하늘 위에서 제자리를 찾던 별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우로스는 마음먹은 것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 내는 인간이고, 이번에도 그는 원하는 것을 가졌다. 그가 원한 것은 아내의 환희에 찬, 벅찬 미소였다.

* * *

“왕궁에 있는 것도 이것보단 덜 화려하겠어요.”

에우로스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지은 온실을 마주한 클라리사의 소감은 이랬다.

아이가 추운 겨울에도 안전하고 따뜻하게 뛰어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프시케가 잠결에 흘리듯 했던 말의 결과였다.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유리 온실을 보며, 그녀는 앞으로 조금 신중하게 말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이 온실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온실을 꾸미는 일은 전적으로 프시케와 클라리사의 몫이었다. 입덧으로 고생하는 프시케 대신 클라리사가 거의 대부분의 일을 해치웠다.

클라리사는 위풍당당한 태도로 구매할 식물 목록을 에우로스에게 건넸다. 그녀가 인더스의 방갈로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키가 크고 잎이 넓은 활엽수들의 이름이 목록에 빼곡하게 적혔다. 그걸 받아 든 에우로스는 곧장 인더스로 사람을 보내 묘목과 씨앗을 사들였다.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따스한 온실에서, 그것보다 더 따스한 체온으로 손을 잡아 오는 아내를 보며 에우로스는 또다시 잔잔하게 웃었다.

“한겨울에도 수레국화는 꼭 심을 거예요. 빨간 장미도요.”

시간이 더 많이 흘러, 수레국화와 빨간 장미가 만발한 겨울의 온실에서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아이들은 기어 다니는 개미를 구경하고, 맨손으로 흙장난을 했다.

그리고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사이좋은 남매의 뒷모습을 보며 방갈로 앞마당에서 홀로 놀던 닐을 떠올리다 미소 지었다.

대화가 많고, 지문이 풍부하며, 아역 배우들이 등장하는 희극의 한 장면이었다.

* * *

‘인생은 멍청이가 떠드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다.’

그 말은 틀렸다.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인생은 소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결국엔 의미 그 자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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