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에필로그 Ⅰ
리던 사교계 사람들은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정식 데뷔탕트 무도회를 앞둔 영애들은 봄이 오기를 가장 기대하겠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오락거리와 유희가 넘쳐 나는 가을의 사교 시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나 줄줄이 열리는 무도회와 티 파티, 행사들 중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이 바로, ‘더비 경마대회’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것이 경마다. 그야말로 찌릿찌릿한 자극과 흥분이 넘실거리는 진정한 축제의 현장인 것이다.
특히 올해 경마대회에는 예년에 비해 훨씬 더 큰 관심이 쏠렸는데, 전설적인 경주마 이클립스가 이번 시즌에 은퇴한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마의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한 기대감으로, 다시는 그런 훌륭한 경기를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으로 제각각의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리던 외곽의 경마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번에도 이클립스 혼자 달리게 될까요?”
하르모니아가 가을볕에 뜨끈해진 사과주스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미지근한 사과주스만큼이나 김이 팍 식은 목소리였다.
이런 날은 차가운 발포주 한 잔이 제격인데. 하르모니아의 말끝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그럴 것 같아요.”
프시케도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그들은 방금 전 치러진 경기를 관람하고, 30분 뒤에 있을 마지막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이클립스가 지난 몇 년간 출전한 경기는 총 열여덟 개였다. 그리고 이클립스는 방금 전의 경기까지 합쳐 무려 여덟 번의 경기에서 독주했다. 실력이 월등한 탓에 경쟁자들이 전부 기권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클립스의 주인, 에우로스 캐번디시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숙덕거렸으나, 실상 에우로스는 그런 상황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모름지기 경마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경쟁하는 걸 보며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다. 이클립스 홀로 달리고 홀로 이기는 건 재미도,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 경기니까 이클립스가 다른 말들과 같이 달리면 좋겠어요. 기왕이면 전력을 다해서.”
높은 장대 위에서 펄럭이는 빨갛고 노란 깃발들에 시선을 주며 프시케가 말했다.
다른 마주들과 기수들이 이클립스와의 경쟁을 회피하는 건, 이클립스가 그 어떤 경기에서도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적당히 느긋하고 우아하게, 그러나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말의 옆에서, 다른 말들은 지레 의욕을 잃고 속도를 줄여 버렸다.
얼마 전에는 이클립스의 그런 경기 방식이 마주의 영향 때문이라는 칼럼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칼럼을 쓴 사람은 ‘불길한 날에 태어난’ 이클립스의 ‘건방진 태도’와 ‘교활한 성격’을, 말의 주인인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출신과 슬쩍 엮어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렇게 될 겁니다.”
잠시 관중석을 비웠던 에우로스가 돌아와 프시케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고양되어 있어,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에우로스의 얼굴을 살폈다.
바깥에서 보여 주는 에우로스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냉랭하리만큼 서늘하지만, 이제 프시케는 그 미묘한 차이를 확실히 알았다. 그는 지금 꽤 즐거운 눈치였다.
“정말요?”
제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하는 에우로스에게 프시케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살짝 세운 혀끝이 느릿하게 예민한 손목 안쪽을 쓸자 그녀는 하르모니아와 사무엘이 앉은 쪽으로 당황한 시선을 주었다. 다행히 그들은 망원경의 배율을 조절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래요. 이번에는 꽤 재미있는 경기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에우로스는 방금 경마 신문에 자신과 이클립스를 비교하는, 사실은 조롱하는 글을 쓴 당사자를 만나고 온 길이었다. 지지난 시즌에 꾀병을 부렸던 이클립스에게 호되게 당한 거대한 흑마, 부케팔로스의 마주였다.
부케팔로스는 요즘 최고의 기량을 보이는 말이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솟아오르다 못해 하늘로 뻗은 그의 주인, 알렉산드로스는 이클립스의 은퇴 경기에서 부케팔로스와의 재대결을 제의했다.
에우로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어마어마한 액수를 이클립스의 승리에 걸었다. 리던 시내의 저택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이었다.
도박과 내기를 좋아하는 잉그린트인들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두 마주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신사들은 곧바로 마권을 사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세기의 대결이 도래했음을 알렸다.
프시케가 손목에 닿는 열기에 수줍어하며,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발끝을 움츠리는 사이에도 시간은 갔다. 마침내 이번 경마대회의 하이라이트, 이클립스 최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하려나 봐요!”
하르모니아가 체통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중석에 빽빽이 들어찬 군중들도 까치발로 서서 경기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클립스에게 걸겠어요.”
하르모니아가 말하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전에 부케팔로스에게 걸었다가 꽤 손해를 많이 봤다지?”
“그건 이클립스가 다 죽어 가는 것처럼 비실거려서 그런 거잖아!”
하르모니아가 꿍얼거렸다.
이클립스가 대단한 말인 건 맞지만, 그 주인과 정말 닮았다. 저렇게 얄밉게 구는 것,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그리고 매우 잘생겼다는 것. 신문에 실린 칼럼 내용이 다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마음껏 걸어 봐.”
에우로스가 하르모니아의 마권에 적힌 액수를 확인하며 말했다.
“여기서 더?”
“열 배쯤은 더 걸어도 될 것 같군.”
하르모니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소공녀였을 때에도 그런 액수를 경마에 쓰지 않았다. 하물며 사무엘 스태포드의 부인이 된 지금, 그렇게 돈을 썼다가 잃기라도 하면?
“하르모니아, 에우로스 말은 들어도 돼.”
옆에서 사무엘이 거들었다. 에우로스가 하는 도박은 도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잃는 적이 없었으므로.
그때 종소리와 함께 부케팔로스가 입장했다. 사납게 투레질을 하며, 발을 구르는 모습이 꼭 전장을 누비는 군마 같았다.
사람들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함성 소리가 커질수록 부케팔로스의 움직임이 조금 더 거세졌다.
뒤이어 나온 이클립스는 오늘도 새침했다. 초연해 보이기도 한 모습이었다.
거칠게 발을 구르는 부케팔로스의 옆에서, 이클립스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언뜻 보면 다 포기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말 이클립스에게 걸어도 되는 거야?”
하르모니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저렇게 전의를 상실한 것 같은 말에게 돈을 거는 것은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내년에 태어날 조카를 위한 선물이라고 해 두지.”
그 말 한마디에 하르모니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권에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액수를 적어 넣은 뒤 사람을 불러 가져가게 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에게 손해를 끼칠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두 마리의 말이 출발선 앞에 섰다. 어느새 경마장은 조용해졌다. 예민한 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주먹만 꽉 쥐었다. 부인 몰래 큰돈을 건 신사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말들이 달려 나갔다. 맹렬히 질주하는 부케팔로스의 뒤로 이클립스가 마치 초원 위를 달리듯 부드럽게 따랐다. 멀리서 부케팔로스의 주인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프시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우로스를 보았다. 경기를 지켜보는 에우로스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았다. 프시케는 내심 안도했다. 그건 확신의 표현이었다.
프시케의 손가락을 살살 쓰다듬던 에우로스의 손끝에 일정한 리듬이 실렸다. 토독토독, 조금씩 박자가 빨라지면서 손이 움직였다. 찌릿하고 야릇한 감각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프시케는 제 손과 손목과 팔 위를 달리는 그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하르모니아의 째지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클립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토독토독, 땅을 찍어 내는 말발굽 박자도 점점 더 빨라졌다. 초반에 힘을 빼 버린 부케팔로스를 여유롭게 제치며, 이클립스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력 질주였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240야드의 격차를 벌리고 결승선에 가뿐하게 들어선 크고 아름다운 말은, 에우로스가 리던 시내 저택을 수십 개 더 구입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하르모니아의 배 속에 있는 똑똑한 아이가 평생 연구만 하고 살아도 될 만큼의 자금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남들 몰래 경마를 구경하러 온 더비 백작부인에게도 진 수십 병은 살 수 있을 정도의 기쁨을 주었다.
“어, 백작부인, 경마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천박한 놀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경마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무엘 스태포드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기뻤을 것이다.
“사무엘.”
“여기서 부인을 다 뵙게 되다니,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네요.”
서글서글 웃으며 능글능글하게 놀리는 사무엘 스태포드를 노려보던 백작부인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좋은 소식이 들려와서 놀랐다. 경마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이는 사무엘 스태포드도 잘하는 게 하나쯤은 있는 모양이군.”
“부인께서 저를 너무 하찮게 보시는 건 아니고요? 제가 이래 봬도 대단한 정ㄹ……!”
“사무엘 스태포드.”
더비 백작부인이 그의 말을 막으며 홀홀 웃었다.
“곧 초대장을 보내지.”
이클립스가 벌어다 준 돈으로, 백작부인은 진 수십 병을 사는 대신 푸짐한 만찬을 준비해 사무엘과 하르모니아를 대접했다. 장장 5시간 4분 20초 동안 이어진 식사였다.
식사를 하는 내내 이어지는 잔소리를 들으며, 사무엘은 태피스트리에 수놓인 양의 개수를, 하르모니아는 디저트 접시에 그려진 장미 꽃잎의 수를 세었다.
더비 백작저를 나와 파리해진 안색으로 마차에 올라탄 아내를 보며, 사무엘은 결심했다. 다시는 백작부인을 놀리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