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34)화 (134/146)

134. 속마음

시원한 물소리가 흐르는 카듀의 강물 위로 여름 햇살이 쨍쨍 황금화살을 쏘아 댔다. 스코틀린의 사계 중 유일하게 생기가 넘치는 날들을 강물처럼 고스란히 흘려보내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오늘 에우로스와 프시케, 사무엘과 하르모니아, 그리고 클라리사가 이곳으로 외유를 온 이유였다.

“이제 갤러웨이에 사람들이 많아지겠어요, 마님!”

클라리사가 소매로 연신 눈가를 찍어 냈다.

“여기 이런 게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땅을 다 넘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카듀 강에 금맥이 흐른다는 말에 가장 놀라 뒤집어진 사람은 바로 클라리사였다.

처음 사무엘이 그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클라리사는 입을 비죽이며 믿지 않았다. 에우로스의 부연에 미심쩍어했고, 프시케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마침내 하품하는 사람처럼 입을 쫙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예전에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월터 스튜어트 백작, 그러니까 프시케의 아버지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을 거고, 영지가 분해되어 뜯겨 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영지민들도 이주하지 않고, 갤러웨이 성도 평온했을 것이다. 클라리사가 원통해하며 울먹였다. 곧 주저앉아 땅을 칠 기세였다.

“이제 걱정 마, 클라리사.”

사무엘이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무려 5할의 수익 배분을 약속받은 자의 여유였다.

“카듀의 왕이 되실 분이 나타나셨으니까.”

“예? 카듀의 왕이라니요?”

클라리사는 사무엘이 가끔 이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되물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엉뚱한 말만 골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수사를 갉작거리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바로 카듀의 왕이시지. 프시케 스튜어트 영애를 데리러 리던에서 갤러웨이로 오던 길에 황야에서 들은 외침이야.”

“뭐라고요?”

클라리사가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맥베스’라면 그녀도 안다. 그걸 보려고 프시케를 데리고 성을 나갔다가 혼쭐이 나서 다시는 안 봤지만.

“그때, 에우로스를 향해 세 번의 외침이 들렸네.”

“……그게 뭔데요?”

사무엘의 엉뚱한 말과 이해할 수 없는 수사에 반응해 주는 사람은 클라리사뿐이다. 아, 한 사람 더 있긴 하다. 더비 백작부인.

“장차 프시케 스튜어트의 남편이 되실 분, 장차 데본셔 소공작이 되실 분, 그리고 장차 카듀의 왕이 되실 분!”

사무엘이 과장된 연극조로 쩌렁쩌렁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카듀 강 위에서 평화롭게 노닐던 검은 물새 떼가 진저리를 치며 날아올랐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를 마주하는 사람은 두 배로 부끄럽다. 특히 가까운 사람인 경우는 더 그렇다.

그런 이유로 사무엘 스태포드와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 하르모니아 캐번디시는 약혼자의 팔짱을 풀고 슬금슬금 물러나 에우로스와 프시케가 서 있는 쪽으로 피신했다.

“그럼 스태포드 님에게는 뭐라고 외쳤는데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계속 그럴 수 있는 것은 맞장구쳐 주는 사람이 있어서다. 그 사람 또한 클라리사였다.

“에우로스보다 위대하지 못하지만 에우로스보다 위대하다. 에우로스만큼 운이 좋지 못하지만 에우로스보다 운이 좋다.”

“세상에, 그럴듯한 말이네요!”

“그렇지, 클라리사?”

사무엘이 껄껄 웃었다. 그 대사만큼 에우로스와 자신의 관계를 잘 들어맞게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가 그렇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하르모니아에게 했던 청혼이 기적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 사무엘은 브라이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운 좋은 남자가 되었다.

“사무엘은 정말 좋은 남편이 될 거예요.”

그를 지켜보던 프시케가 미소 지으며 에우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말을 들은 에우로스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여동생을 내어 주었지, 별로인 놈이었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긍정하고 싶지 않다.

“확신할 수는 없지요.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수많은 리던 사교계 여인들의 가슴을 애태운 에우로스 캐번디시도 프시케의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다른 남자를 칭찬하면 치졸한 마음부터 앞서는 그런 사내놈 말이다.

프시케는 다정하지만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말들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무엘을 두고 좋은 남편이 될 거라는 말은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고작 그런 걸로 서운해하고 있다는 게 유쾌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들어 봤으면서, 정작 아내에게는 들어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패배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조를 수도 없었다.

새롭게 느끼게 된 수많은 감정들을 처리하는 법을, 아직 에우로스는 배우지 못했다.

“마님! 이쪽에 자리를 잡을까요?”

그때 클라리사가 프시케를 향해 손짓하며 외쳤다. 사무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들고 있던 소풍 바구니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프시케에게 첫사랑이 있다는 거 알아?”

프시케가 클라리사와 사무엘을 돕는 사이, 하르모니아가 들고 있던 양산을 접어 내리며 톡, 하고 말을 건넸다.

알고 있다. 이건 좀 야비했다. 그럼에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에우로스의 약점은 아내뿐이므로 이것 이외의 방법은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아무리 남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워도 곧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야박하게 평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욕을 해도 내가 하는 것이지, 남이 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마차에서 이야기를 했거든.”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고작 사무엘을 칭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발하다니. 입으로만 웃고 있는 캐번디시 남매의 푸른 눈이 화르르 타올랐다.

“알고 싶지 않아?”

“별로.”

도발에 넘어가는 것은 정말 어린아이나 하는 짓이다. 에우로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매우 궁금했다. 제가 알기로 그런 사람은 없었는데, 설마 말콤 월레스는 아니겠지.

“어렸을 때 만났던 소년이래.”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라고 했으니 그걸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싶지만, 어쨌든 하르모니아는 일단 우기고 봤다. 왜냐면 자신은 곧 하르모니아 스태포드가 될 사람이고,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감히 스태포드를 무시했으므로.

그 말에 에우로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 소년이 누구인지를.

“……그렇군.”

남의 입을 빌려 듣는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지만, 그는 안달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내용일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에우로스의 표정이 봄의 눈사람처럼 사르르 풀어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제일 중요한 건 잘생겼냐는 건데, 그건 아니었나 봐.”

“…….”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니까 웃기만 하더라고.”

에우로스도 자신의 외모가 어떤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성공한 부분도 있다는 걸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프시케에게 제 외모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인가. 그래서 고백하지 않는 것이었나.

“듣자 하니 성격도 별로였던 것 같아.”

“…….”

“물어봐도 대답이 신통찮은 거야.”

그렇게 평가받기에는 억울하다. 그날 자신은 분명히 잘해 준 게 더 많았다.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느라 굶은 채 꼬박 하루를 보내고, 밤새 어깨를 빌려주고, 돌아오는 길에는 업어 주기까지 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에우로스는 문득 진한 회의감에 휩싸였다.

한마디 한마디에 낯선 감정들이 고름 터지듯 툭툭 불거져 나와 정신을 얼룩지게 했다. 문제는, 이런 자신이 정말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애써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자꾸 꺼져 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왜 좋아했다는 거야?”

무심해 보이던 에우로스가 작게 기울인 관심에 하르모니아가 반색했다. 그러면 그렇지, 부인의 첫사랑에 아무 관심 없을 리가 없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리던 최고의 사랑꾼이 아니던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마음을 울렸다나? 그건 좀 남다른 취향 같기는 해. 어린애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하르모니아의 대답을 듣자 에우로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정말 특이한 아이였던 것 같다. 보통은 좋은 점을 두고 호감을 느끼지 않던가? 예를 들면 자신을 감싸던 프시케의 향기와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오빠를 보면 그 남자애 생각이 난다고 하더라. 못생기고 성격 이상한 게 닮아서 그런가 봐.”

어떤 남자에 대해 가장 심하게 혹평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의 여자 형제일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렇다. 그 대단한 위용의 데본셔 공작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데뷔탕트 때 하고 있던 머리 장식도 첫사랑이 준 거라서 한 거래. 그땐 첫사랑이라고 말해 주지 않더니. 정말 깜찍하지 뭐야.”

때마침 프시케가 돌아오다가 하르모니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시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언제고 이 말이 나올 줄은 알았지만, 그게 지금이라니. 그녀의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프시케, 우리는 잠시 얘기를 좀 할까요?”

에우로스가 손을 내밀었다. 프시케는 왼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 * *

“못생기고 성격도 좋지 않은 나를 좋아해 주어서 고마워요.”

카듀 강변에 쌓인 검은 바위 위에 프시케를 올려 준 에우로스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원망이었다.

아, 이런 것도 익숙지 않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얼간이와 다를 바 없다. 그러는 와중에도 회의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아, 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

프시케가 다급하게 그의 입을 막았다.

“하르모니아가 오해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외모나 성격을 묻길래 제대로 답해 주지 않았더니…….”

“왜, 죠?”

에우로스가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물었다. 내가 부끄러워서? 회의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래서야 여섯 살의 몸을 한 열 살 아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그때 그 모습은 저만 간직하고 싶어서요. 아무에게도 말해 주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이거든요. 이건 클라리사도 몰라요.”

“…….”

그 말 한마디에 에우로스의 모든 불안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전전긍긍하던 어린아이도 자취를 감추었다.

때로는 한 문장이 수백 수천 가지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몰아낼 때가 있다. 에우로스는 사무엘이 읊어 대는 근질근질한 연극 대사들이 어째서 그리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를 그제야 이해했다.

어떤 생물들은 여러 번 탈피를 거쳐 성체가 된다. 에우로스도 그랬다.

그는 지금껏 수회 그런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해 왔다. 프시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처음 인정했던 날, 프시케를 처음 안았던 날, 프시케를 되찾았던 날.

그리고 이제 그는 마지막 허물을 벗고 완전한 어른이 되었다. 이 카듀 강에서, 예상치 못한 아내의 고백으로 인해.

“장차 프시케 스튜어트의 남편이 되실 분.”

유치하기 짝이 없던 사무엘의 말이 에우로스의 귓가에 우우웅- 울려들었다. 마녀들에게서 예언을 들은 맥베스도 그렇게 제 운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서럽게 우는 내가 좋았다면서요.”

황야의 외침을 받아들여 프시케 스튜어트의 남편이 된 자에게는 할 일이 있다.

“나는 예쁘게 우는 그대가 좋아요.”

그러므로 마땅히 남편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카듀의 검은 바위로 별을 떨어트리는 밤하늘 빛이 예쁘게 우는 아내의 얼굴을 잘 비추도록, 커튼은 활짝 열어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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