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33)화 (133/146)

133. 불꽃놀이

“리처드, 제발.”

언제나 우아하게 군림하던 여동생의 몰락을 지켜보는 스펜서 소백작의 눈썹이 안쓰러움으로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이 헝클어진 프레이아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늘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그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지는 피눈물처럼 마구 흘러내려 있었다.

그가 다가가 주저앉은 프레이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처참하게 망가진 손톱이 끼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었다. 프레이아는 오빠의 품에 안겨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도와줄 수 없어 유감이구나, 프레이아.”

그러나 리처드 스펜서로서도 별도리가 없었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추락은 그녀의 남편인 고든레녹스 총리의 스캔들로 인한 것이었다. 총리의 스캔들은 잉그린트 역사상 가장 추잡하고 더러운 것이었으므로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최근 리던 사교계는 말 그대로 격랑에 몸을 내맡긴 나뭇잎 배와 같았다. 1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엄청난 일들이 폭탄처럼 터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을 제외한 호사가들에게 그 사건들은 폭탄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계속 구경하고 싶고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유희거리.

그 유희거리를 제공한 당사자가 데본셔 공작가였다. 사교 시즌의 마지막 불꽃놀이를 담당하는 데본셔 가문답게 화끈하고 큼지막한 일들을 뻥뻥 터트렸던 것이다.

그중 가장 화려하고 큰 폭죽을 꼽자면,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고발한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 총리의 소아 성애 이력과 인신매매 관여 정황일 것이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매주 드나드는 햄스테드 저택에 그의 정부가 산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귀족 남성이 정부를 두는 것도 그리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총리의 정부로 알려진 여자가 사실은 그에게 어린 남자아이들을 공급하는 포주였다는 것, 총리가 그 아이들을 입에 담지 못할 방식으로 괴롭혀 왔으며, 심지어는 그들 중 가장 어린아이가 고작 네 살이었다는 것은 비난을 넘어 성토당해 마땅했다.

더해서, 잉그린트인 아이들뿐만 아니라 인더스인 아이들을 공급받기 위해 악명 높은 인신매매 조직인 ‘데스스토커’에 돈을 댄 정황이 밝혀지자 평민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총리의 사적인 변태 성향을 두고 키들거릴 때, 평민들은 총리의 범죄 가담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한 범죄는 대부분 평민들이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든레녹스 총리는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들고 있는 게 너무 많았다. 황금화살 클럽을 통해 얻은 정보와 인더스 총독으로부터 받은 서류, 웃달라 태수가 전한 현지 조사 결과만 해도 차고 넘쳤다.

제시한 증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에우로스의 집념이었다. 닐이 죽고, 사무엘이 감옥에 갇혔던 날,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했던 각성이야말로 고든레녹스 총리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총리는 무능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총리의 자리에 오를 만큼의 뛰어난 감이 있었다. 그가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경계했던 감은 옳았지만, 에우로스를 미처 제거하지 못한 것은 무능의 소치였다. 차라리 그 감마저 없었던 편이 총리의 안위에는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사교계의 여왕은 사교계 사람들의 지지를 옥좌로 삼는다. 또한 그들의 선망과 경애가 여왕의 양손에 들린 보주와 홀의 재료가 된다.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변덕스러운 사교계는 그녀가 들고 있던 보주와 홀을 빼앗고 옥좌를 부수었다. 그로 인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오랫동안 누려 왔던 영예와 영광은 갈가리 조각나 흩어졌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자신이 사교계의 여왕이 아닌 순간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까지나 미의 여신, 사교계의 여왕, 신사들의 연인, 만인의 첫사랑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육신의 죽음만이 죽음은 아니다. 정신을 죽이는 것이, 명예를 난도질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죽음일 수도 있다. 적어도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에게는 그랬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프시케에게 약속한 대로 프레이아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대신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를 화형시킴으로써, 애초에 아내를 잃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였던 그녀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던 맹세를 지켜 냈다.

두 번째 폭죽은 하르모니아 캐번디시가 쏘아 올렸다. 프레이아의 결혼 이후 잉그린트 최고의 신붓감이었던 그녀는 자발적으로 외국 왕족과의 혼담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데본셔 공작은 격노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으므로, 제 딸의 시건방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공작은 당장 유언장을 수정해 하르모니아 앞으로 지정해 둔 지참금과 상속권을 모두 박탈했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던 값나가는 물건들도 전부 회수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작은 하르모니아가 제풀에 지쳐 곧 굴복해 올 것으로 믿었다. 그래 봐야 딸이라는 존재들은 아비나 오라비 없이는 제 몸 하나 건사 못할 온실 속 화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하르모니아 캐번디시는 이미 그 온실 밖으로 내던져져 본 적 있는 여자였다. 제 능력으로 소설을 써서 성공한 작가이기도 했다.

데본셔 가문의 보석은 사치스러운 벨벳 케이스에서 몸을 일으켜 스스로 자갈밭으로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다.

데본셔 공작이 기함할 일은 하나 더 있었다. 그게 마지막 폭죽이었다.

공작에게서 쫓겨나 채스웍 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하르모니아가 스태포드 남작가의 삼남과 곧 결혼할 것이라는 가당찮은 소문이 들려온 것이다.

파혼보다 그게 더 충격이었다. 에우로스의 수족에 불과한 인간과 결혼이라니.

그래서 공작은 자신의 장자이자, 이제는 후계자가 된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채스웍 하우스에서 불러올렸다.

“당장 하르모니아를 리던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해라.”

공작의 물음에 에우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뭐?”

에우로스의 순순하지 않은 태도가 이렇게까지 거슬린 적은 없었다. 공작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마구잡이로 구겨 내던졌다.

“하르모니아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지참금은 제가 마련하겠습니다. 사무엘 스태포드도 그 아이를 건사할 만한 능력은 있는 자입니다.”

“그런 개소리를 한다면 너를 데본셔 가문에서 제명하겠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거야말로 에우로스가 가장 겁내지 않을 만한 협박이었다. 앤 여왕은 죽었고, 이제 더 이상 캐번디시가 아니어도 그는 상관없었다.

“너…….”

주먹 쥔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파문하셔도 어쩔 수 없지요. 그 처분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공작님.”

그러나 고개를 까닥한 에우로스가 서재를 나가 사라질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영영 데본셔 공작은 에우로스에 대한 파문을 선언하지 못했다. 자기 핏줄이 아닌 후계자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드넓고 웅장하며 리던에서 가장 호화로운 데본셔 공작저에는, 그리하여 아레스 캐번디시 데본셔 공작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영지에서 꼼짝하지 않는 공작부인과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데이모스, 그의 뜻을 어긴 에우로스와 하르모니아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은 독사의 이빨에 물리는 것보다 더 아픈 일이다.

1)

데본셔 공작은 자신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세 자식을 원망하며, 독사의 아가리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공작을 독사의 아가리에서 꺼내 준 사람은 뜻밖에도 프시케 캐번디시였다. 에우로스는 아내에게만 한없이 약한 사람이었으므로, 공작저 방문을 권유한 프시케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리던의 공작저를 찾은 에우로스에게 공작이 물었다.

“행복하냐?”

에우로스가 프시케와 결혼하고 돌아와 입적을 요구했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때의 에우로스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에우로스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대답했다.

그리고 공작은 대답하지 않은 대답에서 대답을 찾았다. 아들의 표정이 곧 대답이었으니까.

“다음에는 아이도 데려오너라.”

그 후, 데본셔 공작은 그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언제나 여왕 위에 있었던 공작은, 새파란 눈동자에 볼이 포동포동한 아이의 앞에 기꺼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삶에서 쓸모를 따지지 않고 마음을 준 사람은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아이가 유일했다. 아직은 미래의 일이다.

한편,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하르모니아의 지참금을 통 크게 내놓았다. 어쩌면 데본셔 공작이 태번의 왕자 앞으로 책정한 지참금보다 더 큰 액수일지도 몰랐다.

“정말이야?”

그들 부부가 제시한 지참금 규모를 들은 사무엘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은 뒤,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하르모니아가 지참금을 한 푼도 가져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왕족의 부인이 되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웬만한 귀부인처럼은 살 수 있도록 할 거야. 메이페어에 쓸 만한 저택도 구입했고, 하르모니아를 위한 방도 마련해 두었다고.”

“그래서 거절할 거야? 그래도 되고.”

에우로스가 빙긋 웃었다. 그러자 사무엘은 어깨를 잠시 으쓱했다가 냉큼 대답했다.

“결혼 선물이라면 감사히 받지.”

에우로스 옆에서 벌써 10년이다.

학교 근처에 사는 참새도 초급 입문서 정도는 짹짹거리며 노래한다. 즉, 사무엘도 이제 제법 나쁘지 않은 사업가라는 말이다. 굴러 들어온 금덩어리를 허세 부리다가 놓치는 건 유능한 사업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무엘은 카듀 강의 금광 개발 수익에 대한 계약서에 신나게 서명했다. 원래의 계약서에 쓰여 있던 배분 비율에 빗금이 좍좍 그어졌다. 수정하여 서명이 끝난 계약서에 명시된 사무엘과 하르모니아의 몫은 자그마치 5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갤러웨이 영지의 버려진 땅에서 오랜 세월 숨어 반짝이던 카듀 강은 에우로스의 진두지휘하에 개발이 시작되었다.

프시케는 아동들의 광산 노동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대신 아이들의 부모에게 일자리를 주고 합당한 보수를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카듀’는 스코틀린 고대어로 ‘검은 바위’라는 뜻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검은색은 불길하다고 여겨지지만, 에우로스 캐번디시에게만큼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행운의 색깔이었다.

그를 브라이튼 최대 부호로 만들어 준 카듀의 금광은 검은 밤하늘 아래 까맣고 영롱한 눈동자의 소녀가 가리킨 선물이었으므로.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1막 4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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