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완벽한 희극의 시작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프시케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물었다.
호기심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그녀는 늘 이런 표정이다. 새카만 밤하늘에 가득 들어찬 별빛이 반짝이듯 두 눈을 빛내며 궁금했던 걸 쉴 새 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얼굴.
“글쎄요.”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주위에 화사하게 핀 장미들을 둘러보았다.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잉그린트의 초여름, 데본셔 공작저의 정원이 우아한 색으로 물드는 시간 속에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잘 읽히는 책과 같은 사람이니까요. 에우로스가 덧붙였다.
어느 시점인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느껴졌다.
사무엘은 자신과 달리 무언가를 능숙하게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으로서는 별로 좋지 않은 점이지만, 친구로서는, 혹은 연인으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리던 사교계의 소위 고상한 자들은 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그것이 귀족으로서 올바른 자질이라고 믿었다.
귀족의 자질 따위에는 관심 없었지만 사교계 속물들을 적당히 상대해야 할 필요는 있었기에 에우로스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을 얻는 것.
그러나 사무엘 스태포드에게는 그런 교활함이 없었다. 단순해서 간혹 실수를 하지만 그 단순함으로 실수를 무마하는 적도 많았다.
음울한 구석이라곤 없는 그 마음을 드러내고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사무엘과 에우로스의 차이였다.
“사무엘이 청혼할 것도 예상했나요?”
프시케가 물었다. 에우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언젠가 어쩌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만일 사무엘의 청혼 여부를 두고 내기를 해야 한다면 에우로스는 ‘하지 않는다’에 돈을 두 배쯤 더 걸었을 것이다. 사무엘 스태포드는 신분을 중요시하는 귀족이니까.
사무엘은 호탕한 성격과는 별개로 고지식한 인간이었다. 귀족과 귀족 아닌 자를 구별하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고, 잉그린트인과 잉그린트인이 아닌 자를 구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건 잉그린트인이자 남자이고 귀족인 사람들이 대부분 갖는 우월의식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치관이 그르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사생아인 에우로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스코틀린 출신의 프시케 스튜어트를 안쓰럽게 여겼으며, 하녀인 클라리사를 허물없이 대하고, 인더스인인 닐을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게 사무엘 스태포드의 특별한 점이었다. 또한 그로 인해 오늘의 청혼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몇 번 정도 힌트를 준 적은 있었다. 하르모니아와 사무엘, 두 사람 모두에게.
하르모니아의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 레이프의 존재를 일깨워 준 것도, 사무엘의 잠잠한 항해에 고속 스크루를 달아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랑의 신도 화살만 쏠 뿐, 남녀를 데려다가 직접적인 매작은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행동은 사랑의 당사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하르모니아가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세요?”
프시케가 에우로스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프시케가 먼저 손을 잡는 것은 둘 사이에 일어난 변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에우로스는 그럴 때마다 시큼한 오물 위를 포근하게 덮어 준 여자애의 향기로 뒤덮였다.
“그럴 겁니다.”
하르모니아에게 지위나 재산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예전에 피아노 반주자 하나 때문에 마음을 끓이는 일도 없었겠지. 그러므로 사무엘의 마음을 지위와 재산으로 재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하르모니아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 생각도 있다고 말했었다.
태번의 왕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지지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대해서는 프시케 역시 만류해 볼 생각이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인더스에서 신분을 숨기고 가정교사로 살아간 적이 있었다. 경제활동을 하는 미혼 여성이 겪어야 하는 수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져서 의회에 입김을 불어넣는 세상이 되지 않는 이상, 브라이튼 섬에 사는 여자들의 인생은 언제나 비슷할 것이었다.
“아직도 둘이 응접실에 있잖아요, 프시케.”
아! 에우로스의 대답에 프시케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하르모니아와 사무엘 중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엘이 실의에 빠져 비틀거리며 나왔거나, 하르모니아가 질색하며 뛰쳐나왔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 그러네요!”
프시케가 웃었다. 옅게, 희미하게, 살풋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밝고 스스럼없는, 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을 본 에우로스의 푸른 눈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환하게, 아름답게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이 깃든 나직하고 고요한 웃음이었다.
에우로스는 아주 예전, 프레이아 스펜서와 이곳에 서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숨이 더워질 정도로 햇살이 내리쬐고, 장미 향기는 거북했으며, 붕붕 나는 벌들은 거슬렸다. 열망을 품은 보랏빛 눈동자의 소녀도, 나무 뒤에서 숨죽인 데이모스의 존재도 짜증 나기 그지없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성의 없이 분지르다시피 한 장미 줄기에는 가시가 유난히 많았다. 손질하지 않은 장미를 받아 본 적 없던 프레이아 스펜서는, 제 손에 쥐어진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당연했던 미래에 최초로 불확실성이라는 변수가 끼어든 날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겼을 때부터 그의 삶도 나무 뒤 어두운 풀숲 공기처럼 음침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할 때다.
“에우로스, 뭐 하는 거예요?”
여전히 햇살은 눈부시고, 장미 향기는 흐드러져 번지고, 벌들의 날갯짓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원에는 가시에 손을 찔린 프레이아도,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데이모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에우로스는 아주 신중하게, 탐스럽고 흠 없는 장미를 찾아내 줄기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꺾었다. 그러고는 주렁주렁 매달린 잎사귀들을 훑어 내고, 따가운 가시를 하나하나 떼어 냈다.
악역들이 모두 퇴장한 무대 위에 고난과 역경을 견뎌 낸 주인공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섰다. 이 장편 연극의 남자 주인공, 에우로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갤러웨이 성에서 그대가 내게 약속했던 것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목소리가 프시케의 귓바퀴를 돌아 내려가 심장을 간지럽혔다.
장미가 만발한 정원에 단둘이 서 있는 남녀, 그리고 꽃을 든 남자. 이건, 그러니까…….
“소원 두 개를 들어주기로 했던 것 말입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와의 결혼은 여왕의 명령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감히 거역할 수도, 거역해서도 안 되는 권위에 짓눌려 프시케와 데이모스는 내키지 않는 혼사를 받아들였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와의 결혼은 조금 더 복잡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 너그럽지 않았다. 상황에 휘말려 다급한 결혼을 한 그들은 불안정했다.
프시케의 결혼은 서로의 마음이 서서히 오가고, 그 마음을 확인하는 절차는 배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감상은 불필요한 사치였다. 무릇 갤러웨이 성의 유령은 그래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프시케는 안다. 감상이 전부일 때도 있다. 낭만이 최고조에 이른 바로 지금처럼.
“아직 소원 하나가 남아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우로스는 동의를 구하듯 프시케를 내려다보았다. 프시케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더니 이내 열렸다.
“기억해요.”
그 대답에 에우로스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남아 있는 소원을 쓸 때가 된 것 같군요.”
프시케는 에우로스와 결혼 후 채스웍 하우스의 침실에서 했던 대화를 기억했다. 에우로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었고, 프시케는 그건 소원으로 치지 않겠다고 했었다. 조금은 더 특별하고, 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으니까.
에우로스는 프시케와 갤러웨이 성의 응접실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소원 두 개가 결정되어 있었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떠보고자 소풍을 가는 것, 그리고 카듀 강의 금광 개발을 허락해 줄 것.
부끄럽게도 다분히 속물적인 의도가 깃든 제안이었다. 다행스럽게 두 번째 소원은 보류되었다. 이제는 조금 더 특별하고, 더 마음을 움직이는 소원을 말하고 싶었다.
“이제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에우로스는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장미에 담아 두 번째 소원을 건넸다. 청혼보다 더 깊고, 더 무거운 부탁이었다. 좀처럼 낯부끄러운 말을 하지 못하는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최선이기도 했다.
완벽하게 곧고 아름다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받아 든 프시케가 웃었다. 그 소원은 바로 자신의 소원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특별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소원이었다.
“그럴게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번에 새로 막을 올릴 연극은 악역도, 갈등도, 비탄도 없는 완벽한 희극이었다. 에우로스와 프시케가 함께 창작할 대본에는 대화가 아주 많고, 풍부한 지문이 있고, 귀여운 아역들도 등장할 것이다.
햇빛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의 고개도 따라 기울었다. 포개진 입술 사이로 장미 향기가 오가고, 붕붕 나는 벌들이 꽃잎 속을 드나들었다. 따스하고 달콤한 희극, 1막 1장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