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청혼
“왜, 왜 이러는 거야?”
하르모니아가 답지 않게 허둥거렸다.
환영의 시간이 청혼의 시간으로 변질되는 데 걸린 시간은 수 초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청혼의 순간을 인지하는 것에는 수 분이 걸렸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지내 온 사무엘 스태포드가 무릎을 꿇고 제 앞에 앉은 모습을 받아들이는 건, 어쩌면 수 시간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까지 이 말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사무엘의 시선이 흔들리다 내리깔렸다. 호기롭게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남자치고는 다소 소심한 언행이었다. 하르모니아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너는 데본셔 공작가의 귀한 딸이고, 나는 고작 남작가의 삼남이니까.”
태생이 그들을 갈랐다. 그 출발선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도 남았다. 신분이라는 것은 원래 그러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모든 조건이 딱딱 맞아떨어진, 이제는 소공작이 된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 저항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서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남작가의 장자라 해도, 너에게 청혼할 수는 없었겠지.”
스태포드 남작가는 데본셔 공작가의 가신이었다. 그것은 공작가를 향한 남작가의 대를 이은 충성을 의미했다. 충성하는 대상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는 것은 곧 배신이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라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남작가의 영애가 공작가의 영식과 이루어지는 일은 간혹 일어나기도 했다.
그것도 아주 가끔이었다. 공작가의 영식에게 어떤 문제, 곧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경우였다. 문제가 없다면 수준에 맞는 대단한 집안과 이어지는 게 당연했다.
“인더스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때도 너를 욕심낼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지.”
에우로스가 블랙홀에 갇혔고, 잉그린트 자치령이 함락되었으며, 전투도 두 번이나 겪었다.
데이모스는 실종되었고, -아니, 사실은 죽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 그건 함구하기로 했다- 실종되었던 프시케 캐번디시는 다시 돌아왔다.
겨우 반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사무엘 스태포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야, 하르모니아. 스스로 그어 놓은 선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야.”
능력 밖이라고 생각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빨리 포기했다. 그래야 하는 거라고 배웠다. 남작가의 삼남은 그래야 하는 사람이었다.
장자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 현실에 만족하는 것. 그것이 삼남의 미덕이었다.
큰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태포드 남작가의 분위기는 늘 평온하고 즐거웠다. 서로의 한계를 금처럼 그어 구획을 지어 놓고 다른 구획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평화 상태를 존속하게 했다.
“그런데, 한 번쯤은 욕심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아니, 그 욕심을 표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지금 생각해도 사무엘은 자신이 왜 닐의 죽음에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때였고, 그 와중에 에우로스의 아픈 상처를 직접 목도하게 되었으며, 그와 같은 상처를 가진 어린아이에게 이입했고…….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떠밀려 선을 넘었다. 선을 넘는 것은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고, 절대로 넘봐서는 안 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 어찌 보면 지레 겁먹은 까닭이었다.
한편으로는 늘 한계를 넘어 성취하는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자신은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타고난 신분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바꿀 수는 없어.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을 거야.”
그랬다.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있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보좌관이자 연대보증인인 그는 상속으로 받을 수 있는 재산의 수십 배를 이미 일군 상태였다.
물론 데본셔 공작가의 재산이나 에우로스의 재산에는 비할 수 없는 규모의 자산이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사무엘의 노력과 운으로 바꾼 현재와 미래였다.
아마도 그가 끝까지 사생아와 친구 하지 않겠다고 버텼거나, 에우로스의 능력을 불신했더라면 사무엘은 여태껏 빈털터리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꾸고자 하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의 감정이 아니니까.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함께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까.
하르모니아에게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강요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여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지금 내 마음을 하르모니아가 받아 주고, 하르모니아가 그 마음의 아주 일부라도 돌려줄 의사가 있다면.
“나는 아직도 겁쟁이고, 지금도 잔뜩 떨고 있지만.”
사무엘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꼼지락거리고 있는 하르모니아의 손가락 끝에 조심스레 대었다.
하르모니아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 손을 내치지 않았다. 단지 얼굴을 붉혔을 뿐이었다.
“그래도 바꿔 보려는 노력을 하려고 해.”
하르모니아의 손가락에 살짝 걸쳐져 있던 손이 위치를 바꾸었다. 사무엘의 크고 남자다운 손이 작고 통통한 하르모니아의 손등 위를 꼭 감싸 왔다.
순간 찌릿한 전율이 하르모니아를 관통했다. 원래 사무엘이 이랬던가? 이렇게 진지하고 남자다웠던가?
사무엘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좋은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웃게 되었다.
시무룩해져 있을 때마저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르모니아는 힘을 냈다. 그렇지만 그건 친구로서, 오래 알아 온 지인으로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그는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에우로스의 옆을 사무엘은 한결같이 지켰다.
그런 사무엘을 두고 비꼬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능력도 없는 사무엘 스태포드가 사생아에게 굽실거려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산다는, 질 낮은 말이 늘 그의 뒤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사무엘은 태연자약했다. 그건 굉장히 큰 장점이었다.
사실, 하르모니아가 보기에는 에우로스가 사무엘에게 얻는 것이 더 많았다. 사무엘처럼 괜찮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에우로스와 어울려 주겠는가.
“하르모니아, 나는 네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걸 원치 않아.”
하르모니아에게 결혼이 현실이었다면, 사무엘에게 결혼은 꿈이었다.
하르모니아의 결혼은 계약 사항이 빼곡한 사업이었다. 어떤 식으로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며, 장차 어떤 이득을 더 얻을 수 있을까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후계자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녀에게 자녀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만드는 결실이 아니라,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이 그런 자녀 중 하나였듯이.
사무엘은 그런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비록 에우로스와 남색이니 뭐니 소문이 도는 바람에 아무에게나 청혼한 부끄러운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만일 그때 그 청혼이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그는 제가 꿈꾸던 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정답고 안락한 가정에 찾아오는 천사 같은 존재들도 사무엘은 기꺼이 반기고 맞을 사람이었다. 작고 하얀 강아지가 있으면 더 좋고.
“그래서 네가 그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내린 선택을 지지해.”
반드시 자신과 결혼하지 않아도, 카드모스 왕자와 결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무엘은 이제 간절히 그걸 바랐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꼭 저와 맺어질 필요는 없지만, 하르모니아는 좋은 사람과 결혼할 자격이 있는 좋은 아이니까.
어미를 잃은 강아지를 돌보고, 천대받는 에우로스를 가족으로 대하고, 신분이 낮은 저를 동등하게 여기고, 프시케를 대신해 데이모스를 책망할 줄 아는 착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
“네가 그 결혼을 파기하고, 그래서 평생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 선택도 존중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청혼할 마음을 먹게 되었지만.
사무엘 또한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이 어떤 손가락질을 받는지 모르지 않았다. 특히 하르모니아를 향한 손가락질은 유난히 더 뾰족할 거란 사실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르모니아의 결심이라면, 사무엘은 그마저도 응원할 것이다. 에우로스와 함께 그녀를 지켜보며, 그녀의 홀로서기를 도울 것이다.
“나는 너에 비해 신분도 낮고, 이어받을 작위도 영지도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야.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내도 아니지. 게다가 꽉 막힌 구석도 있고.”
사무엘은 한때 ‘말괄량이 길들이기’ 속 여주인공과 같이 결국에는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연극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셰익스피어는 여주인공 캐서린이 아닌 남주인공 페트루치오를 비판하기 위해 그 대본을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압적인 행동이 불러온 순종은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 그래서 캐서린의 대사에는 수많은 트릭이 있다.
하르모니아는 주체적이고 똑 부러지는 여자다. 그녀를 길들이고 싶지 않다. 사무엘 스태포드는 말괄량이 그 자체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말이야,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사무엘이 눈을 꽉 감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이 흐려지고 있다. 그리고 잘금잘금 밟아 뭉개 놓은 선을, 사무엘은 훌쩍 뛰어넘었다.
“내가 너의 레이프가 되어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