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승리
게릴라전에는 협조 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게릴라 군을 지원해 줄 기타 병력이나 일반인들 말이다.
불행하게도 인더스에는 클라이브 중령의 부대에 협조해 줄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잉그린트군이 첫 전투에서 뼈아프게 패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블랙홀 사건 때 죽어 나간 잉그린트 사람들이 하도 많다 보니, 자치령이 함락되었을 때 다소 서두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로 인해 뒤를 받쳐 줄 지원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습격을 감행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그리하여 클라이브 중령은, 시간을 두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인더스와 가까운 다른 국가들에 주둔해 있던 잉그린트 병력이 함대에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비밀리에 칼카트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바야흐로 협조 세력의 등장이었다.
아들 두 명을 전부 인더스로 보내고, 그중 적자이자 후계자인 데이모스가 실종 상태라는 것을 안 데본셔 공작이 보낸 귀중한 지원 병력이었다. 어찌나 난리를 피웠던지 의회장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가 황금화살 클럽을 화끈하게 데우기도 했다.
공작과 늘 대립각을 세우던 고든레녹스 총리도 이번만큼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인더스 파병군의 부사령관으로 지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아무리 데이모스가 단독으로 배를 빠져나갔다고는 하나, 소공작을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는 비난까지는 면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늘어지면서 잉그린트 자치령 내에 머물고 있던 인더스 군인들의 감시도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클라이브 중령이 보낸 전령이 성공적으로 영내에 잠입해 총독과 에우로스를 만났다.
인더스의 태수는 총독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에우로스 캐번디시라는 이름에는 흥미를 보였다. 그의 이복동생이 현재까지 실종 상태인 데다가, 그 자신도 블랙홀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고, 그의 신분은 잉그린트 왕에 맞먹는 데본셔 공작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웃달라 태수가 에우로스 캐번디시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총독의 서신 때문이었다. 에우로스가 인신매매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노력하고자 하며, 이를 논의하기 위해 언젠가는 태수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곡히 희망한다는, 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인더스 군대가 자치령을 점령한 이후, 태수는 꽤 여러 번 그곳을 방문했다. 그의 방문에는 일정한 주기가 없었다. 만일에 발생할 피습을 고려해 그는 늘 예고하지 않고 자치령에 들러, 표면적으로는 시찰하는 시간을, 실제로는 뿌듯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달랐다. 만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직접 알현해 보기로 한 태수는, 처음으로 총독에게 방문 일시를 사전에 고지해 두었다.
태수는 완벽하게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자치령의 총독 관저에 들어섰다. 그리고 근사한 외모의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인형처럼 생긴 그의 아내와 함께 관저의 식당에서 만찬을 즐겼다.
새해 파티에서 태수에게 수치심과 노여움을 안겨 주었던 총독의 아내는, 이번에야말로 웃달라 태수를 진정한 왕처럼 대접했다. 조지 왕이 왔어도 이보다 더 극진할 수는 없을 터였다.
웃달라 태수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유창한 잉그린트어를 사용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제법 말이 통하는 자였고, 총독은 전에 없이 굽신거렸다. 예전과 달리 상석에 앉아 마시는 차는 제법 맛이 좋았다.
그들이 식사를 즐기는 동안 네메시스호에서 내린 잉그린트 군대가 자치령을 조용히 둘러쌌다. 자치령을 점령했을 당시 인더스군에게 있었던 열띤 기세는 이미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슬렁슬렁 돌아다니던 경비병들과 카드 게임에 빠져 있던 인더스 군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기습에 허물어졌다. 잉그린트 군의 은밀한 습격은 단시간 내에 성공리에 끝났다.
“쨍그랑!”
클라이브 중령이 보낸 군대가 자치령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소식을 귀엣말로 들은 총독이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것이 신호였다.
웃달라 태수는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채로 몸을 결박당했다. 태수를 경호하던 사람들이 미리 뒤에 세워 놓았던, 하인을 가장하고 있던 정예 요원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바로 직후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태수는 침착하게 화를 누르며 물었다. 총독은 심장이 쫄려 눈을 내리깔았지만,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태수의 타오르는 눈을 똑바로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전쟁은 곧 끝날 겁니다.”
태수가 붙들리고 자치령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더스 군대가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와 다시 자치령의 담장 밖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을 데본셔 공작이 보낸 잉그린트 군사들이 다시 둘러쌌다.
자치령 쪽에서는 클라이브 중령의 군사들이, 반대편에서는 지원 병력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중간에 갇힌 인더스 군은 쏟아지는 총알을 몸으로 막아 내며 버티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태수를 구하려던 시도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태수가 인질로 잡힌 지 딱 열두 시간이 지났을 때, 긴장이 감돌고 있는 총독 관저에 다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번에 그는 에우로스 캐번디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에우로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묶여 있는 웃달라 태수의 앞으로 걸어갔다. 태수의 눈은 붉게 충혈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에우로스의 말에 태수의 몸이 확 굳었다.
누가 이겼는지, 누가 졌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여유롭게 올라붙은 에우로스의 입꼬리가 모든 설명을 대신했다.
“유감입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린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그의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말없이 자리를 지키던 캐번디시 부인은 남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부부가 사라진 식당에는 총독이 뱉은 안도의 한숨과 태수가 내지른 분노만 남았다.
* * *
지휘관이, 우두머리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다. 그 존재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릴 수도, 부재만으로도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중령이 데이모스 캐번디시 대위의 블랙홀 출격을 저지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인더스 군은 현재 우두머리를 잃은 상태였다. 웃달라 태수가 잉그린트 자치령에서 생포된 까닭이었다. 태수는 칼카트 지역 군 통수권자이자 정치, 경제의 최고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칼카트 그 자체였다.
잉그린트 군의 사령관, 클라이브 중령은 승리 소식을 듣고서야 네메시스호에서 내렸다. 지휘관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자세였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웃달라 태수 옆에 앉은 통역관이 역력한 긴장을 다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태수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일단 사과를 바랍니다.”
“사과라니?”
클라이브 중령의 대답에 태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블랙홀에서 죽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칼카트 태수의 공식적인 사과 말입니다.”
태수가 코웃음 쳤다.
“그건 사고였소.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어쩌다 일어난 사고. 사고에 대해 태수가 사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
“그렇다면 태수의 부인들과 자녀들도 지하실에 몰아넣고 사고를 일으키면 되겠군요.”
클라이브 중령이 말했다. 통역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마치자, 태수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저, 그러지 마시고, 사령관. 그 일은 차차 생각하고 배상금과 각종 협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총독이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태수의 사과 따위, 치적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수에게 받아 낼 막대한 돈과 유리한 협약 내용은 장차 리던에서 총독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 줄 무기였다.
“사과를 먼저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차후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중령은 깐깐하게 굴었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자신이 존경하던 로버트 브루스 장군이 블랙홀에서 어이없이 사망한 데 대해 깊은 자책과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사령관님의 요구가 타당한 것 같은데요.”
그때,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환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전쟁이 끝난 이 시국에, 총독이 유일하게 절절매며 매달리는 이가 에우로스였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실종된 지 오래였다. 죽었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그로 인해 어쩌면 미래의 데본셔 공작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중령의 편을 들자 총독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보다 낭만적이군, 공자.”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듣자 하니 결혼도 뻑적지근하게 했다던데, 생각보다 물렁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깟 백 명 좀 넘는 사람들이 죽은 게 뭐 대수란 말인가. 이번 전투로 사망한 인더스군만 해도 수천 명인데.
“천만에요.”
에우로스가 그 비웃음에 대답하듯 서류 뭉치를 태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뭐지?”
태수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 클라이브 중령과 총독의 이목도 그 서류에 쏠렸지만, 에우로스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류를 훑어본 태수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서류는 잉그린트와의 협약을 어기고 태수와 갈리아 사이에 비밀리에 맺기로 한 무역 협정의 사본이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에우로스는 황금화살 클럽에서 보내온 그 문제의 서류가 태수의 손아귀에서 마구 구겨지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기만 했다. 태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협정의 내용이 알려진다면 잉그린트 정부에서는 이번에야말로 가만 있지 않을 터였다. 세계 최강이라는 해군력을 몽땅 동원해 쳐들어올지도 몰랐다.
자신들을 도와줄 갈리아는 아직 인더스 내에서의 힘이 미비했다. 그 상황에 최신식 무기를 동원한 잉그린트 해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는다면 그건 태수로서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니까, 저희 조건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에우로스의 음성은 낮고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장미꽃잎에 입을 맞추려다 보면, 속에 숨어 있던 벌에게 입술을 쏘이기 십상이다. 에우로스의 말을 들은 태수는 벌에 쏘여 입술이 마비된 사람처럼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이쪽에서도 조건이 있소.”
에우로스는 태수의 조건을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비공식적인 합의이긴 했지만.
협상은 종결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총독은 어안이 벙벙했고, 클라이브 중령은 더 알고 싶지 않은 얼굴로 흡족해했다. 태수는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에 서명하며 굴욕을 참아야 했다.
그들 사이의 협상이 끝날 때까지 잉그린트 정부에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의회에서 결정한 것이라고는 데본셔 공작이 난동을 부리다시피 해 지원군을 보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이 네메시스호 파병이 너무 빨랐다며 의아해했던 것도 당연했다.
인더스에서 일어난 블랙홀 사건과 칼카트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전투의 횟수는 두 번에 불과했고, 전투에 소요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으나, 사상자 수는 많았다. 그런 것이 로버트 브루스 장군이 말했던 드러나지 않은 패배였다.
장장 수개월을 끈 두 국가 간 대립은, 웃달라 태수가 블랙홀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매우 큰 액수의 위로금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잉그린트 자치령과 윌리엄 요새의 복구, 막대한 배상금의 지급, 배타적 독점 무역권의 유지 등을 약속하며 막을 내렸다.
그 가운데 에우로스가 약속한 것은 하나였다. 노예무역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 이것은 비공식적인 합의였으므로, 결국 에우로스가 배석한 그 협상에서 태수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되었다.
잉그린트 정부와 데본셔 공작이 매우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