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절망 속 희망
“오늘도 상당히 잘 지냈나 보군.”
에우로스의 냉소적인 말에 사무엘이 크게 웃었다.
그가 인더스 군인을 때리고 감옥으로 끌려온 지도 벌써 나흘이 지났다. 지금 그들은 면회실에 놓인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에우로스는 그간 매일 같은 시간에 사무엘을 찾아왔다.
“나야 어디서든 잘 지내지.”
사무엘의 얼굴은 초췌했지만, 어딘가 후련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에우로스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가슴 떨리게. 에우로스는 오늘도 잘나게 말쑥한 행색이다. 문득 사무엘은 완전히 버려서 다시는 입을 수 없게 된 상아색 새 옷을 떠올렸다.
“식사는 잘하고 있어?”
“에우로스.”
친구의 질문에 사무엘이 냉큼 대답했다.
“감옥에 갇혀서 좋은 게 뭔지 알아?”
“뭔데.”
“밥이 삼시세끼 나온다는 거야.”
“…….”
“아껴 먹을 필요도 없고, 좋아.”
“…….”
“식료품이 떨어져 가는데 눈치 없이 많이 먹는다고 클라리사에게 구박 들을 걱정 안 해도 되고.”
사무엘은 역시 사무엘이었다. 불평하면서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이고.
“다행이네.”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괴롭고 우울한 건 사무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절망이 끓는 지옥에서도 희망을 찾았다니 그건 좋은 일이었다.
“그나저나, 난 언제 풀려나?”
사무엘이 그들을 감시하는 인더스인 병사 쪽을 한 번 보고는 은근슬쩍 물었다.
그 병사는 잉그린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마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신들의 대화에 불건전한 내용이 있는지를 따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왜 나에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어? 친구가 캐번디시 가문의 장자인데, 날 내보내 줄 끗발은 있겠거니 하는 거지.”
에우로스는 낮게 신음했다. 정말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사무엘이 폭력을 쓴 것은 맞지만 마음먹고 변호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닐이 아무리 신분이 낮았어도, 캐번디시 부인이 아끼던 아이였음을 피력하면 충분히 그의 행동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이 전시라는 거였다. 신분이고 가문이고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자치령 내 분위기가 살벌한데, 그 와중에 폭력 사건을 일으켰으니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곧바로 총독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총독은 데이모스 캐번디시에 대한 원한 때문에 처음에는 바쁘다며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더비 백작부인 이후로 에우로스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에우로스는 꾸준히 총독 관저를 방문했다. 하루에 두 번, 많으면 네 번까지. 채스웍 하우스를 구입하려던 때도 이 정도 열성은 아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오후가 되어서야 관저의 문이 열렸다. 총독으로서는 그것도 많이 봐준 것이었다. 어쨌거나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데본셔 공작 가문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총독은 뻣뻣하게 물었다. 사근사근 비위를 맞추려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의 태도에 남은 것은 불만과 원망뿐이었다.
“총독 각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억지로 대접한 듯한 맛없는 차를 우아하게 마신 에우로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뭡니까?”
“사무엘 스태포드가 풀려나도록 힘써 주십시오.”
총독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전쟁 때문에 가뜩이나 불안해 미치겠는데, 거기에 웬 폭력 사태까지 일어나 인더스군 책임자가 정식으로 그에게 항의해 왔던 걸 생각하니 절로 신경질이 솔솔 난 까닭이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동행해 인더스에 왔던 사무엘 스태포드. 에우로스가 블랙홀에 들어가 있는 동안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행패를 부리던 자가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친구가 아주 똑같았다. 둘 다 감옥에 한 번씩 사이좋게 들어가고, 남은 자는 저를 찾아와 짜증 나게 만들고.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공자.”
총독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할 수 있든 없든 피곤해지는 건 질색이었다.
이미 네메시스호의 클라이브 중령과 태수 사이에서 골치 아픈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고, 게다가 전투에 한 번 패배한 전적이 있으니 너무나도 눈치가 보였다. 자치령 전체가 하나의 감옥인데, 감옥에 들어갔다고 유난 떨 일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힘써 주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시지 않습니까.”
에우로스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워 올렸다.
총독으로서는 처음 보는, 말로만 듣던 그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새파란 눈동자를 품은 눈매가 보기 좋게 둥글어지고 깨끗하게 붉은 입매가 살짝 올라가는, 누구나 홀릴 수밖에 없다던 바로 그 웃음.
총독은 약간 멍해져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무엘이 옆에 있었다면 ‘원하는 게 있는 웃음’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이 실수로 벌인 일인데요. 게다가 사무엘은 귀족 자제입니다. 각하께서 더욱 마음 써서 보호해 주셔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에우로스의 말에 총독은 갈등했다.
그래도 뭔가 딱 떨어지는 의지가 샘솟지 않았다. 그런 총독을 차분히 응시하던 에우로스는, 드디어 그가 원하던 말을 해 주었다.
“각하께서 이후에 리던 정계로 복귀하게 되시면,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 이거였다.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데본셔 가문에서 밀어준다면 잉그린트로 돌아가 자리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총독의 눈에 비로소 만족스러움이 깃들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에우로스가 더 환히 웃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들어주실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파악해 두셨던 인신매매와 노예무역 건에 관련한 자료를 넘겨주십시오.”
흡족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던 총독이 멈칫했다.
“그건 무엇 때문에 필요하신 겁니까?”
“이유는 묻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출처에 대해서는 반드시 함구하겠습니다.”
“…….”
“총독 각하에게는 피해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지요.”
총독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 자료가 필요한 건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그걸 활용해 뭔가를 꾸미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문서를 공개한다고 해서 불법 무역 자체가 근절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럼에도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면, 그리고 노예무역에 가담했던 인간들이 사라진다면. 그건 총독으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가장 타격을 입을 사람은 아마도…….
총독의 임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임기가 끝나기 전 전쟁으로 죽지만 않는다면, 그는 몇 년 후 리던으로 돌아가 약육강식의 정계에 몸담을 예정이었다.
그때 자신의 출세를 방해할 만한 인사들이 사라지고 데본셔 공작가의 지지를 얻게 되면 어쩌면 자신은 꿈꾸었던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총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금고를 열었다. 다이얼을 맞추는 손이 흥분으로 바들거렸다.
그는 속으로 데본셔와 캐번디시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역시, 절망이 끓는 지옥에도 희망은 있다.
두꺼운 서류 뭉치를 건넨 총독이 악수를 건넸다. 에우로스는 마주 화답하며 그 손을 잡고 다시 예쁜 웃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부탁이 또 있습니다.”
에우로스는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홀려 많은 것을 얻어 내는 사람이었다. 총독은 어쩐지 말려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면담에서 에우로스가 약속한 것은 미래의 하나였고, 총독이 행한 것은 현재의 세 개였다. 그리고 그 세 개 중 하나의 약속은 방금 지켜졌다.
“이제 나가자.”
에우로스가 말했다.
“뭐?”
사무엘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캐번디시의 끗발.”
그 말에 사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친구를 잘 두었어. 저 성격 이상자 옆에서 버티길 잘했어.
“집에 먹을 건 있는 거지?”
감옥을 나서며 사무엘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옥에서 주는 밥보다야 클라리사가 차려 주는 식사가 훨씬 낫지. 벌겋고 누리끼리한 향신료를 들이부어 재채기가 나오는 맛이긴 하지만, 오늘은 거리에 걸어 다니는 코끼리보다도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우로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총독에게 부탁한 세 번째는 식료품 배급에 대한 내용이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바라던 바대로였다.
* * *
인더스인들은 망자의 시신을 불에 태운다. 정화의 불길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켜 다음 생에 온전히 새로운 삶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죽음은 껍데기에서 벗어난 자유를 의미했다.
그래서 프시케는 닐의 장례도 그들의 방식을 따르고 싶었다. 아이의 순수한 영혼이 고단하기 짝이 없던 어린 몸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잘 들어설 수 있도록.
하지만 잉그린트 자치령에서 화장은 불가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그들이 사는 방갈로의 앞마당에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세례받지 않은 인더스인이었기에 성직자가 집전한 예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그리하여 프시케는 제 부모님의 장례식 때 들었던 기도문을 성직자 대신 낭독해 주었다. 활활 태워진 것처럼 재로, 땅에 묻힌 것처럼 먼지로.
인더스인 어머니와 잉그린트인 아버지를 둔 푸른 눈의 아이는 시신마저 어디에도 확실히 속하지 못했다. 그는 인더스에 소재한 잉그린트 자치령이라는 아주 모호한 땅에, 잉그린트식의 장례도, 인더스식의 장례도 아닌, 역시 모호한 방식으로 남은 자들과 작별했다.
그래도 그 아이의 죽음은 한 가지 지대한 의미를 남겼는데, 그건 잉그린트에도, 인더스에도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었다.
바로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각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