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신사도
닐이 의식을 놓은 그때, 에우로스와 사무엘은 영내를 뒤지는 중이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 닐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닐은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다. 목욕만큼은 혼자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그것만 빼면 아이는 다소 심할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닐은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 닐을 보며 클라리사는 웬만한 잉그린트 귀족 아이보다 더 의젓하다며 뿌듯해했다.
그랬기에 프시케는 닐이 보이지 않는다는 클라리사의 말을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닐이 없어요, 마님.”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지만요.”
프시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읽던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마당으로 난 창을 향해 눈을 돌렸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게 아닐까?”
아치볼드와 샤를로트가 잉그린트로 돌아간 뒤, 닐은 마당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줄지어 가는 개미들 앞에 홈을 파고 방향을 바꿔 놓는다거나, 빵 부스러기를 들고 나가 새들에게 던져 준다거나 하는 사소하고도 외로운 놀이를 하는 것을 즐겼다.
“앞마당 뒷마당 전부 다 찾아봤어요. 덩굴 안쪽까지 살폈는데 없네요.”
“옷장 안에도?”
“그 아이가 옷장에 숨는 일은 없어요. 아시잖아요.”
그건 클라리사의 말이 맞았다. 어두운 방 안에 갇혀 더러운 일을 당하던 과거 탓에 닐은 그 방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두려워했다. 코번트리 남매와 숨바꼭질을 할 때도 절대 옷장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프시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닐은 자치령 내에서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잉그린트인들 눈에 비친 닐은 미개한 인더스인의 피가 섞인 잡종 개에 불과했다.
코번트리 부인의 입을 통해 릴리 스노우가 본래 프시케 캐번디시이며, 데본셔 가문 사람이라는 사실이 파다해지기 전까지, 프시케는 닐을 당장 영외로 쫓아내라는 항의를 수시로 받아야 했다. 잉그린트인들이 사는 신성한 장소를 더럽힌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캐번디시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그래도 닐과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프시케는 인더스군이 자치령을 점령한 이후로는 닐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더욱 철저히 단속했다.
인더스 사람들에 대한 적의가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 시기였다. 닐이 잉그린트 사람들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정말로 방갈로를 벗어나지 않았다.
“찾아봐야겠어.”
프시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닐이 홀로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가 모욕적인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사무엘이 물었다. 그와 함께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에우로스도 함께 고개를 들었다.
“닐이 집 안에 없어요.”
클라리사의 말에 사무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놀러 갔나 보지.”
“아이구, 이 상황에 어딜 놀러 가겠어요. 집 밖을 나가면 좋지 않은 얘기나 잔뜩 들을 텐데.”
프시케는 닐이 갈 만한 곳을 곰곰이 떠올려 보다가 개켜 둔 얇은 숄을 집어 들었다.
“어디 가십니까, 부인?”
사무엘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닐을 찾아보려고요.”
태양이 먼 산 뒤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어두워질 것이고, 그 전에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야 할 것 같았다. 프시케의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가죠, 프시케.”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만류하며 일어났다. 셔츠 소매를 정돈하고 칼라를 매만지는 손길이 정확하고도 재빨랐다.
“일어나, 사무엘.”
“뭐?”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자네도 나가서 닐을 찾아야지. ‘뭉치면 힘이 생긴다.’라는 말도 있잖아.”
에우로스가 힘을 주어 뱉은 말에 클라리사가 눈을 찡그렸다. 일주일 넘게 ‘그림과 전쟁을…….’을 입에 달고 살던 사무엘을 두고 일부러 하는 말임을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당사자만 그걸 모르고 있었지만.
“무슨 노인네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사무엘은 속담을 인용하며 말하는 걸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하고 난리람. 사무엘은 부러 카우치에서 뭉그적거렸다.
“스태포드 남작가의 무려 삼남이자, 잉그린트의 귀족, 사무엘.”
에우로스가 재킷을 걸치고 가지런히 단추를 잠그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우로스가 블랙홀에서 살아 돌아온 날,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빛처럼 온 세상에 울리던 맑고 고운 소리였다.
“여자와 아이부터.”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웅장한 자긍심이 솟아올랐다. 귀족에게 신사도란 법보다 중요한 것이다.
위험에 처한 아이를 찾아야 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 밤중에 숙녀를 내보낼 수는 없다. 그것이 잉그린트의 신사도다.
게다가 밖에는 인더스 군인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 연약한 잉그린트 숙녀가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사무엘은 신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처럼 에우로스의 지고한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카우치를 뒤로 밀며 벌떡 일어났다.
“그대는 클라리사와 이곳에 있어요. 그사이에 닐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에우로스는 프시케에게 당부한 뒤 사무엘과 방갈로를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프시케는 싸늘해진 손끝을 문질렀다.
프시케는 독서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오스틴에서 출판된 심리학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는 행위에는 기저에 이유가 있고, 사람이 꾸는 꿈속에도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했다.
심리도 과학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그녀가 하기에는 매우 비합리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알지만, 프시케는 불안했다.
그 불안은 과학의 선을 넘은 예감의 영역이었다. 어떠한 근거도 뒷받침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예감이 그녀의 손끝을 싸하게 타고 들어왔다.
“괜찮겠지, 클라리사?”
“그럼요, 마님.”
언제나 그랬듯,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신빙성 없는 위안을 주고받으며 어둠을 참아 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집을 나선 에우로스와 사무엘은 각자 다른 구역을 둘러보기로 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사무엘은 자치령의 정문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정문 앞에는 닐로 보이는 아이는 없었지만, 대신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인더스 군인들이 있었다. 인더스어라 사무엘은 그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군인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한군데 모여 놀고 있다니. 군기가 한참 빠졌어.
잉그린트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다시 차올랐다. 사무엘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사무엘의 감이 벼락같이 번쩍하며 눈앞에 내리꽂혔다. 이런 종류의 감은 대부분 맞았다. 그래서 사무엘은 지체 없이 뒤를 돌았다.
군인들은 바닥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사람은 다름 아닌 사무엘이 찾고 있던 닐이었다.
사위가 어둑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무엘은 조심스레 닐의 가슴과 복부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는 의학 전공자가 아니었지만, 가느다란 양측 갈비뼈의 위치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촉진으로 알았다.
가끔 말에서 떨어진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렀을 수도 있었다.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걸 보면, 이미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무엘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자치령에 아는 의사라고는 알프레드 스노우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가 군인 신분이라 현재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군의관들은 다 그런 상태이고, 그 외 의사들은 영내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의사! 의사!”
사무엘은 군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숙덕거리더니 이내 사무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군인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잊은 채 팔을 휘저으며 청진하는 흉내를 냈다. 말은 달라도 몸짓은 통하는 법이니까.
“의-사-! 군-의-관-! 치-료-!”
그랬음에도 군인들은 계속 고개를 저었다.
잉그린트 군의관들을 내보내 줄 수 없다면 인더스 군의관이라도 불러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아이는 인더스 사람인데.
“도-움-! 도-와-줘-요!”
손짓 발짓을 동원해 요청하는 와중에도 아이의 숨결은 점점 약해져 갔다. 당장에라도 안아 들고 방갈로로 뛰고 싶었지만, 폐를 찔렸다면 함부로 아이를 옮기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들것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사무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군인들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사무엘은 에우로스를 찾아 달렸다. 간신히 에우로스를 발견해 함께 방갈로에 가서 담요 몇 장을 챙겨 오기까지 또 수십 분을 허비했다.
그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사무엘의 전신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프시케나 클라리사만큼 닐을 아꼈다거나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미혼 남성인 그가 열 살 남짓한 아이를 보며 그리 좋아할 일이 뭐 있겠는가.
그래도 가끔은 어눌한 발음으로 잉그린트어로 된 책을 읽고, 새파란 눈을 빛내며 웃고, 혼자 앉아 흙장난을 하는 모습에 눈이 가기는 했다. 등에 있는 낙인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목욕하겠다고 우기는 게 가엾기도 했다.
그 아이에게 에우로스를 대입했다. 계산적이고 속물적이며 툭하면 여자들을 울렸던 에우로스의 과거도 어쩌면 저렇게 쓸쓸했을까. 지극히 흠결 없는 처세가 몸에 밴 에우로스의 어린 날도 그리 외로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자신이 에우로스를 사람 만들었다 싶어서. 성격 좋은 나 자신 칭찬해. 또, 그런 의미에서 저 아이는 잘 자라 에우로스처럼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남몰래 응원도 했다.
그러니까, 닐은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서는 안 되는 아이라는 것이다.
사무엘과 에우로스가 닐이 누워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이미 아이의 심장은 뛰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자 사무엘의 무릎이 땅바닥으로 풀썩 내리박혔다.
사무엘은 떨리는 손으로 닐을 쓰다듬었다. 인더스인의 것도, 잉그린트인의 것도 아닌, 밀색의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움직였던 흉곽도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마침, 책임자로 보이는 인더스 군인 한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서툰 잉그린트어로 말했다. 이 아이는 치료받을 수 없는 신분이라고. 신분이 낮은 자들은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하!”
사무엘 스태포드는 호탕한 성격이지만 결코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자부심 넘치는 귀족은 주먹을 휘두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닐의 억울하고도 허망한 죽음을 목격한 순간, 사무엘을 지배하며 지탱하던 귀족 의식이 뚝 하고 끊어져 나갔다.
이후에, 누군가가 저에게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왜 인더스 군인의 얼굴을 갈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고 비난한다면, 사무엘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저, 귀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러고 싶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