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24)화 (124/146)

124. 은혜 갚은 물고기

닐은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원래부터 그랬느냐 하면, 그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제 성격이 어떤지 미처 알게 되기도 전에, 그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 환경에 내던져졌다.

매일 밤 돈을 벌러 나가는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닐은 눈치를 보았다. 자신을 경멸하며 발길질하는 동네 사람들을 피해 다니기 위해 눈치를 보았다.

제 등에 참혹한 문양을 새겼던 사람을 만났을 때도 눈치를 보았다. 또, 제 몸을 유린하던 인간들 앞에서도 눈치를 보았다.

눈치라는 것은 사실 좀 애매하다. 눈치를 보면 볼수록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세상을 보는 시야에 소실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단 한 부분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당한 눈치라면, 사방팔방에 맺힌 점들을 전부 보려 하다가 감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심하게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게 닐이었다.

닐은 영특한 아이이기도 했다.

프시케에게 거두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알프레드의 가르침하에 잉그린트어를 공부했다. 다행히 닐에게는 뛰어난 언어 습득력이 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던 재능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 닐은 수많은 잉그린트인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대화에 부적절하기 짝이 없는, 말하자면 음탕하고 저속한 것들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자신들이 입에 올리는 말의 뜻을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닐처럼 눈치를 보는 아이라면 금세 그들이 뱉는 단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대충 알아챌 수 있었다.

“세상에! 어디서 그런 망측한 말을 배웠니!”

닐이 실수로 제가 알던 잉그린트어를 입 밖에 내었을 때, 그의 입속으로 음식을 넣어 주던 클라리사는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짚으며 꽥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닐이 수줍어하며 ‘맛있다’라는 뜻으로 했던 말은…….

닐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사건으로 프시케는 아이와 에우로스의 등에 새겨진 그 전갈 문양의 낙인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프시케는 닐에게 잉그린트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잉그린트어에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훨씬 더 많고, 세상에는 좋은 일들이 더 많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닐은 잉그린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난생처음 주어진 교육의 기회에 감격했다. 인더스에서 교육이라는 것은 평범한 집 아이들도 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닐은 감사할 줄 아는 아이였다.

안락한 집과 따뜻한 음식, 공부, 그리고 끔찍한 소굴에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닐의 인생에 있어 최초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는 꼼짝없이 밧줄에 묶여 배를 타야 했을 것이다. 잘생긴 잉그린트의 크리슈나가 제 앞에 단검을 떨어트려 주고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또 크리슈나의 아름다운 아내 루크미니가 드레스 아래에 숨어 떨고 있던 저를 매몰차게 버리고 갔더라면 닐은 자신을 쫓던 인간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인더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류의 조상인 마누는 물속에서 아주 작은 물고기를 발견해 살려 주었다. 시간이 흐른 뒤 세상에는 큰 홍수가 일어났다. 작았던 물고기는 다 자란 모습으로 마누를 찾아와, 표류하던 마누의 배에 줄을 묶어 제 뿔에 걸고 히말라야산맥 꼭대기로 데려다준다.

신화 속 작은 물고기처럼, 닐은 저를 구해 준 에우로스와 프시케에게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으리라 다짐해 왔다.

은혜를 갚을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마누에게 홍수가 닥친 것처럼, 이곳에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닐은 눈치가 빠르고, 영특해서 잉그린트어를 배운지 몇 달 되지 않아 간단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의 눈치와 언어 재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클라리사가 프시케를 붙잡고 음식이 다 떨어졌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걸 알아들은 닐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선한 잉그린트인들의 배를 끌고 산 위로 인도해 줄 때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인더스인이고, 자치령 밖에서 잉그린트인들보다는 눈에 덜 띄는 사람이었으니까.

조금만 덜 눈치를 봤더라면 이 상황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닐의 시야에는 소실점이 너무 많았다. 우선순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점들을 다 살피다 보니, 그는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자치령을 빠져나가는 일은 쉬웠다. 닐은 몸집이 작은 아이였고, 자치령 곳곳에는 개들이 드나드는 통로들이 몇 있었다. 비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어 자치령을 벗어난 닐은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닐에게는 돈이 없었다. 미처 돈을 챙기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돈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닐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돈이라는 걸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던 아이는 프시케가 마련해 준 웃옷과 신발을 벗었다. 아치볼드 코번트리와 같은, 또래의 잉그린트 소년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 옷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식료품 몇 주일, 혹은 몇 달 치는 사고도 남을 액수인 건 확실했다.

당연히 식료품 가게 주인은 닐이 내민 잉그린트식 재킷과 셔츠, 구두를 기뻐 날뛰며 받았다. 그러고는 아이가 들고 가기에는 벅찰 정도로 많은 식료품을 내주었다. 고깃덩어리와 밀가루를 한 아름 받아 든 닐은 어서 자치령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닐이 막 시장통을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안녕.”

식료품 봉투를 들고 있었던 탓에 앞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닐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제가 도망치던 날, 뒤를 쫓던 놈의 음성이었다.

“역시 표시해 두길 잘했어. 이렇게 금방 눈에 띄잖아.”

남자의 말에 닐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동안 마음이 해이해져 제 몸에, 정확히는 제 등에 새겨진 흉측한 낙인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셔츠까지 벗어 건넸던 것이다.

칼카트 시장에서 전갈 무늬 낙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인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려다 인두로 표식을 남긴 뒤 끔찍한 짓을 시키는 일당들을 두려워했다.

신고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놈들 뒤를 돈 많은 잉그린트인들이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죄에 협조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길을 잃은 아이들을 멋대로 데려가 팔아먹기도 하고, 가난한 부모들을 꾀어 인신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그런 자들의 눈에 닐이 띄었던 게 분명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키도 좀 크고 살도 붙었네? 널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겠어.”

남자가 능청스레 말했다.

“그때 도망갔던 다른 새끼들은 다 다시 끌려왔어. 네가 칼로 줄을 끊고 풀어 줬다던데.”

그다음 말에 닐은 숨을 들이켰다.

결국 다 잡혔구나. 그 아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빤했다. 죽지 않을 만큼 맞은 뒤 다시 그 감옥 같은 곳에 집어넣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더 고되게 일해야 했겠지.

“이제 너만 돌아오면 돼. 그동안 잘 쉬었으니 이제 일해야지, 닐.”

남자가 한 발짝 다가왔다. 닐은 음식이 든 봉투를 꼭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네가 그렇게 날 물 먹일 줄은 몰랐다.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아?”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닐이 멍하니 그 손을 보는 동안 남자의 발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닐의 팔이 붙들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닐은 잡히지 않은 쪽 팔로 남자를 밀어내려 죽어라 애를 썼다. 그러나 애초에 성인 남성과 아이의 힘겨루기가 대등할 리 없었다.

닐은 질질 끌려가며 고래고래 악을 썼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상인들은 모두 모른 척하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도움받기를 포기한 닐이 식료품 봉투를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제 팔을 붙잡은 남자의 손을 힘껏 물었다.

“아아악!”

소리를 꽥 지른 남자가 잠시 팔을 놓친 사이 닐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이내 다시 따라잡혔다. 남자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서 크게 울렸다.

닐은 오랜만에 제 몸 위로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력을 견뎠다. 남자는 분풀이하듯 닐을 걷어차고 짓밟았다. 이마와 입술에서 피가 터지고 가슴과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숨이 가빠졌다.

아이의 바지 주머니에는 저에게 처음 베풀어진 호의가 부적처럼 늘 들어 있었다. 항구에서 주웠던 단검이었다.

클라리사는 고작 열 살짜리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닐은 그 칼을 소중히 간직했다. 단검 덕분에 제 손발을 칭칭 동여맨 밧줄을 끊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크리슈나가 건넸던 그 단검은 한 번 더 닐을 도왔다. 닐은 발길질 아래에서 몸을 웅크려 주머니를 더듬었다. 마침내 칼을 손에 쥔 순간 아이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날은 남자의 양쪽 뒤꿈치에 붙은 아킬레스건을 마구잡이로 베어 냈다. 매일매일 칼날이 녹슬지 않게 아끼며 관리한 보람이 있었다.

발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남자는 그 자리에 나뒹굴었고, 닐은 가슴을 움켜쥔 채로 절뚝이며 달렸다. 호흡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뛰어 달아났다.

해 질 무렵 닐은 잉그린트 자치령 앞에 도착했다. 문 앞을 지키던 인더스 군인과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의식을 잃어 가는 아이의 곁으로 병사 몇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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