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23)화 (123/146)

123. 전쟁과 평화

“진심으로 서운합니다.”

에우로스의 말에 프시케가 눈을 깜박였다. 에우로스는 여태껏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게 서운한 게 있으시다고요?”

프시케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어쩐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에우로스는 드물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런 표정도 프시케에게 보여 주는 일은 드물었다. 사무엘에게라면 몰라도.

프시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마치 투정 부리는 소년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웠다.

“제가 무얼 잘못했나요?”

“그대는 사무엘의 말을 듣고도 웃기만 하더군요.”

“그게 왜……?”

“그게 서운하다는 겁니다, 프시케.”

프시케가 옳았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지금 투정 부리는 소년이었다.

“제가 살아오면서,”

에우로스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금실 같은 속눈썹이 마치 노랑나비처럼 푸른 눈동자 위를 배회했다.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유혹하듯 팔랑거리는 그의 속눈썹을 응시했다.

“제 아내만큼,”

채도 높은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닫히며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냈다가 감추었다. 살짝 올라간 입매의 끝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선명했다.

“제게,”

에우로스의 흰 손가락이 프시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손목 안쪽을 살살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의 감촉이 얼얼한 느낌마저 주었다.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프시케는 순식간에 허리를 얽는 단단한 손길에 숨을 몰아쉬었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에우로스는 변했다.

예전처럼 거짓으로 웃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의 웃음은 투명해졌다. 거울의 이면을 궁금해할 필요가 없어졌을 정도로, 에우로스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울 뒤쪽에는 꽤 신기한 것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요즘 그녀는 길을 가다 작은 보물들을 발견해 줍는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완벽하고, 성숙하며, 다정했던 남자의 의외로운 모습에 프시케는 설레었다. 하르모니아가 간혹 사무엘을 두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평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에우로스는 과거를 저버렸으나, 누구보다 과거에 연연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 환히 웃는 표정은 그의 상징과도 같았고, 모든 결점을 가려 주는 가면이 되었다.

더러운 골목길 위에서 파란 눈을 빛내며 울던 모습, 신경 끄라며 불퉁하게 대답하던 모습,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을 데리고 다니던 모습, 투박하게 젖은 치맛단을 끌어 올려 묶어 주던 모습, 별똥별에 대해 알려 주며 뻐기던 모습, 벅찬 숨을 쉬면서도 저를 등에서 내려놓지 않던 모습, 수줍어하며 노란 머리 장식을 건네던 모습.

사실은 그게 에우로스의 진짜 모습이었다.

불완전한 그를 보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우로스는 프시케가 짓는 천진한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프시케는 과거에 유폐되어 있었으나, 누구보다 과거에 초연했던 사람이었다. 재잘거리기 좋아하고 천진난만한 꼬마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표정을 감추었다. 창백한 얼굴에 입을 꼭 다문 그녀는 갤러웨이 성의 유령으로 불렸다.

우는 아이 앞에서 더 많이 울며 안아 주던 모습, 겁도 없이 씩씩하게 길을 찾는 모습, 어머니의 가르침을 어긴 채 강물에 발을 담그며 신나 했던 모습, 숫자를 제대로 세지 못해 부끄러워하던 모습, 처음 보는 별똥별에 가슴 벅차하던 모습, 칭얼거리다 등에 답삭 업혀 미안해하던 모습.

사실은 그게 프시케의 진짜 모습이었다.

불완전한 그녀를 보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에우로스는 문득 고대 신화 수업을 받던 날, 사무엘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랑의 신과 그 아내의 이야기 말이야, 낭만적이지 않아? 신화에서 영원히 둘이서만 행복했던 부부는 이들이 유일할걸? 역시 사랑의 신이라 그런가 봐.”

어렸을 적에 신화 이야기를 읽어 본 적 있다던 사무엘이 호들갑 떨면서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이 정확히 뭐였더라.

“명색이 신이라면서, 제 화살에 실수로 찔려 사랑에 빠졌다는 게 말이 돼?”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답했었던 것 같다. 열서넛의 에우로스는 냉소적이며 회의적이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사랑인 거지. 신이라고 해도 사랑을 피할 수는 없다는 뜻 아닐까? 그만큼 사랑의 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한심하다는 거야. 신이라면 사랑도 피할 수 있어야지.”

“아니, 사랑은 원래 그런 거라니까!”

자신과 동갑인, 고작 열서넛의 사무엘은 의외로 성숙했던 것 같다. 스물넷의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이제야 깨우친 것을, 그는 그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뭘 알고 말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사랑도 불완전한 것이다.

제 부족함과 프시케의 부족함을 끌어안은 지금, 수많은 불완전성과 부족한 것과 결점들이 주는 것은 뜻밖에도 기쁨과 행복이었다.

에우로스가 프시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몸을 붙여 온 아내는 사랑스럽고, 바람은 따스하고, 잎이 큰 나무들은 짙푸른 향기를 내뿜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까만 신비가 동그랗게 닿아 겹쳤다. 불길함이 걷힌, 기분 좋은 모호함과 기대가 일식의 테두리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어서 이클립스를 보고 싶어요.”

프시케가 속삭였다.

“재작년 경마대회 때, 저 혼자 이클립스에게 돈을 걸었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다음번에도 그런 행운이 또 올까요?”

“이클립스에게 한 번 더 꾀병을 부리라고 잘 이야기해 두어야겠군요.”

에우로스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꾀병을 부리던 이클립스가 벌떡 일어나 선두에서 질주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낮게 점쳐지던 승률에도 불구하고 가진 돈을 전부 걸었던 프시케는 그날 걸었던 돈의 수십 배를 땄다.

프시케는 그런 게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런 확신도 없는 이끌림과 같은 것. 불확실한 결과에 따른 온전한 책임. 그럼에도 믿고 싶은 것.

에우로스의 웃음이 완전히 펼쳐진 공작새의 꼬리처럼, 겹겹이 벌어지는 장미 꽃송이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프시케는 제 영혼이 완전히 압도당해 꼼짝할 수 없다는 걸 아플 만큼 확연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제가 먼저 에우로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처음 손을 먼저 내밀었던 바로 그날처럼.

순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청문조 두 마리가 노래를 멈추고 부리를 비볐다.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입술도 아주 오래 맞닿아 있었다.

* * *

방갈로에는 네모난 모양의 큰 창이 있다. 유리도 없고 뻥 뚫린, 말하자면 구멍에 불과한 창문이다.

그 창문의 장점이라면, 통풍이 아주 잘된다는 것이었다. 마당에 자라는 나무와 풀과 꽃이 쏟아 내는 향기들이 바람에 실려 방갈로 안으로 찾아온다는 것, 그건 확실히 장점이 맞았다.

그러나 그 창문에는 단점이 더 많았다. 일단 벌레와 도마뱀이 마구 집 안으로 들어온다는 게 큰 문제였다. 그 때문에 밤이 되면 나무판자를 덮어 놓기는 했지만, 낮에는 채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열어 두어야 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해로운 것은 도마뱀과 벌레뿐만이 아니었다. 정원에서 입 맞추는 에우로스와 프시케의 모습도 함께 여실히 들어왔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찻잎을 구할 수 없어, 네 번째 우려 밍밍한 차를 들이켜던 사무엘의 확장된 동공 속으로.

저 둘이 키스하는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이야.

사무엘은 데본셔 공작저에서 열린 가면무도회 날, 불꽃놀이를 배경 삼아 딱 달라붙어 있던 그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당장에라도 관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어쨌든,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진짜, 너무하네.”

사무엘이 중얼거리자, 그 옆에서 밍밍한 차를 함께 홀짝이던 클라리사가 앤 여왕처럼 자애로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봤다.

“너무하긴요. 보기 좋기만 한데요.”

“그래…….”

“스태포드 님도 돌아가면 결혼하셔야지요. 착하고 귀여운 영애를 만나게 될 거예요.”

클라리사가 히죽히죽 웃었다. 사무엘을 놀리기 위해서다. 사무엘은 어젯밤 꿈에 나온 얼굴을 떠올리다가 상념을 털어 냈다.

전쟁 중에도 평화는 있다. 태풍 속에도 고요함은 있다.

대문을 나가면 총을 든 인더스 군사들이 몰려다니고, 음식 배급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다급히 달리고, 널찍한 등 위를 술로 장식한 거대한 코끼리들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 다녀도, 담장 안에는 고운 빛 꽃이 고요하게 돋아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평화를 벗어나 전쟁 속으로 발을 디딘 인영의 움직임을 모두가 놓치고 있었다는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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