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과거
클라이브 중령은 고민 끝에 대응 공격을 개시하는 명령을 내렸다. 웃달라 태수의 군대가 잉그린트 자치령을 점령한 지 3일 후의 일이었다.
리던으로 보낸 전령이 돌아오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공격은 온전히 사령관 홀로 책임져야만 하는 전투였다.
그러나 자치령 내에 남아 있는 잉그린트인들의 존재가 클라이브 중령을 행동하게 했다.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 무고한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클라이브 중령은 가장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인 전술을 도출해야 했다. 아무리 머리 터지게 고민해 봐도, 잉그린트 군에게는 어차피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게릴라전. 그만큼 병력의 차이가 심하게 컸던 까닭이었다.
처음 칼카트에 도착했을 때 정찰병이 물어 온 인더스 군대 병력은 어마어마했다. 1, 2만 명 정도일 거라 예상했던 군사의 수는 실제로 3만 명이 넘었다. 대포의 개수는 20문이었다. 집채만 한 코끼리들도 50마리나 있었다.
그에 반해 잉그린트 병사의 수는 채 5백 명이 되지 못했다. 대포는 네 대, 코끼리는 없었다. 심지어 부사령관을 잃은 군대는 사기마저 저하된 상태였다.
클라이브 중령의 계획은 간단했다. 새벽을 틈타 칼카트 외곽의 방어구역과 평원에 퍼져 있는 인더스 군대에 침투해 먼저 포대를 제압하고, 빠른 속도로 태수의 거처로 밀고 들어가 태수를 생포하는 것.
하지만 일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불운하게도 이번 클라이브 중령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인더스군이 그들의 공격을 예상해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몇십 명의 사상자를 낸 잉그린트 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들은 퇴각했지만, 자치령에 있는 잉그린트인들은 퇴각이 불가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사람들의 불안은 점차 가중되었다.
잉그린트 군대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인더스 군인들은 애국심에 고취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잉그린트인들에 대한 적개심도 나날이 드높아졌다. 자치령 내 분위기가 더욱 뒤숭숭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게 다 떨어져 가요.”
클라리사가 불안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자치령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이 안에 있는 식료품이란 식료품은 거의 다 동났어요.”
프시케는 가지고 있는 지폐를 전부 꺼내 클라리사의 손에 쥐여 주며 물었다.
“이걸로도 안 될까?”
클라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돈은 아무 쓸모도 없어요. 먹을 걸 가진 사람들은 다른 생필품으로 물물교환을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법도 하지요. 전쟁에서는 돈 보다도 물건이 중요하니까요.”
프시케가 가진 것은 전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우로스와 사무엘이 가진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잉그린트에서 손꼽히는 부자라 해도 지금 이곳에서는 그 사실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효용가치 없는 종이 쪼가리와 약간의 사치품 따위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인더스의 기후는 늘 더웠다. 아무리 기온이 낮은 날도 잉그린트의 초여름 정도였다. 따뜻한 날씨 덕에 1년에 두 번 농사를 지어,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려 있는 곳이 인더스였다.
그랬기에 잉그린트인들은 그동안 음식을 저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본국이었다면 당연히 창고에 훈제하거나 염장해 둔 식료품들이 그득했을 텐데, 지금 그들의 창고는 대부분 텅텅 빈 상태였다.
“배급은 몇 시부터야?”
웃달라 태수는 자치령의 잉그린트인들에 식사 배급을 약속했다. 그건 참 자비롭고 관대한 처사였다.
하지만 태수의 자비와 관대는, 그 아래 층층이 깔린 아랫사람들의 주머니로 대부분 들어갔다. 원래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이.
그런 이유로, 전달되는 식료품 배급의 양은 터무니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자치령에 남아 있는 잉그린트인 수백 명은 집 안에 있던 음식을 다 소진한 뒤 관상용으로 키우던 식물에서 과실을 따 먹고, 그것마저 없어지자 나무뿌리를 캐야 했다.
“오후 두 시부터랬는데,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을 거예요.”
아직까지는 자치령에 인류애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배급 음식은 병자와 임산부, 아주 어린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갔다.
어른 넷과 열 살이 넘은 소년이 사는 프시케의 방갈로는 그러므로 배급 순위에서 거의 맨 마지막으로 밀렸다. 망해 가던 갤러웨이 성에서 지냈을 때보다도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차라리 산속이나 들판에 있는 편이 나았을 것 같군요.”
카우치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무엘이 말을 얹었다.
“그랬다면 에우로스가 사냥을 해 왔을 텐데요. 사냥대회 우승은 늘 에우로스 차지였거든요.”
프시케는 이제껏 딱 한 번 에우로스의 활 솜씨를 보았다. 갤러웨이 성에서 말콤 월레스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아슬아슬하게 말콤을 비켜 나무에 박혔던 화살을 떠올리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생긋 웃었다.
그 마음과 통했는지 사무엘의 활기찬 수다가 시작되었다.
“그때, 갤러웨이 성에서의 일 기억하십니까? 정원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에 내다봤다가 정말 깜짝 놀랐었죠. 그때 에우로스가 짐에서 활을 꺼내는데 미친놈인 줄 알았습니다. 사람 죽이는 줄 알고 간이 콩알만 해졌었다고요.”
“사무엘.”
에우로스가 노려보자 사무엘은 입술을 움찔했다가 뻔뻔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원래 에우로스라는 인간은 남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많았는데도 그랬어요. 리던 사교계 숙녀들 중에서 에우로스에게 추파 한 번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걸요. 심지어는…….”
“사무엘.”
에우로스는 정색하며 사무엘을 보았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요? 뭐예요?”
이제는 귀족들과 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 클라리사가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물었다. 사무엘은 우쭐한 표정으로 그녀의 호응에 답했다.
“트로이스 가문 아시죠? 그 가문에 가니미드 트로이스라고, 끝내주게 잘생긴 놈이 있었어요. 에우로스와 미모로 쌍벽을 이뤘죠. 그 인간이 에우로스에게 치근덕거렸지 뭡니까.”
“세에에에상에. 남자가요?”
클라리사가 입을 딱 벌렸다. 반면 프시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에우로스가 저와 이상한 소문이 났던 것도 그 자식 때문이었어요. 한번 남색이라고 말이 도니까 다들 찍어 붙여 가지고…….”
“그런 소문이 있었는지는 몰랐어요, 사무엘.”
프시케의 말에 사무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말도 마십시오. 제가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파티에서 만난 누군지도 모를 영애에게 다짜고짜 청혼했다가 대차게 걷어차였지요.”
“자랑하는 거야, 사무엘?”
에우로스가 비아냥거렸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프시케에게 슬쩍 가닿았다가 떨어졌다. 프시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소 띤 얼굴로 사무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가니 뭐라고 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잘생겼다니 꼭 한번 보고 싶어요. 저는 브라이튼에서 우리 주인 나리가 제일 잘난 줄 알았는데!”
클라리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그러자 사무엘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에우로스에게 차이고 술병을 입에 물고 살다가 지금은…….”
“지금은……?”
“뭐, 능력 좋은 남자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아내가 있어서 그렇지.”
그때 에우로스가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제 말은, 캐번디시 부인과 에우로스는 천생연분이라는 겁니다. 화살로 맺어진 사랑,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요즘 할 일도 없는데 연극 대본이라도 써 볼까요?”
“프시케, 우리는 마당에서 좀 걷는 게 어떻겠습니까. 계속 집 안에 있었더니 바깥 공기를 쐬고 싶군요.”
에우로스는 사무엘의 말을 무시하고 프시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촉하지 않고 담담히 기다리는 그 손을 잡고 프시케가 몸을 일으켰다. 곧 그들은 베란다를 통해 앞마당의 풀밭으로 향했다.
“내일은 총독저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총독저에요?”
에우로스의 말에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배급 사정이 나빠지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겁니다. 총독에게 상황을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프시케는 말끝을 흐렸다.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떠오른 탓이었다.
데이모스의 실종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고, 한참 전에 죽었을 거라는 추측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본인이 직접 함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어디에도 책임을 묻지 못했다.
총독은 이 사태의 원흉인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뼛속 깊이 원망했다. 분명히 무력을 쓰지 않고 평화로이 협상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데본셔 소공작이 제멋대로 탈영했다가 실종되는 바람에 일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총독이 데이모스의 형인 에우로스를 환대할 리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어쩌면 관저에 발도 들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평소였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러므로 총독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에 무례를 운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데이모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프시케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약하게 한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모릅니다.”
그러나 티모시 로스는 분명히 데이모스를 죽였을 것이다. 나이젤 로스를 대신해 복수하는데, 고작 오른손을 망가트리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을 테니까.
티모시는 데이모스가 실종된 후에도 한동안 함대에 머물렀다. 그리고 지난 전투를 틈타 도주하여 갈리아행 상선을 탔다.
매슈 아담스 일병은 전투 중 실종자로 처리되었다. 아마 영원히 그 이름은 칼카트에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실종되어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위대한 군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프시케,”
에우로스가 걸음을 멈추고 프시케를 마주 보고 섰다.
“진심으로 서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