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그대 좋으실 대로
밤이 되었다.
안개가 모조리 걷히자 맑게 갠 밤하늘이 드러났다. 어릴 적 그날처럼,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습니다.”
에우로스가 말했다. 프시케는 부드러운 음성에 실린 팽팽한 진동을 어렵지 않게 읽어 냈다.
“이곳에 데이모스가 있습니다.”
에우로스의 팔 위에 가볍게 얹었던 손에 살짝 힘이 실렸다. 프시케는 몇 번 입술을 깨물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왜……?”
“이번에 파병된 인원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만난 적 있나요?”
에우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날 뻔했습니다. 실은 오늘 구출되자마자 데이모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팔에 닿은 프시케의 손끝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에우로스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다독이며 말했다.
“이렇게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지난번 그대가 준 뼈아픈 교훈 때문에라도 밝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우로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매슈 아담스 일병을 통해서였다.
매슈 아담스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오빠인 리처드 스펜서 소백작의 의뢰를 받아 황금화살에서 보낸 용병이었다.
프레이아가 오들오들 떨며 데이모스와의 일을 털어놓았을 때, 스펜서 소백작은 곧바로 결투를 신청해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쏴 죽여도 시원찮아 할 정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결투를 위해서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걸 참관인들에게 밝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소중한 여동생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임이 자명했다.
프레이아도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부탁한 것은 데이모스의 오른손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줄 것, 그리고 각서와 제 이름이 수놓인 스타킹의 회수였다.
덧붙여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를 구조해 달라는 것이 여동생의 애원이었다.
스펜서 소백작도 에우로스를 향한 프레이아의 집착에 가까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타국에서 그 사생아가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그는 동생의 편을 들어주었다. 에우로스가 죽는다면 프레이아는 틀림없이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스펜서는 프레이아가 백작가를 나서자마자, 곧바로 황금화살 클럽으로 향했다. 잉그린트에서, 아니, 브라이튼을 통틀어 가장 믿고 의뢰를 맡길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금화살 클럽의 소유주가 에우로스 캐번디시라는 점이 신뢰의 가장 큰 이유였다. 그가 거느린 정보원들과 용병들은 하나같이 유능하고 입이 무겁다고 정평 난 자들이었다. 의뢰비가 만만찮았지만, 그건 리처드 스펜서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황금화살의 매니저 또한 단시일 내 인더스로 최고 인력을 보내 어떻게든 에우로스를 구출해 올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고, 스펜서 소백작은 그가 보낼 유능한 용병이 프레이아의 부탁을 함께 해결해 주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네메시스호에 승선하여 인더스에 온 용병이 매슈 아담스였다. 황금화살 클럽의 매니저는 이 임무에 가장 적합한 자를 엄선했고, 스펜서 소백작이 돈을 댔다. 말하자면 매슈는 리처드 스펜서와 황금화살 매니저의 일치한 이해관계가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고만고만한 잉그린트 육군 병사들 가운데, 뛰어난 체력과 실력을 갖춘 매슈가 사령관의 눈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클라이브 중령은 인더스와의 첫 전투가 될 블랙홀 생존자 구출 작전에 그의 이름을 명단에 올렸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매슈 아담스는 곧장 데이모스의 방으로 가, 어리숙한 병사 흉내를 내며 데이모스를 유인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타인의 약점을 눈감아 줄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그 약점을 쥐고 흔들며 이용해 먹는 자라는 걸 매슈는 잘 알고 있었다.
매슈 아담스는 약점을 잡힌 척하며 손쉽게 데이모스를 군함 밖으로 끌어낼 방법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데이모스가 스스로 지휘 본부를 이탈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지만.
그리하여 매슈는 오늘 새벽, 여유롭게 윌리엄 요새에 침투해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곧장 구조해 냈다. 클라이브 중령이 총독의 협조를 얻어 인더스 군사들도 알지 못하는 요새의 비밀 통로 위치를 미리 확보해 놓은 덕분이었다.
생존자들은 다행히도 전원 건강했다. 아프거나 다친 자들은 이미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더스 태수는 그들을 협상을 위한 인질로 쓸 작정이었기 때문에, 에우로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비교적 깨끗한 물과 양질의 음식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클라이브 사령관이 지시한 대로 에우로스는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곧 풀려났고, 매슈는 곧장 에우로스를 그의 친구, 사무엘이 있는 숙소로 데려갔다. 황금화살 클럽의 매니저가 선택한 용병답게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구조였다.
숙소에 도착한 뒤, 매슈 아담스는 에우로스와 사무엘에게 데이모스 캐번디시, 스펜서 소백작, 황금화살 클럽이 얽힌 이번 임무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에우로스가 프시케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의 개요였다.
“데이모스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떠올릴 때마다 프시케를 덮쳤던 감정은 공포였다. 데이모스가 프시케에게 저질렀던 짓에는 근거가 없었다. 프시케는 데이모스에게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았으므로.
순수한 악, 이유 없는 범죄가 더 두려운 법이다. 그런 까닭으로 프시케는 데이모스를 무서워했다. 가면무도회의 밤을 떠올릴 때마다 악몽 같은 그림자의 환영에 시달렸고, 눈을 감고 귀를 가린 채 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손가락은 에우로스를 향하고 있고, 그것에는 아주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에우로스를 증오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자였다.
1)
보잘것없이 드러난 밑천을 보자, 단단했던 두려움이 허탈하리만치 빠르게 녹아 없어졌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질투와 열등감이 만들어 낸 괴물에 불과했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게 우스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프시케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그렇게 답했다.
에우로스는 언제나 그래 왔다. 그는 데이모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굳이 괴롭히지도, 굳이 복수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런 것이 데이모스를 더욱 분노케 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꼭 사랑이나 감사와 같은 감정들만 되돌려 주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화를 돌려받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그게 데이모스였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은요?”
그 말에 에우로스가 멈칫 굳었다. 그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년 전에,”
그가 프시케의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고 기어이 그대를 떠나게 했던 것에 대해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에우로스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매슈 아담스에게서 각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걸 이용해 아예 사교계에서 매장시켜 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에게 그 이상의 고통은 없을 테니까요.”
프시케의 눈이 커졌다.
놀라서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에우로스는 픽 웃었다. 지금껏 자신이 어떻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철저히 숨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래서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건데.”
“…….”
“이번에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의 처분은 프시케 그대가 내려 줘요.”
프시케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프레이아는 에우로스를, 데이모스는 프레이아를 사랑했고, 그게 그들의 인생을 망쳤다.
그렇게 불운한 존재들이 있다. 사랑의 신이 쏜 납화살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그 불운에 더 큰 불운을 더하는 것은 프시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부인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 에우로스는 다시 한번 웃었다.
프시케 스튜어트, 프시케 캐번디시는 그런 사람이다.
비싼 염료를 쓴 최고급 드레스를 입은 채 서슴없이 오물 위에 쭈그려 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 주는 사람, 그 아이가 건네준 구질구질한 머리 장식을 간직했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약속을 홀로 지켜 내는 사람, 누군지도 모를 상처투성이 인더스 아이를 데려다 보살피는 사람.
“그 아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에우로스는 파란 눈을 가진 인더스 아이에 대해 물었다. 저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 허겁지겁 엎드리던 그 아이는, 사무엘과 클라리사에 의해 짐짝처럼 들려져 방갈로를 나갔다.
“우리가 잉그린트로 돌아갈 때 데려가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프시케가 에우로스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닐은 제법 똑똑한 아이였다. 알프레드가 가르쳐 주는 잉그린트어와 산수를 그는 금방금방 깨쳐 나갔다.
채스웍 하우스나 갤러웨이 성에서 일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혹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면 지원해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프시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요.”
예전이었다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한쪽 발은 장미수에, 나머지 한쪽 발은 똥물에 담그고 사는 사생아의 삶은 사실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사생아인 데다 심지어 혼혈인 닐에게 잉그린트에서의 삶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은 빤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프시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에우로스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의 가족이 되어 연극 무대의 귀족 나리들처럼 자신도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글자도 배우면 참 좋겠다고. 이 모자란 꼬마의 오빠가 되어 이 아이를 귀여워해 주고, 자라는 것을 지켜봐 주고, 그리고 여동생이 무도회에 갈 때 쫓아가서 멍청한 남자들을 해치워 주고.
카듀 강에서 어린 프시케를 업고 오면서 했던 깃털 같은 상상들. 그건 정말 깃털과 같아서 금방 저 멀리 날아 사라져 버렸었다.
열 살의 에우로스에게 그런 행운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테지.
그러니까 그에게는 그 행운을 닐에게서 뺏을 자격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프시케가 물었다. 에우로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운이 내게로 오지 않아서, 그래서 그 아이의 남편이 되어서,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1)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3막 3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