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재회
프시케는 베란다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주 조용한 오후였다.
가벼운 비가 내렸다. 더운 공기 사이에 알알이 맺혔던 빗물이 톡톡 터지며 하얀 안개를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햇빛도, 비도, 모든 기후가 명료한 인더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사각.
마당에 누군가 들어섰다. 비를 맞아 빳빳해진 풀잎들은 평소보다 더 또렷한 소리를 내며 방문객의 존재를 알렸다. 그 소리가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던 젖은 공기의 흐름을 뒤바꾸었다.
아무런 근거 없이도, 그저 느낌만으로도 확신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이 느낌을 안다. 제 모든 감각이 한 곳을 가리키는 느낌. 에우로스를 만난 후로 프시케는 언제나 그랬다.
보이지 않으면 귀가 들었다. 들리지 않으면 향기가 퍼져 왔다. 가끔은 입이 마르고, 가끔은 두근거렸다. 그렇게 에우로스는 프시케를 일깨웠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귀는 들었다. 소리를 내는 발걸음 아래 풀잎이 으깨지며 청량한 향기가 훅 끼쳐 왔다. 프시케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사각.
멈추어 있던 소리가 진한 풀 향기를 머금고 다시 밀려들었다. 프시케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뱉어 냈다. 숨이 혈관을 타고 물살처럼 뻗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에우로스를 만나기 전, 프시케는 갤러웨이 성의 유령이었다. 그는 유령의 단조롭고 적막한 삶에 다양한 감정을 부여해 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령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음성을 들으면 떨렸다. 그가 손을 내밀면 안도했다. 그가 잔잔하게 웃으면 심장이 뛰었다. 그가 안으면 수줍었고, 그가 숨기면 궁금했다. 감정들은 언젠가부터 멈춘 것 같던 그녀의 피와 숨을 되돌렸다.
사각.
프시케의 목이 꽉 잠겨 들었다. 미세한 물 입자가 속눈썹에 촘촘히 맺혀 있다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슬픈 것도, 기쁜 것도 같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도 같이 흘렀다. 이 감정도 에우로스가 준 것이었다.
희부연 안개가 넓은 잎을 드리운 나무 사이를 헤엄치듯 느릿하게 오갔다. 프시케에게 안개는 대개 모호한 것이었다. 시야를 가리고 몸을 휘감는, 무겁고 불확실한 과거였다.
하지만 지금, 안개는 선명한 현재를 몰고 왔다.
사각.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에우로스와 함께.
* * *
에우로스는 아담한 방갈로 앞에 서 있었다. 아주 조용한 오후였다.
가벼운 비가 내렸다. 굵지 않은 빗방울은 대기에 금세 하얀 흔적을 만들었다. 안개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바람을 타고 오르내리며 시야를 가렸다. 꿈처럼 희미한 풍경이었다.
그는 조금 망설였다. 사실은 이것도 꿈이 아닐까, 에우로스는 생각했다. 매일 밤, 감옥에서 꾸었던 그 꿈 말이다.
꿈속에서 프시케는 늘 안개 저편에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다가서려 해도, 안개는 실처럼 그의 다리를 묶었다. 손을 뻗으려 하면 안개는 눈을 가렸다.
달려가 더듬으며 입을 맞추고 귓가에 숨을 쏟아 내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이끌어 제 몸을 쓰다듬게 하고, 마음껏 향기를 들이마시고도 싶었다.
등 뒤에 있어 저는 볼 수 없는,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알기 원했던 거울 뒷면의 추악한 과거를 내보이고, 그건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고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꽁꽁 매듭지어 가라앉혔던 그 돌멩이를, 이미 자신은 깊숙이 팔을 집어넣어 꺼내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야 했는데.
꿈은 촛불처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꺼졌다.
사각.
한 발짝 내디뎠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푸른 수레국화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담담한 듯, 재촉하는 듯, 소녀는 제 손을 흔들었다. 몽롱하던 안개 속으로 단번에 색채가 스몄다. 잊을 수 없었던, 잊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면하고 싶던 찬란한 빛이었다.
용기 내어 그 손을 맞잡았다. 손을 잡자 향기가 밀려들었다. 기억대로 그 향기는 달콤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간질거렸다. 그 향기는 오로지, 오직 프시케만의 유일하고도 고유한 향기, 그녀만이 줄 수 있는 포근한, 새털같이 흔들리는 향기였다.
사각.
아이의 손을 잡고 에우로스는 다시 한 걸음 나섰다. 여전히 그는 꿈속에 있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숙녀가 제 앞에서 빙글 돌았다.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새카만 눈동자가 날갯짓하는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미뉴에트의 박자에 맞추어 날아오르듯, 프시케가 춤을 추었다.
에우로스는 도망가지 않았다. 끝까지 그 밤을 지키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노랑나비가 팔랑거리며 손을 꼭 잡은 자신과 프시케 주변을 날았다. 음악도, 대화 소리도 일제히 정지했다. 뺨에 어른거리는 홍조가 사랑스럽다.
사각.
나비를 따라 또 걸었다.
촛농이 뚝뚝 떨어지는 초가 보였다. 일렁이는 주홍색 불빛 뒤로 흰 나신의 여자가 그림자와 함께 바드득 떨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프시케를 그는 한참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켜 프시케의 손에 묻은 촛농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발갛게 익은 손등이 안쓰러워 에우로스는 서늘한 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시선을 돌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표정에 경멸은 없다. 싸구려 동정도 없다.
그 순간 마음속을 휘젓던 전갈들이 구석구석 몸을 숨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전갈들은 제 불안을 먹고 자란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에우로스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결심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녀가 에우로스의 손을 힘주어 잡아 온다. 프시케는 울고 있다.
까만 밤, 대기가 만들어 낸 투명한 이슬 같은 눈물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제 마음에 와 웅덩이처럼 고였다. 그러자 익사한 전갈들이 그 수면 위로 둥둥 떠올랐다.
사각.
마지막 한 걸음이 안개의 고요를 깼다. 꿈이 사라진 자리에 현실이 떠올랐다. 에우로스는 기꺼이 그 현실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간절하게, 더없이 절실하게, 그렇게 청했다.
프시케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응시하는 검고 깊은 눈동자가 흐릿했다.
“잡아요.”
부디.
에우로스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구원을 바라는 자였다.
돌이켜 보면, 사실은 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단번에 잡아 오지 않으면 초조해지던 마음, 그래서 재촉했던 손. 진흙과 오물 위에서 울던 아이처럼 프시케의 손을 잡고 싶어서 그는 항상 초조했다.
프시케의 작고 가느다란 손이 떨리는 에우로스의 손 위로 포개어졌다. 힘을 주어 끌어 올리자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부연 안개가 걷혀 나간 눈동자에 별빛이 스치고 은하수가 미끄러졌다.
잉그린트에 단 하나밖에 없는, 최신식 천체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밤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리라자리와 화살자리를 품은, 카듀 강으로 떨어지는 별똥별을 품은, 위스키 증류소에 내리던 환한 달빛을 품은 검은 우주. 태양을 향해 쉼 없이 공전하던 지구의 하늘이었다.
* * *
찰박거리는 소리가 물방울처럼 튀어 올랐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고요했으되 소리로 가득했던, 밤의 승마 시간처럼. 이클립스의 말발굽 소리와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모든 말을 대체했던 그때처럼,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통하지 않은 소리들은 다른 감각으로 치환되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 애틋한 표정, 자꾸만 마주치는 시선, 잔잔한 웃음과 같은 것들.
프시케는 처음으로 아주 밝은 곳에서 에우로스의 비밀을 마주했다. 어둠으로 가리고 꽁꽁 감싸고 손을 묶어 숨겼던 것. 넘실거리는 빛 아래 드러난 푸른 수염의 비밀은 아주 많은 소리를 냈다.
여린 살에 파고드는 가느다란 소리. 뭉툭하고 거세게 부딪쳐 오는 소리. 뜨겁게 달라붙어 타오르는 소리. 눈물이 흐르고 떨어지는 소리. 고통을 목구멍 뒤로 넘기는 소리.
그 소리는 알싸하고, 묵직하고, 씁쓸하고, 어지러웠다. 그래서 프시케는 먹먹해졌다.
“울지 말아요.”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붉은 눈가를 핥았다.
오르페는 호기심 때문에 아내를 잃었고, 푸른 수염의 부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가 큰일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호기심 때문에 아내를 잃은 오르페는 엘리시움에서 아내와 재회했다. 때로는 오르페가, 때로는 아내가 앞서 걸으며 뒤돌아보았다. 그럼에도 서로를 잃지 않아도 되었다.
1)
푸른 수염의 부인은 살아남았고, 푸른 수염은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 누구도 더 이상 죽지 않았다.
그리고 프시케의 호기심은 성숙한 사랑을 낳았다. 어둠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냈던 에우로스도, 불안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던 서툰 프시케도 이제는 없다.
“사랑해요, 프시케.”
에우로스가 웃으며 속삭였다. 프시케가 사랑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투명하게 흔들렸다. 원하지도, 밀어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숨김없이 내보이는 웃음이었다.
사랑의 신은, 사랑의 신이었으나 사랑을 알지 못했다.
사랑의 신은, 사랑의 신이었으나 사랑에 진지하지 않았다.
사랑의 신은 아내를 잃고 난 뒤에야 사랑을 알았고, 비로소 진지해졌다. 절실해졌고, 간절해졌다.
절실하고 간절한 사랑은 사람을 약자로 만든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사랑의 신이 그랬듯, 사랑을 인정해 버린 제 나약한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변신 이야기》 내용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