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16)화 (116/146)

116. 무사 귀환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자신을 구출한 매슈 아담스 일병의 부축을 받아 사무엘이 머물고 있던 숙소로 무사히 옮겨졌다. 총독과의 약속 때문에 윌리엄 요새를 방문했다가 느닷없이 인더스 군대에 사로잡힌 지 약 두 달 만이었다.

블랙홀 구출 작전은 말 그대로 기습이었기 때문에, 사무엘조차도 에우로스가 돌아올 것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거의 밤을 새워 서류를 작성한 후,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던 사무엘은 늦은 아침 제 방문을 두드리는 잉그린트 병사를 보고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사무엘.”

그때 병사의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사무엘은 눈가에 가져다 댔던 손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사무엘.”

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사무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잉그린트 국교회 성서에 따르면, 먼 옛날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은총을 받아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를 세 번 들었다고 한다.

어린 사무엘은 교회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그 얘기를 하는 통에 자신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삼남에게 붙여 준 재미도 특이점도 없는 흔해 빠진 이름 위로 억지로 부여한 의미에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엘.”

그러나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음성이 세 번 강복하사, 마침내 사무엘은 제 이름을 절절히 사랑하게 되었다.

* * *

네메시스호가 칼카트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새벽, 클라이브 중령이 보낸 군사들은 윌리엄 요새를 기습해 블랙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매슈 아담스 일병을 포함한 십수 명의 병사들이 수감되어 있던 열두 명의 잉그린트인들을 구출하는 동안,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병력은 신속하게 자치령 내의 인더스 군사들을 공격했다.

예고 없는 전투에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태수의 군대는 그대로 영외로 밀려났고, 인더스의 코끼리 깃발 대신 포효하는 사자가 그려진 잉그린트의 깃발이 다시 윌리엄 요새에 내걸렸다. 아직 인더스를 떠나지 못한 잉그린트인들은 본국에서 보내온 군대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스코틀린 사람도 울음을 터트리긴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아이고. 주인 나리!”

클라리사가 숙소로 허둥지둥 뛰어 들어오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평소 같았으면 우스꽝스럽다며 놀려 댔을 사무엘은 마치 신의 은총을 온몸에 두른 듯 인자한 태도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사하신 거예요? 멀쩡하신 거예요?”

사무엘의 손을 잡고 벌떡 몸을 일으킨 클라리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에우로스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아랫사람의 본분이고 뭐고 모두 저버린 하녀는 주인의 얼굴과 몸을 쉼 없이 만져 대며 혼잣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클라리사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슬그머니 잡았다.

“클라리사, 에우로스는 지금…….”

“지금……?”

사무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클라리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몸이…….”

“몸이……?”

어디가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큰 병에 걸려 온 것은 아니겠지? 그럼 우리 마님은 어떻게 하지? 클라리사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많이, 더러워.”

사무엘의 말에 클라리사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을 전부 털어 내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그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니 당연하잖아, 클라리사.”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클라리사를 보며 사무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경황없이 에우로스의 몸을 더듬었던 제 손을 내려다보고는 푸드덕푸드덕 몸서리를 쳤다.

“당장은 세워 둘 수 없어서 침대에 눕혔어. 힘이 없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더군. 입고 있던 옷은 전부 태워 버려야 하고, 지금 덮고 있는 이불도…….”

사무엘은 여전히 성스러운 웃음을 띤 채, 에우로스와 클라리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까지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던 에우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라리사 앞에서 이렇게까지 망신을 주다니. 잔인하네, 사무엘.”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클라리사는 다시금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거칠하게 바싹 말랐어도, 온몸에 이와 벼룩이 득시글거려도, 목소리 하나는 멀쩡하구나.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살은 찌우면 되고, 더러움은 씻으면 되지만, 잘난 목소리가 망가지면 돌이킬 방법도 없으니까.

“왜 저만 데리러 오셨나 했더니, 이래서 그러신 거죠? 이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고?”

클라리사가 사무엘을 노려봤다. 예고도 없이 방갈로에 들이닥쳐 프시케는 남겨 두고 저만 쏙 빼 온 데는 이런 불온한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클라리사, 에우로스가 돌아왔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리께서요? 어떻게요?”

클라리사가 마차에 타자마자 사무엘은 프시케 앞에서 애써 참았던 흥분을 토해 냈다.

어안이 벙벙해진 클라리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사무엘의 얼굴을 보고는 바로 수긍했다. 사무엘이 더없이 기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잉그린트 군대가 왔다더군. 오늘 새벽에 구출되어서 이제 막 내 숙소로 옮겨진 참이야.”

“그럼 바로 우리 집으로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마님께는 왜 말씀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그 말을 하며 사무엘은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렸다. 클라리사는 갑자기 돌변한 그 표정을 보며 심장이 마구 뛰었더랬다.

어디 잘못되어서, 그래서 차마 데려올 수 없었나 보다. 하긴, 그 오랜 시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죽은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이상해지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곧바로 말이 없어진 사무엘 때문에 클라리사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이곳에 왔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알게 된 속사정이 이거였다. 사무엘은 에우로스가 너무 더러워서 얼굴을 찌푸린 것이었다.

“그거야 그렇지. 시커먼 남자 둘이서 뭘 할 수 있겠어. 남자는 여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야.”

따지듯 묻는 클라리사의 말에 사무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블랙홀 사건 이후, 자치령에는 인더스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당연히 사무엘을 수발하던 인더스인 시종도 더 이상 출근하지 못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무엘의 복근이 빠지고, 멋내기를 좋아하던 사람의 차림이 어느 순간부터 흐트러지자, 보다 못한 클라리사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지도 어언 한 달째였다.

입으로는 하인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귀족 나리 운운하며 구박했어도, 그녀는 정성껏 사무엘을 돌봐 주었다. 사무엘은 노인들의 괄시와 애정을 동시에 받는, 오묘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을 캐번디시 부인에게 보일 수는 없지 않겠어? 오랜만의 해후인데, 번듯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클라리사가 도와줘야지.”

사무엘이 노인들의 괄시와 애정을 동시에 받는 이유는, 뻔뻔하기 때문이었다.

뻔뻔해서 얄밉지만, 뻔뻔해서 챙겨 주고 싶은 오묘한 매력. 헛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은근히 맞는 말을 하고, 기막혀서 고개를 젓다가도 문득 젓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고. 그래서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클라리사는 흘겨보던 눈에 힘을 뺐다. 그러고는 코를 찡그리며 에우로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거예요? 안 씻으실 거예요?”

그녀가 에우로스의 침대 옆을 팡팡 두드리며 채근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니 방 안에 떠도는 고약한 냄새에 골이 띵한 느낌이 드는 데다, 제 몸까지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사무엘.”

그때 에우로스가 미소 지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자네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

“뭘?”

“나 씻겨 줘.”

순간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악취가 넝쿨처럼 돋아난 침대 주변에 어째서 장미 몇 송이가 수줍게 피어난 것 같은 환상이 보인단 말인가.

“뭐라고? 내가 왜?”

사무엘은 분홍빛으로 물든 제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과는 단 한 번도 함께 수영하거나 씻어 본 적이 없었다. 사내들끼리는 그럴 법도 한데 말이다.

“그거야, 내 발가벗은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과 클라리사는 질겁했다. 특히 사무엘은 제 친구가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인간이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감옥이 이렇게 만들었나.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 나간 그 비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그의 내면에 무언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었다.

에우로스가 변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변한 건 확실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무엘?”

멀뚱하게 서 있는 사무엘을 보며 에우로스가 조금 더 밝게 웃었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웃어.”

그 웃음을 보자 깨달았다. 에우로스의 웃음. 가식이나 의도가 없는 편안한 웃음. 에우로스의 변화는 웃음이었다. 프시케가 아닌 다른 이에게도 보여 주게 된 그 웃음. 사무엘은 어쩐지 코끝이 찡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사무엘은 에우로스를 따라 욕실에 들어간 몇 시간 동안 수십 번의 구역질을 참아야만 했다. 거듭된 인내의 결과, 나중에는 충격으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에우로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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