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15)화 (115/146)

115. 훌륭한 군인

복수의 현신들을 태운 군함, 네메시스호가 칼카트항 인근 해역에 조용히 접근했다. 3주에 가까운 항해 동안 사령관인 클라이브 중령이 최종적으로 확정한 필승 전략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군함 한 대를 겨우 채운 병사의 수, 대포의 개수, 익숙지 않은 지형과 기후, 모든 것이 잉그린트에 불리했다. 웃달라 태수에게는 수만 명의 병사와 수십 대의 대포 화력, 심지어 갈리아의 추가 지원도 있었다.

그러므로 클라이브 중령에게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응하는 인더스 군대와 전면전을 치른다는 선택지가 아예 없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음식을 포함한 군수품도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클라이브 중령이 정한 첫 번째 진군지는 윌리엄 요새였다. 요새의 블랙홀에 갇혀 있는 열두 명의 잉그린트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비밀리에 세워졌다.

“제가 가겠습니다.”

부사령관인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그렇게 말했을 때,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마치 신의 은혜를 입은 것 같은 감동과 찬탄이 올라앉았다.

첫 번째 전투에서, 아직 상대 전력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분신하겠다며 앞으로 나선 대귀족의 용감한 결심은 경외받아 마땅하고 또 마땅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 대위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적어도 네메시스호에 타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그랬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었다.

막강한 데본셔 공작가의 후계자 신분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해군이 아닌 육군에 입대했다는 점, 입대한 뒤 무려 블랙워치를 소탕해 엄청난 무훈을 세웠다는 점.

이 두 개만 보더라도,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그의 입대에 얽힌 비화나 고문실의 악귀라는 별명에 대해 알 길이 없는 일반 병사들에게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허락할 수 없네.”

위험에 처한 자국민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려던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거룩하고도 숭고한 의지를 꺾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유일한 상관, 클라이브 중령이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데이모스는 벌컥 얼굴을 구겼다. 인더스로 오는 내내 클라이브 중령이 칼카트의 지도를 살피며 게릴라전을 준비할 때, 데이모스는 오로지 윌리엄 요새의 구조를 익히는 데 골몰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데이모스가 네메시스호에 기꺼이 몸을 실은 동기가 블랙홀에 갇혀 있다는 에우로스 캐번디시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기대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복형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기회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자네는 지휘관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데이모스의 눈에 클라이브 중령은 투철한 애국심과 군기로 무장한, 꽉 막힌 군인의 전형과 같은 사람이었다.

중령 또한 모든 면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선 데이모스 캐번디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데이모스 캐번디시에게 환호하는 일반 병사들이나 부사관들과는 달리, 영관급 장교인 클라이브 중령은 데이모스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랑글로우에서 그가 어떤 식으로 복무했는지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중령은 상당히 점잖은 성격의 인물이었다. 불필요한 공격은 하지 않고, 전투로 인한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보기 드물게 괜찮은 가치관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고문실의 악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인더스에 파병한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데이모스 캐번디시 대위를 지명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런 이유로 클라이브 중령은 내심 탐탁지 않아 했다. 합이 맞지 않는 사람과 사사건건 부딪쳐야 할 미래가 걱정되어서였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지휘관이라고 해서 늘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데이모스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그 은은한 하극상에 마음 같아서는 군홧발로 정강이라도 차 주고 싶었지만 중령은 참았다.

현재 군인이라고 해서 영원한 군인이 아니고, 현재 부하라고 해서 영원한 부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데이모스가 영원한 군인이나 부하가 될 수는 없겠지만, 죽는 날까지 캐번디시일 것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첫 작전이야. 괜한 호승심으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돼.”

클라이브 중령의 얼굴이 엄격해졌다.

그의 만류는 타당했다. 지휘관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경우, 부대 전체에 타격을 준다. 순식간에 사기가 저하되고, 명령체계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호승심이 아니라, 걱정입니다. 제 형님이 아직도 요새 내에 있단 말입니다.”

데이모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복형을 제 손으로 구출하기 위해 상관에게 반기를 든 캐번디시 대위의 인간적인 면모를 목도한 것에 매우 큰 감명을 받은 까닭이었다.

“사감은 섞지 말도록, 데이모스 캐번디시 대위.”

클라이브 중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마디만 더 보탠다면 정말 정강이를 차 주겠다는 얼굴이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모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쨌거나 군대에서, 그리고 작전 중에 상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중령의 말에 더 토를 달았다가는 하극상 죄목으로 근신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극상을 저지르는 것 따위는 별일 아니지만, 만에 하나 운신이 제한된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데이모스에게는 이루어야 할 대업이, 점령해야 할 고지가 있었다.

“저, 대위님.”

데이모스가 굳은 얼굴로 제 방에 돌아와 의자 하나를 집어 들고 바닥에 마구 패대기를 치고 있을 때, 노크와 함께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짜증이 섞인 데이모스의 목소리에, 문 건너편의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랑 말 섞을 기분 아니니까, 꺼져.”

데이모스가 군대 내에서 혐오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개나 소나 자신과 맞먹으려고 한다는 점.

귀족들도 아닌, 하찮은 평민 출신 군인들과 뒤섞여 지내는 것도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데, 그중에는 자신에게 말이라도 붙여 보려 애쓰는 버러지들도 꼭 끼어 있었다. 문밖에 서 있는 놈처럼 말이다.

“……요새 침투 작전 관련 사항입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

데이모스는 어이가 없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부사령관이다. 그 말은, 지금 이 군함 내에서 작전과 관련해 그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사령관인 클라이브 중령이 유일하다는 뜻이다.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이따위 건방을 떠는지 데이모스는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부서진 의자를 구석으로 밀어 넣고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진 뒤 문을 열었다.

“어디 한번 말해 봐.”

문밖에는 꽤 탄탄한 체격의 병사 하나가 서 있었다. 데이모스는 그를 눈으로 한 번 훑고 나서 제 방으로 들였다.

“방금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블랙홀 침투조 명단도 함께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명단과 명령은 자신과 클라이브 중령이 상의하여 결정한 것이었다. 무슨 대단한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하늘 같은 부사령관을 찾아왔단 말인가.

지금 당장 저 버러지의 턱을 으스러트려야 할까, 데이모스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제가 내일 침투 작전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데이모스는 제 앞에 선 병사의 이름과 계급을 확인했다. 매슈 아담스, 그리고 일병.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담스 일병?”

데이모스의 얼굴을 슬쩍 살핀 아담스 일병이 어깨를 구부정하게 말고는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였다. 그러고는 겁에 질린 얼굴로 빠르게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에게도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군인이었는데, 스코틀린 반군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대위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형님을 직접 구출해 내고 싶은 그런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어, 저는. 저를 이용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저와 옷을 바꿔 입고 복면을 쓰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 아닙니까?”

엉망진창이군. 데이모스는 할 말을 잃었다.

전시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이는 사살당해도 할 말이 없다. 그걸 아니까 데이모스도 클라이브 중령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일병 따위가, 비빌 언덕 하나 없는 평민 주제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는 말인가? 제 형이 죽었다는 같잖은 핑계를 대면서?

“날 도와주겠다는 건가, 아담스 일병?”

“예, 예.”

“알다시피 나는 부사령관이고, 상관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어. 그건 자네도 군인이니까 잘 알겠지.”

“예.”

매슈 아담스가 순순히 대답했다. 데이모스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잘 안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말이야. 지금 자네가 했던 제안, 나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겠는데.”

“예?”

“사령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 판단에 따라 행동하려 한 군인은 어떻게 되지? 사형인가?”

데이모스가 느물거렸다.

“저, 저는, 제 형이 블랙워치와 전투를 하던 중에 죽어서. 그래서 대위님께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에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제발.”

매슈 아담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었다.

데이모스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쏘아보았다. 공포에 잠식된 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데이모스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한참 만에 데이모스의 비틀린 입매가 아담스 일병의 귓전에 가까워졌다. 일병은 눈을 꾹 감은 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부탁, 말씀이십니까?”

“싫어?”

“아닙니다!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겠습니다.”

데이모스는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얼떨떨해하는 아담스 일병을 제 책상 앞으로 데려간 뒤, 돌돌 말려 있던 지도 하나를 펼쳤다.

“내 형,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구출하거든 곧장 이곳으로 데려와 주었으면 해.”

데이모스가 깃펜을 들어 지도 한 부분에 표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일병이 망설이며 물었다.

“전원 조사 후 안전히 귀가시키라는 지시가 있었는데도 말입니까?”

순간 매슈 아담스의 얼굴이 돌아갔다. 데이모스가 그의 머리통을 거세게 몇 번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매슈 아담스 일병. 내가 부탁이라고 했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부탁으로 들은 건 아니겠지?”

“아니, 아닙니다.”

벌겋게 손자국이 난 뺨을 쓸며 데이모스가 물었다. 불쌍한 아담스 일병은 곧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싫으면 바로 영창으로 보내 줄 수도 있어,”

“마땅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데이모스가 한쪽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네메시스의 두 번째 현신, 매슈 아담스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데이모스는 그게 눈물 때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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