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세 개의 폭탄
폭탄 돌리기 게임의 최종 주자, 아레스 캐번디시 데본셔 공작은 요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시한폭탄이었던 프시케 캐번디시를 협박해 인더스로 보내 버린 뒤 한동안 편안한 세월을 즐기던 그의 손에 폭발물 세 개가 연거푸 굴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 개의 폭탄. 그는 제 자녀들을 그렇게 정의했다.
장남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사업차 인더스에 갔다. 공작은 그 사실을 에우로스가 사무엘과 함께 아르키메데스호에 몸을 실은 뒤에야 알게 되었다.
미리 알았다면 무조건 못 가게 막았을 것이다. 제가 압박해서 쫓아 보낸 프시케가 그곳에 있었으므로.
그 여자와 재회하게 될까 봐 마음이 쓰이던 것도 잠시, 에우로스의 급작스러운 수감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인더스 태수의 군대에 의한 집단 수감에다가 하룻밤 새 사망률이 5할이나 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 폭탄을 제거하려던 중에 두 번째 폭탄이 날아들었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감히 데이모스를 인더스 파병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왕에게 파병을 강력하게 주청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도로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이모스가 전투 현장에 몸소 나서서 적군과 총칼을 맞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부사령관이니 전략을 세우고 후방에 빠져 있으면서 적당히 몸을 보전하다가 안전하게 귀환하면 되었다. 물론 전쟁에는 별별 상황이 다 있으므로, 데이모스 대신 앞세울 놈들을 여럿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데이모스의 사나운 성격이 문제였다. 성질을 못 이겨 괜히 앞장서 날뛰다가 사고를 칠까 걱정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 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도무지 아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르모니아 캐번디시는 에우로스나 데이모스와는 달리 속 한 번 썩이지 않은 공작가의 멀쩡한 고명딸이었다. 그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최상의 혼처와 맺어지기 위해 키워졌다. 최고로 먹이고, 최고로 입혔다.
하르모니아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부터 데본셔 공작은 잉그린트의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의 명단을 작성해 그들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 썩 마음에 드는 몇 명을 추려 놓은 뒤 주판알을 굴려 결혼이 가져다줄 이득을 계산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혼담이 들어왔다. 태번의 삼왕자 측에서였다. 데본셔 공작가의 사업체들은 여러 대륙을 넘나들며 돈을 벌어들였고, 공작가가 가지를 뻗은 곳 중에는 태번도 있었다. 부유하고 자원이 풍부한, 전혀 다른 문화권의 국가였다.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왕족이라는 신분은 일단 데본셔 공작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언제나 여왕 위에 있었지만, 왕족은 아니었기에 골탕 먹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딸이 왕족이 된다면 잉그린트의 대귀족에 이어 태번의 막강한 지지를 등에 업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작년 여름, 데본셔 공작은 하르모니아와 결혼할 카드모스 왕자를 직접 만나기 위해 태번으로 향했다. 문서로 주고받던 대략적인 논의에 세부적인 내용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만나 본 왕자는 사내의 눈으로 보면 호방했고, 딸 가진 아비의 눈으로 보면 호색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성사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데본셔 공작으로서, 잉그린트 보수당의 당수로서, 수많은 사업체의 수장으로서 하는 계약이었다.
귀족의 딸, 특히 하르모니아처럼 유서 깊고 명망 있으며 부유하기까지 한 귀족의 딸은, 남편의 성격이나 취향 같은 것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남편이 가진 것과 제 가문이 가진 것이 합쳐졌을 때 얼마나 더 몸집을 불릴 수 있을지를 따져 보는 것. 그것이 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마음가짐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잠잠하던 하르모니아가 카드모스 왕자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데이모스가 인더스로 출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버지, 태번 왕자와의 혼담은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오랜만에 공작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공작을 향해 하르모니아가 한 말이었다. 그와 한자리에 있을 때, 하르모니아가 입을 여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말을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하르모니아,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니?”
그 말에 공작부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요.”
공작은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결연하게 말을 내뱉는 자신의 딸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여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흔히들 생각이 번잡해진다던데 하르모니아도 그 모자란 여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그 왕자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들었어요.”
“무슨?”
“성격이…… 난폭하다는 말이요.”
하르모니아의 대답에 데본셔 공작은 미간을 찡그렸다.
태번의 왕자가 난폭한 성격인 건 맞지만, 그건 그가 부리는 사람들이나 품에 안고 가지고 노는 여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잉그린트 데본셔 가문의 딸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그가 계산을 못 하는 자는 아니었다.
“너에게 난폭할 일은 없을 거다, 하르모니아. 그건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저에게만 난폭하지 않다는 게 더 싫은 거예요.”
“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못되게 군다는 뜻이잖아요.”
공작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도 아니고, 고작 결혼할 남자의 성격이 어쨌느니 저쨌느니 하는 딸의 말에 일일이 대꾸해 줄 필요가 있나.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그래서 결혼하지 않겠다고요. 저는 그런,”
남편과 딸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공작부인이 급히 말을 끊었다.
“하르모니아, 사교계 사람들은 네가 곧 태번으로 떠날 거라고 알고 있어.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 취소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니? 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수군거릴 거란다.”
“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전혀.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혼사에 있어서는 무조건 여자 쪽이 약자니까.”
공작부인은 남편을 힐긋 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파혼했다 치자꾸나. 그러면 너는 흠집 난 보석이 되는 거야. 아무리 알이 크고 세공을 완벽하게 한들, 표면에 큰 흠이 있는 걸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사 가겠니?”
“어머니.”
하르모니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아오며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은 보석이라고, 애지중지하는 귀물이라고. 그러다 좋은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될 거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언어라는 형태를 갖추고 그녀에게 숨김없이 내보여지자, 하르모니아는 그만 견딜 수 없어졌다. 그건 너무나도 잔인했다.
“식탁에서 큰 소리 내지 마라, 하르모니아.”
그때 공작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그딴 소문을 주워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고작 그런 이유로 파혼하고 싶다니 제정신이냐?”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내키면 죽여 버리는 건 정상이 아니에요.”
“태번은 원래 그런 나라다. 잉그린트보다 위계에 철저한 곳이라고.”
“위계와 폭력은 달라요. 신분이 높은 건 높은 거고, 신분이 낮은 사람을 괴롭히는 건 전혀 다른 거잖아요.”
“말장난하지 마라.”
“말장난이 아니에요.”
20년 동안 하르모니아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었던가.
공작은 안 그래도 인더스에 잡혀 있는 아들과 인더스로 출정한 아들 때문에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이따위 시답잖은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상태였다.
“파혼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테냐?”
공작은 갑작스레 머저리가 된 것 같은 딸에게 현실을 일깨워 줄 마음을 먹었다.
“네?”
공작의 물음에 하르모니아가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어머니 말대로 파혼하면 너는 값어치가 떨어진다. 게다가 내 뜻을 어겼으니 지참금도 챙기지 못하겠지. 돈 한 푼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곱게만 자란 대귀족의 딸을 누가 받아 주겠느냐?”
“…….”
“게다가 네가 파혼하면 나는 너를 딸로 여기지 않을 거다. 그러면 그나마 소공녀라는 지위 하나 보고 청혼하려고 했던 사람들마저도 나가떨어지겠지.”
“…….”
“자, 이제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봐라. 여자들이 유독 감정적이고 이런저런 말에 휩쓸리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남자에 비해 지능이 떨어져서겠지.”
“…….”
“투정은 이제 그만둬. 정해 주는 대로 태번으로 시집가든지, 아니면 평생 어느 집 가정교사나 하면서 혼자 늙어 죽든지, 선택은 네가 하면 되겠구나. 데본셔 공작과 척을 진 딸을 어느 집에서 가정교사로 받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잘 판단하거라.”
“…….”
“결혼식은 네 오라비들이 돌아온 후에 준비를 시작할 거다. 계획보다 늦어졌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그때까지 어디 마음껏 생각이란 것을 해 봐라.”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후에 자신의 딸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해, 공작은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금테를 둘러 예쁘게 세공한 특등품 보석은 곧 제 주인을 만나러 바다를 건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