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112)화 (112/146)

112. 남아 있는 자들

칼카트의 웃달라 태수가 윌리엄 요새를 공격해 잉그린트인 백여 명을 블랙홀에 감금한 지 한 달 만에, 붉은 코트를 입은 잉그린트의 정예 부대가 리던항에 정박한 네메시스호에 승선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이름을 붙인 이 거대한 군함에는, 인더스에 대한 복수를 위해 파병된 군인들 외에 다른 목적으로 배에 몸을 실은 복수의 화신들도 타고 있었다.

처음 조우한 순간부터 제 인생을 망가트린 이복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데이모스 캐번디시와 감히 제 여동생을 농락한 데이모스 캐번디시에게 복수하고자 스펜서 소백작이 은밀히 보낸 위장 군인.

네메시스호와 썩 어울리는 자들이었다.

* * *

열 살의 에우로스가 그랬듯, 열 살의 닐 또한 새처럼 닥치는 대로 먹고 가르치는 대로 배우며 쑥쑥 자랐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알프레드는 잉그린트어 회화책을 펼쳐 들고 문장을 하나하나 짚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 알파벳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닐은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알프레드를 흉내 냈다.

알프레드는 프시케의 방갈로에 매일 방문해 닐에게 잉그린트어를 가르쳤다. 프시케가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직접 교육할 수도 있었겠지만, 프시케에게는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한 달 넘게 수감 중인 에우로스 때문이었다.

블랙홀에 감금되었던 잉그린트인들 중 절반이 첫날 사망했다. 그다음 날에 생존한 인원의 절반이, 그리고 그다음 날에 그 절반이 죽었다.

밀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공간에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을 밀어 넣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다.

며칠이 지나자 블랙홀의 바닥에는 시체가 썩으면서 흘러나온 오물과 산 자들이 배출한 오물이 강처럼 고였다. 오염으로 악명 높은 리던의 테임 강조차 그에 비하면 신의 축복을 받은 성수일 거라고 사람들은 자조했다.

블랙홀 주위로 악취가 진동하자, 인더스인 병사들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시체를 치우고 대소변을 받아 낼 항아리를 지급했다. 그러나 이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환경에다 빈약한 영양 상태,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병을 앓기 시작했다.

웃달라 태수는 이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 애초에 그가 잉그린트인들을 죽이지 않고 가두어 놓으라고 지시한 것은, 포로들을 이용해 인더스와의 협상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태수의 부하들은 그의 깊은 뜻을 짐작하지 못했다. 잉그린트인들을 증오하는 주군에게 과잉 충성한 나머지, 거의 테러에 가까운 짓을 자행했던 것이다. 실제로 잉그린트인들이 수감된 초반 3일, 블랙홀은 가스실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대경실색한 태수는 생존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고 급히 지시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에우로스를 포함한 열두 명의 생존자들은 원래 지내던 방에 비하면 훨씬 넓고 쾌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때 에우로스는 사경을 헤매는 중이었다. 열이 들끓어 전염병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인더스인들은 그를 시체 더미에 던져두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른 잉그린트인들이 반대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버리기에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그건 영웅 로버트 브루스 장군의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우로스는 살았다. 그리고 프시케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이름이 아직 사자들의 명단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명단에 누구도 추가되지 않기를 매일 기도했다.

“병원에는 의사가 있습니다.”

“병-원에-는 의사-가 있-습니다.”

프시케가 나타나자 닐은 공부를 하다 말고 밝게 웃었다. 프시케는 아이의 티 없이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잔잔히 물결치는 호수를 닮은, 바람에 밀려드는 수레국화 들판을 닮은 눈빛을 떠올렸다.

“오늘은……?”

알프레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프시케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총독 관저 앞에 내걸린 게시문을 확인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다행이군요, 부인.”

죽은 사람의 명단에 더해진 이름은 없다는 뜻이었다. 알프레드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명단에는 알프레드의 상관인 허버트 대위의 이름도 있었다. 어떻게든 한시바삐 고국으로 돌아가려 애쓰던 사람은 그토록 경멸하던 인더스인들에 의해 인더스 땅에 파묻혀 영원히 잉그린트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선생님도 이번에 잉그린트로 돌아가시나요?”

프시케의 물음에 알프레드는 웃었다. 불안과 체념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저는 군의관 신분이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치령에 남아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빠른 시일 내에 잉그린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 태반이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가장을 따라 인더스에 온 부인들과 아이들은 마땅히 기댈 곳이 없어졌고, 그러므로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곧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칼카트의 흙먼지처럼 붉게 떠돌았다.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 총독은 군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본국행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그렇군요.”

프시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군의관은 단숨에 핵심 인력이 된다. 사상자들을 얼마나 잘 분류하고 치료해 내느냐가 전력과 사기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부인께서도 이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프레드가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사태로 남편을 앞세운 코번트리 부인을 포함해 다수의 잉그린트인들이 부랴부랴 짐을 꾸려 떠났다. 그들에게 인더스는 남편과 아버지와 동료를 빼앗아 간 나라였고, 당장에라도 이 저주의 땅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영혼까지도 팔아 치울 기세였다.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코번트리 부인은 대귀족의 뺨을 때린 데 대한 사죄의 의미로 며칠 뒤 출항할 잉그린트행 배 승선권을 내밀며 프시케에게 함께 떠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박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무엘 또한 코번트리 부인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프시케가 한시라도 빨리 이 위험한 곳을 떠나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사무엘은 그 누구보다 바빴다. 생선튀김 때문에 불룩해졌던 복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새 옷에 먼지가 묻을까,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가 헝클어질까 노심초사했던 것도 고릿적 일이었다.

사무엘은 데본셔 공작가의 장남,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대리인 자격으로 수시로 총독을 만나 닦달하고, 리던으로 보낼 보고서를 사전 두께로 작성해 매일같이 배에 실어 보냈다. 잉그린트로 곧장 향하는 항로라면 상선과 어선, 여객선을 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꼬박꼬박 프시케를 방문했다. 사무엘은 그녀와 차를 나눠 마시고, 가끔은 식사를 하고,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가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면 프시케는 아마 진즉 쓰러졌을 거라고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이게 뭔가요?”

사무엘이 재킷의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프시케에게 내민 것은 어제저녁의 일이었다. 프시케는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를 벌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곳에서 가장 빨리 출항하는 배의 승선권입니다.”

“이걸 왜 주시는 거예요?”

프시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무엘은 이미 그녀의 대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간곡히 설득해 보기로 했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전쟁이라니요?

“제 생각이지만, 아마도 맞을 겁니다. 태수가 잉그린트인들을 가두어 놓고 죽였다는 건 명백히 전쟁의 명분이 되니까요. 정부에서 이 기회를 빌려 인더스에 집적대는 갈리아를 몰아내고 이곳을 장악하려고 할지도요.”

“그건 아직 가정일 뿐이잖아요.”

“그렇지요. 하지만 가능성이 꽤 큽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태수는 마음만 먹으면 또 군대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요. 다음에는 여인들도 끌고 갈 수도 있고요.”

그의 말을 듣자 프시케는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무엘의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사무엘은요?”

“이곳에 남아 있어야지요. 에우로스가 잘 버텨 주고 있는데 저만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에우로스의 친구니까요.”

그리고 연대보증인이기도 하고요. 사무엘은 실없이 농담하며 씩 웃었다.

“그렇다면 저도 가지 않겠어요.”

“부인.”

그러나 프시케의 대답에 사무엘은 곧바로 웃음을 지우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에우로스도 아마 그녀가 지금 당장 귀국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어떤 남자가 그러지 않겠는가.

“친구인 사무엘도 떠나지 않는데, 부인이 도망가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조심할게요.”

“…….”

사무엘은 난처해하면서도 더 이상 강권하지 않았다.

프시케의 쇠심줄 같은 고집에 대해서는 클라리사에게 그간 수없이 들었다. 클라리사도 꺾지 못한 것을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럼에도 사무엘은 엄숙하게 당부했다. 프시케가 잘못되면 에우로스도 잘못될 테니까, 에우로스를 다치지 않게 하려면 일단 프시케가 안전해야 했다.

“만일 전쟁이 터지면 무조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하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프시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나 에우로스를 두고 홀로 귀국할 마음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잘못된 선택은 한 번이면 족했다. 프레이아와 데본셔 공작에게 들은 말이 선택의 기폭제가 된 것은 맞지만, 사실은 비겁해서 그랬던 거였다. 에우로스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더 이상 그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무서워서.

“어디 아프십니까?”

프시케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알프레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홀로 책을 읽고 있던 닐이 말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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