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공동의 적
“어떻게 그런 일이!”
프레이아는 여느 하루와 마찬가지로 고든레녹스 총리와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음식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남편이 전한 인더스발 소식에 눈을 가늘게 떴다.
“프레이아.”
총리가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프레이아에게로 다가갔다.
요즘 고든레녹스 부부는 결혼한 이래 가장 화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외부의 적이 내부의 결속을 다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고든레녹스 가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부부가 적으로 삼은 자는 에우로스 캐번디시였다. 총리는 그를 경계했고, 총리부인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합심할 수 있었다.
총리는 제 안위를 위해, 총리부인은 가질 수 없다면 망가트리기 위해.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는 다가오는 시종들을 물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내의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말했다.
“확실한 건 언제 알 수 있어요?”
프레이아가 물었다. 총리는 대답 대신 미지근하게 웃었다.
오늘 조례는 여느 날과 달랐다. 칼카트 태수의 군대가 윌리엄 요새에 들이닥쳐 잉그린트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 가두었다는 소식이 조지 왕과 의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인더스로 군대를 보내시지요.”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데본셔 공작, 아레스 캐번디시였다. 장남인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그 수감자 중 하나였으므로 그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시간을 두고 태수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작의 말에 반기를 든 사람은 다름 아닌 고든레녹스 총리였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고, 굳이 추가로 파병하여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또,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해 준다면 제 안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 하나가 앓던 이 빠지듯 사라지게 될 테고.
“시간을 끌다가 갇혀 있는 사람들이 다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데본셔 공작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왕에게 고했다. 잉그린트어를 하지 못하는 조지 왕은 통역관의 말을 심드렁한 얼굴로 듣고 있는 중이었다.
“갇혀 있는 사람이 몇 명인가?”
통역관이 왕의 말을 대신해 물었다.
“태수가 군사를 일으킨 지 3주 조금 지났습니다. 그때 끌고 간 사람들이 백 명은 넘는다고 했고, 그다음 날 이미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밖에는…….”
칼카트항에서 리던까지 소식이 전달되는 데는, 최소 3주의 시간이 걸렸다. 즉, 최신 전갈이라고 해 봤자 3주 전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죽지? 그곳은 겨울이 없으니 얼어 죽을 일도 없을 텐데.”
왕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본셔 공작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차라리 프시케 스튜어트를 여왕으로 추대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저런 개소리는 듣고 있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그들이 갇힌 곳이 블랙홀이랍니다. 죄인 열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감옥이온데, 그곳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보면 밟혀서 죽기도 하고 질식해 죽기도 합니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왕에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에우로스 캐번디시도 살아남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럼 전원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말 아닌가?”
“그렇습니다. 이미 시일이 많이 흘러서, 그럴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왕의 질문에 총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혹시나 살아 있을 자국민들을 외면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데본셔 공작이 노기를 숨기지 못하고 총리의 말에 반박했다.
언젠가부터 총리가 사사건건 에우로스가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으려 드는 게 거슬렸으나 공작은 그간 개입하지 않았다. 에우로스 혼자서도 총리 하나쯤은 손쉽게 가지고 놀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군대를 보내 주십시오. 몇 명이 죽었든, 산 사람들은 구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에우로스가 감옥에 있는 지금, 발 벗고 나설 사람은 공작 본인밖에 없었다.
그와 에우로스는 부자 관계이기도 했지만, 정계와 재계를 아울러 공고한 동맹 관계이기도 했다. 아직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고작 사람 몇 명 살리자고 군대를 보내는 건 조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라리 사절을 꾸려 태수와 협상하게 하시지요.”
데본셔 공작을 비웃듯, 고든레녹스 총리가 왕에게 간언했다.
“협상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급하게 군대를 보내어 처리하셔야 합니다.”
프시케 스튜어트를 데이모스와 결혼시키라는 전대 여왕의 명령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애쓰진 않았다. 공작은 지금 이 수모를 반드시 다음번에 갚아 주겠다는 다짐을 뼈에 새기며 기다시피 왕의 앞으로 나아갔다.
“차라리 이번 기회를 이용하십시오, 전하.”
통역관의 말을 들은 조지 왕이 그제야 약간 동하는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이용이라니?”
“군대를 급파해 갇힌 자들을 구출하고, 동시에 태수를 치는 겁니다. 자치령에 함부로 군대를 끌고 들어온 것 자체가 이미 양국 평화 협정 내용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웃달라 태수의 뒷배는 갈리아입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서열을 정리하지 않으면 인더스를 갈리아에 뺏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호오.”
왕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구미를 당기게 만들었으니 쐐기를 박을 때였다.
“고국을 등지고 잉그린트에 납시어 이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국왕 폐하십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이 나라의 역사에 전하의 이름이 길이 남을 것입니다.”
데본셔 공작의 현란한 꼬드김에 조지 왕의 귀가 잠시 팔랑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입꼬리를 축 내리고 권태로운 표정을 지었다.
갇힌 자들의 생사야 갇히지 않은 왕이 알 바 아니었다. 업적을 세우는 것에 흥미가 돋기는 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전쟁에서 패할 경우 업적은커녕 과오가 되는 것이니 그것도 귀찮아진 것이다.
“이 일은 고든레녹스 총리와 데본셔 공작, 양당 대표가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시오.”
무성의한 명령을 내린 왕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떠나자 총리는 데본셔 공작과 마주 앉았다. 의회에서가 아닌, 왕궁의 밀실에서였다.
“국왕이 동의한 이후, 파병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고든레녹스 총리가 유들유들하게 물었다. 공작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어쨌든 지금 아쉬운 쪽은 총리가 아니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이후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시지요.”
“이의라니?”
“파병과 관련해 제가 결정하는 모든 사항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거야 총리의 결정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 아니오. 국법인데.”
“법과 국왕 위에 캐번디시가 있으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짧은 밀담 끝에 그들은 합의를 마쳤다. 결론만 보자면 총리가 공작의 말을 따른 셈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파병이 결정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고든레녹스 총리가 수를 조금 더 멀리 보았다.
지금쯤 데본셔 공작저에 전령 하나가 당도했을 것이고, 공작은 입에 거품을 물겠지. 총리는 크게 웃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프레이아의 물음에 총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파병에 동의했소.”
“네? 그게 정말이세요?”
“인더스에 대갚음해 주어야 하지 않겠소. 잉그린트의 명예를 위해서.”
프레이아의 한쪽 눈매가 의심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의 남편은 조국의 명예를 위해 그런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수면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나건 말건, 자신이 감상하는 물결만 잔잔하면 되는 자였다.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필요하다면.”
총리의 간결한 대답에 프레이아의 눈매에 한결 더 주름이 졌다. 파병과 선전포고야말로 일생을 안위 보장을 위해 할애해 온 고든레녹스 총리의 원칙에 가장 부합하지 않는 행위였다.
“각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그저 데본셔 공작의 애국심에 감복했을 뿐이오, 부인.”
총리는 프레이아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떼고, 제자리로 돌아가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다. 혼자만의 축배였다.
“데본셔 공작이 파병을 주장했고, 나는 끌려간 것뿐이지.”
“각하께서 공작의 말에 끌려갔다는 말을 저더러 믿으라는 말씀이신가요?”
“믿지 않으면 어쩌겠소?”
“…….”
“내일 신문에 기사가 날 거요. 이미 리던항으로 함대가 오고 있지. 곧 군인들을 태우고 인더스로 갈 배 말이오.”
“그렇군요.”
그때 프레이아의 뇌리에 번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총리가 숨긴 카드, 공작을 물 먹이고 에우로스도 함께 제거할 수 있는 조커.
“사령관은 누구죠?”
“클라이브 중령.”
“부사령관은요?”
프레이아의 질문에 고든레녹스 총리는 내심 감탄했다.
똑똑하기도 하지. 과연 누구보다 직관적이고 영리하지 않은가.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엮이지만 않았어도 흠 없이 완벽했을, 여자였다.
총리가 냅킨으로 입가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데이모스 캐번디시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