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우연의 연속
오늘은 테이블이 북적북적하겠구나.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으니 음식은 넉넉하게 차려야 할 것이다. 그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잔뜩 먹은 뒤에도 금세 배고프다고 징징거리곤 하니까.
닭고기에 향신료를 듬뿍 뿌려 바싹 구워 내면 정말 맛있겠지. 아이 셋이 오물거리는 걸 보기만 해도 배가 저절로 부를 것만 같다.
“클라리사.”
주방에서 흥얼거리던 클라리사의 등 뒤에서 별안간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 본 남자의 음성이었다.
알프레드 스노우 선생의 목소리는 저렇게 쾌활하지 않다. 아치볼드나 닐의 목소리도 저렇게 굵지 않다.
“클라리사.”
그나저나 집에 남자가 찾아오다니 별일이네. 그리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지?
클라리사는 닭고기에 향신료를 치덕치덕 바르다 말고 휙 돌아보았다.
“사무엘 스태포드…….”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신의 아들을 보는 심경이 이러할까. 클라리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끔벅하며 웅얼거렸다.
아주 가끔 사무엘 스태포드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렵고 깍쟁이 같은 에우로스와 달리 사무엘은 활달하고 격의 없는 성격이었다. 하녀로서는 당연히 후자 같은 성격이 더 대하기 편안한 법이었다.
내가 사무엘 스태포드를 많이 그리워했던가? 헛꿈을 꿀 정도로?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클라리사는 제 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꿈속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너무하네, 클라리사. 이제 귀족 이름을 막 부르기로 한 거야?”
사무엘이 싱글거리며 부엌 안쪽으로 들어와 클라리사의 앞에 섰다. 그제야 클라리사는 제 이름을 부른 남자가 헛꿈 속 환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스태포드 님! 진짜 스태포드 님 맞아요?”
클라리사가 손을 뻗었다. 사무엘은 움찔하더니 그녀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 좀 해 보려고 그래요.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요.”
클라리사가 용케 사무엘의 양 뺨을 꾸욱 잡았다.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의 손도 조몰락거렸다가, 어깨도 몇 번 쓰다듬었다가 했다.
“정말 맞네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무엘은 눈 따가운 향신료 냄새와 비린 닭고기 냄새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클라리사의 손에 잔뜩 묻은 노란색 가루 범벅을 보는 순간 바로 도망갔어야 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얼굴에 묻은 건 씻어 내면 되지만, 인더스에 오기 전 맞추었던 멋들어진 옷이 망가진 게 더 슬펐다.
작열하는 이국의 태양을 반사하기 위해 일부러 상아색 원단을 골라 재단한 옷이었다. 가뜩이나 배를 타고 오느라 복근이 부풀어 작아졌나 싶었는데, 이제는 변색 걱정까지 해야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래요!”
클라리사가 상심한 사무엘의 두 손을 꼭 잡고 주방 한편에 있는 의자로 데려갔다.
클라리사는 콧노래를 부르며 채소들을 옆으로 급하게 치우고는 대충 의자 위의 흙을 털어 냈다. 흙 묻은 채소들을 올려놓는 용도였는데, 오늘에야 제 쓰임을 하겠구나.
“여기 앉으세요.”
“아니야, 클라리사. 나는 서 있는 게 편해.”
“제가 불편해요. 귀족 나리가 서 계시면 저는 무릎을 꿇어야 하게요?”
사무엘은 아직도 흙이 점점이 붙어 있는 의자를 보며 기겁했다. 하지만 클라리사가 벙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권하자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의자 끝에 엉덩이를 아주 살짝만 대고 앉는 시늉을 했다. 힘을 빡 준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마님이 여기 계신 걸 알고 인더스에 오신 거예요?”
클라리사가 바깥을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아니, 아니야. 나도 몰랐어. 일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주인 나리는요?”
“인더스에 함께 왔지.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 나 혼자 확인차,”
그의 대답을 들은 클라리사의 안광이 번득였다.
사무엘은 에우로스의 부재에 다른 핑계를 댔어야 했나 후회했다. 심하게 아프다거나 뭐 그렇게 둘러댔으면 저렇게 눈이 찢어질 정도로 째려보지는 않을 텐데.
“마님이 여기 계시는데, 남편이 직접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냈단 말이에요?”
“오늘 정말 빠질 수 없는 약속이 있어서 그랬다니까. 내일 직접 가 보라고 했는데, 한시바삐 확인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어. 그래서 내가 먼저 온 거야.”
“……그래요?”
“이래 봬도 나도 정말 바쁘고 중요한 인물이야. 날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람은 클라리사밖에 없다고.”
아, 더비 백작부인도 있다. 아무래도 본인은 나이 든 여자들이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먹잇감인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클라리사. 자네 마님 좀 꼬드겨 줘.”
사무엘이 클라리사의 살진 옆구리를 콕, 찌르고는 의뭉을 떨며 말했다.
“꼬드기긴 뭘 꼬드겨요.”
“에우로스가, 자네 주인 나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애타게 부인을 찾았는지 알면 저절로 꼬드기고 싶어질걸.”
“정말이에요?”
클라리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던을 떠나올 적에 클라리사가 본 에우로스와 프시케는 데면데면하다 못해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정말이지. 정말이고말고.”
“그런데 왜 그러셨던 거예요? 좀 다정하게 대해 주시지 않고. 떠나고 나서 찾으면 무슨 소용이냔 말이에요. 귀족이나 평민이나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제멋대로 굴다가 나중에 후회하면 누가 반가워나 해 준대요?”
“아이, 사정이 있었어. 자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때도 에우로스가 자네 마님 구하느라 무진 고생했다고.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말이야.”
사무엘은 왜 자기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자기가 하녀에게 이렇게 변명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문득 의문스러워졌다.
이게 에우로스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전방에 총알받이로 내세운 뒤, 자신은 후방에 있다가 멋있게 나타나 성을 함락시키는 그런 구상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실은 말이죠.”
클라리사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수없이 말해 봤어요.”
“뭘?”
“돌아가자고요. 주인 나리랑 다시 잘해 보면 안 되냐고요. 인더스에서 죽을 때까지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갤러웨이 성도 언제까지 그렇게 주인 없이 굴러가서는 안 되는 거고요.”
“그런데?”
“그런데 그냥 싫다고만 해요. 모르셔서 그렇지, 우리 마님이 고집불통이거든요. 평소에는 그런 듯 아닌 듯 지내다가도 뭐 하나 마음먹으면 누구도 못 말려요. 아주 입을 꼭 다물고는 상대도 안 해 준다니까요.”
클라리사의 말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그와 동시에 메조포르테의 목소리가 포르티시모로 전환되었다. 귀가 왱왱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사무엘은 차라리 프시케와 이야기를 더 나눠 보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자들이 화를 낼 때는 그저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현명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되새기며 의자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세탁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클라리사, 바깥에 아이들은 누구야?”
“아이들이요? 아이고, 참. 식사 준비를 깜박했네요! 애들이 배고플 텐데.”
클라리사가 허겁지겁 손을 씻으며 대답했다.
“두 명은 코번트리 대위의 아이들이에요. 마님이…… 가르치는 제자들이죠.”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사무엘의 눈치를 살폈다. 프시케가 가정교사 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이름에 신분까지 바꿨다는 걸 알면 공작가가 뒤집어질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주인 나리가 이 사실을 알면, 마님을 받아 주실까? 잠적보다 이쪽이 더 걱정되기도 했다.
어느 귀부인이 귀족도 아닌 일개 군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한단 말인가. 품위를 깎아 먹다 못해 가루를 내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다른 아이는? 보아하니 인더스인인 것 같던데.”
사무엘은 부엌으로 들어오다가 지나치며 본 아이를 떠올렸다.
프시케가 가르치고 있다는 아이들은 전형적인 잉그린트인이었다. 고슬고슬 흘러내리는 흑갈색 머리카락에 혈관이 비쳐 보일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 지닌 아이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애매한 느낌이었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피부색을 한, 온통 백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낀 매우 이질적인 인종.
“아, 닐 말씀이시지요? 그 아이는 마님이 길에서 주워 와, 아니, 데려왔어요.”
“응? 길에서 주워 오, 아니, 데려오다니?”
“글쎄, 마님이랑 장을 보러 시장통에 나갔다가 말이죠. 웬 아이가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막 뛰어오더니 마님 드레스 속으로 숨어 버리지 뭐예요. 그때 포악하게 생긴 인더스 놈이 저어 멀리서 뛰어오는 거예요. 딱 봐도 그 아이를 쫓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래서 일단은 그놈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치료한 거예요.”
“저 아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부인은?”
“뭐어……. 불쌍해서 그렇겠죠. 원래부터 우리 마님은 그런 애들만 보면 지갑을 탈탈 털었어요. 백작님이 돌아가시고 빚더미에 앉았을 때도 구휼만큼은 신경을 썼답니다. 우리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꼭 그렇게 해야 하냐고 해도 조가비처럼 입술을 꼬옥 다물고는…….”
“클라리사.”
클라리사의 수다가 멈추었다. 프시케가 마침 부엌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일단 요리를 마저 할게요. 그, 스태포드 님과 말씀 나누세요.”
프시케의 굳은 얼굴을 본 클라리사는 우물쭈물하더니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나 뒤를 돌기 전, 사무엘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구 쏘아 대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무엘이 흙투성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연대보증인이었다. 이익도 함께, 손해도 함께 그리고 결국에는 책임도 함께 지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오늘 투자자들을 구슬린 재주를 백분 활용해 프시케를 협상 테이블로 인도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부인, 이야기를 좀…….”
그 말과 함께 사무엘의 시선이 프시케의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로 가 닿았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그만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네가 왜 이곳에 있지?”
사무엘의 얼굴을 확인한 파란 눈동자의 인더스인 아이가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프시케는 놀란 사무엘과 겁먹은 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이 아이를 아세요, 사무엘?”
“아, 네. 잠깐 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놈에게 된통 당했지요.”
“당하다니요?”
“별일 아닙니다. 이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그때 에우로스도 함께 있었는데, 하하. 우연이 겹치면 인연 아니겠습니까. 역시 에우로스와 부인께서는 사랑의 신이 선택해 맺어 준…….”
사무엘의 재주넘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누군가 방갈로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빠르고, 거칠고, 또 불규칙한 호흡과 같은 노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