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99)화 (99/146)

99. 닐

닐은 잉그린트인 아버지와 인더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잉그린트인도, 인더스인도 될 수 없었다.

잉그린트 사람인 아버지는 본국과 인더스를 오가던 선원이었다. 일부 선원들이 그렇듯, 닐의 아버지도 잉그린트에 두고 온 아내의 눈을 피해 인더스에 현지처를 두었다. 닐은 그와 현지처의 아들이었다.

닐의 어머니, 순다리는 단돈 몇 파운드에 잉그린트 선원에게 팔아넘겨진 여자였다. 그녀를 팔아넘긴 사람들은 가난에 찌든 순다리의 부모였다.

여자는 초경도 치르기 전인 열세 살의 나이에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이 든 잉그린트인과 살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거대한 몸을 받아 내야 했다.

잉그린트 사내는 1년에 두어 번 배를 타고 칼카트에 왔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순다리를 품에 가두고는 거칠고 우악스럽게 허리 짓을 했다.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남자는 그런 순다리의 모습을 보는 걸 무척 좋아했다.

순다리는 그가 마련해 준 남루한 집에 살았다. 집이라고 해 봤자 빛도 들지 않는 아주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벗어나 혼자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1년에 몇 차례 그녀를 찾아 한 달쯤 머물다 가는 것을 빼면, 순다리의 일상은 제법 평온했다. 잉그린트인이 적선하듯 던져 준 돈은 인더스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만큼은 되는 액수였다. 어느 날 아침, 그녀가 어지럼증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지럼증은 곧 구역감을 동반했다. 구역감으로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와중에도 배는 착실히 불러왔다.

몇 달이 지나, 잉그린트 선원이 오랜만에 그녀의 방에 찾아왔다. 순다리의 배가 제법 많이 부풀어 올랐을 때였다.

그는 몸이 변한 순다리를 보며 무지막지하게 화를 냈다. 뜨거운 바닷바람에 거칠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남자는 잉그린트어로 욕을 퍼부었다.

그녀는 어째서 남자가 화를 내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임신한 여자에게 어떻게 성욕을 느끼겠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그는 그대로 방문을 걷어차고 나가 버렸다. 그 후로 선원은 다시 순다리를 찾지 않았다.

인더스의 여자들이 대개 그렇듯 순다리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보통의 인더스인 아이들보다 피부색이 옅었다. 순다리는 그래서 좋았다.

인더스에서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대접받으니까. 창백한 피부색의 잉그린트 사람들처럼.

아이가 인더스인들과 다른 점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눈동자의 색깔이었다.

잉그린트 선원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를 본 순간, 순다리는 아이에게 닐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칼카트어로 ‘푸르다’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그러나 순다리의 바람과는 달리, 아이는 결코 대접받지 못했다. 슬프게도 더없이 천대받았다. 닐이 잉그린트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잉그린트인들에게는 납작 엎드리던 사람들이, 잉그린트인의 아들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이.

사람들은 부모에게서 팔아넘겨진 순다리와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닐을 경멸했다. 순다리를 팔아먹은 부모와 아들을 버린 잉그린트 선원을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다리와 닐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닐의 아버지가 떠난 뒤부터 순다리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기를 방 안에 두고 거리를 헤매야 했다.

잉그린트인과 붙어먹은 여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팔아야 했다. 처음에는 부모가, 나중에는 스스로가 순다리를 팔아넘기게 된 것이다.

비관의 시간은 금세 찾아왔다. 순다리의 몸도 마음도 순식간에 망가졌다.

밤일하는 여자들은 으레 아편을 태우곤 했다. 아편이라도 입에 물지 않으면 폭력에 가까운 행위들을 견디기가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칼카트는 아편 산지였다. 그만큼 아편을 구하기 쉬웠다.

하지만 순다리는 산지에 사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특산품을 손쉽게 얻어 내지 못했다. 본디 인간이란 쉬이 내어 주려던 것도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재보기 마련이니까.

그런 여자들의 삶이란 참으로 단순하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고, 몸을 팔기 위해 돈을 써야 했다. 그야말로 단조롭고, 또 비참한 인생이었다.

순다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편을 공급하던 사람은 점점 가격을 올리며 순다리를 애태웠다. 그래서 순다리는 닐에게 먹일 음식을 살 돈마저 헐어 비싼 아편을 샀다.

인더스 사람들은 윤회를 믿었다. 전생의 업도 믿었다. 인더스의 부모와 자식은 전생과 그 전생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질긴 인연으로부터 비롯된 관계라고 그들은 배웠다.

그 말은, 부모와 자식은 결국 동류라는 얘기였다. 동류에서 벗어나느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순다리는 그녀의 부모도 그랬던가 보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동류라고. 닮는다고. 그렇게 믿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아편 연기에 흐려진 눈을 감으며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곧 열 살이 되는 아들을 인신매매단에게 넘겼다. 아들을 팔고 순다리가 받은 것은 고작 아편 1온스였다.

순다리의 아들을 데려간 자는 처음으로 닐의 밝은 피부색과 파란 눈동자를 좋아해 준 사람이었다. 잉그린트의 성도착자들에게 먹힐 만한 외모였기 때문이었다.

닐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적당히 이국적이면서도 크게 거부감 들지 않을 법한 외양을 가진 아이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최악의 삶을 살게 되었다.

아니, 원래도 닐은 불행했다. 몸을 파는 어미를 둔 아이에게 과연 행복한 일이 있었겠는가.

늘 배가 고팠고, 자주 아팠던 어린 닐은 아편과 맞바꿔진 순간부터 변태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리고 더 깊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닐은 긍정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와 함께 지내는 다른 아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서서히, 혹은 급격하게 무너져 갔지만 닐은 달랐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있다. 닐에게도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아이들을 관리하던 자가 몇 명을 불러내 그의 앞에 세웠다. 그리고 큰 선심을 쓴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는 곧 잉그린트로 가서 멋진 신사들을 모시게 될 거다. 이건 정말 좋은 기회야.”

닐은 거드름을 피우는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관리자의 말마따나,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희망이 아이의 마음속으로부터 샘솟았다.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은 창문에 쇠기둥이 촘촘히 박혀 있고, 밖으로 나가는 문마다 사람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했다. 그러나 잉그린트로 가는 배를 타려면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고, 그때라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닐의 탈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손발이 꽁꽁 묶인 채 항구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밧줄로 결박한 손과 발에는 피가 잘 돌지 않았다. 이러다가 잉그린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팔다리를 잘라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가까스로 피워 올린 희망이 힘을 잃고 스러졌다.

그렇게 항구에 도착했다. 아이들을 감독하던 사람들은 출항 전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을 구석진 곳에 줄을 지워 세워 놓은 채 자리를 비웠다. 밧줄로 사지가 묶여 있으니 도망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닐은 땡볕 아래 주저앉아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묶인 손발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아이의 눈에 방금 배에서 내린 듯한 잉그린트인 두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닐은 잉그린트 남자들을 혐오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도 잉그린트인이었고, 자신의 몸을 탐하는 놈들도 잉그린트인이었다. 그들은 전부 다 괴물이었다.

그래서 닐은 그들이 제 앞을 지나갈 때 벌떡 일어나 발로 흙바닥을 마구 걷어찼다. 어차피 탈출도 할 수 없는데 이렇게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으아악!”

긴 갈색 머리의 잉그린트인이 눈을 감싸며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닐의 발에 맞아 튕겨 오른 작은 자갈과 흙이 눈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뭐야! 뭐야!”

갈색 머리 남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벽에 붙어 서 있는 아이들을 발견한 그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다가왔다.

“너희들이지?”

닐은 잉그린트 말을 배운 적이 없지만, 몇 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엇’, ‘너’와 같은 말은 손님들에게서 많이 들어 보았다. 물론 그 새끼들은 더러운 말들을 더 많이 하긴 했지만.

갈색 머리의 남자는 아이들을 죽 훑더니 표정에서부터 반항기가 넘쳐흐르는 닐의 앞에 와서 섰다. 화난 표정의 남자는 몇 마디 내뱉다 말고, 자신들의 손과 발에 밧줄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그의 뒤쪽에 눈부신 금발에 자신과 같은 파란 눈동자를 지닌 잘생긴 사람이 서 있었다.

인더스에는 천상의 미모를 지닌 사랑의 신 크리슈나가 있다. 아마 잉그린트에서는 저 남자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닐은 잠깐 생각했다.

잉그린트의 크리슈나가 닐의 앞으로 다가왔다. 닐은 눈을 치뜨고 크리슈나가 자신에게 내릴 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금발의 남자는 그의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닐을 돌려세우더니 웃옷을 걷어 올렸던 것이다.

이 새끼도 변태인가.

닐은 잠시나마 그 남자를 크리슈나라고 생각했던 자신을 저주했다. 아이가 이를 악물었다.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몸에 손이 닿는 것도 끔찍하기만 하다. 아주 가벼운 접촉에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닐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금발 남자는 다른 아이들의 옷도 일일이 걷어 살폈다. 저런 새끼들은 수없이 보았다. 아이들을 진열해 놓고 물건 고르듯 살핀 뒤 골라 데리고 가는 놈들.

닐은 남자가 자신의 앞으로 다시 다가온다면 반드시 그 잘난 콧날을 깨물어 주리라 다짐했다. 빙글거리거나 헉헉거리는 얼굴이라면 머리로 명치를 세게 들이받아 줄 계산까지 마쳤다.

그러나 닐의 예상과는 다르게 두 잉그린트인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린 뒤 곧 사라졌다. 잔뜩 날을 세웠던 닐은 허탈한 마음에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제 앞에 떨어트려 놓고 간 작은 단검이었다.

멀리서 크리슈나가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였는지, 닐은 그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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