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97)화 (97/146)

97. 새로운 만남

“저는 아마 스코틀린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클라리사가 큰 바구니를 한 번 추켜잡으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와 프시케는 일주일에 한 번 시장에 나가 직접 식재료를 고르고 생필품을 샀다.

코번트리 부인은 천한 인더스인들과 부대끼며 장을 보는 그들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시케는 험담과 비방으로 얼룩진 티 파티에 참석하는 것보다 활기찬 시장 거리를 걷는 것이 더 좋았다.

웃통을 드러낸 인더스인 인부들이 수레를 끌고 달릴 때마다 건조한 흙길 위로 붉은 먼지가 마구 피어올랐다. 그 먼지 사이에서 송아지의 것을 닮은, 순하고 똘망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걸 보고 있자면 소문도, 반역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시끌벅적한 세상 속 모든 것이 경이롭고 평화로웠다.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산 세월이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에요.”

클라리사는 샛노랗게 익은 망고를 신중히 고르며 말했다. 과일을 파는 인더스인 여자는 자신과 외양이 다른 프시케와 클라리사를 인더스 경전 속 신비한 동물 보듯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데본셔 공작저 주방에서 만드는 요리를 처음 봤을 때도 신기했는데,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요. 과일도 신선하고 달고, 향신료 종류도 많고…….”

프시케는 인더스에 온 뒤로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 클라리사가 새끼를 돌보는 어미 짐승처럼 이런저런 요리를 해다가 끊임없이 입으로 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잉그린트를 떠날 무렵 음식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말라 가던 모습이 눈에 밟혀서였다.

“그래도 가끔은 고향 음식을 먹고 싶을 때도 있어요. 돼지 넓적다리를 훈제해 매달아 놓고 그 아래에서 식사하는 꿈도 꿨답니다.”

클라리사는 그 말을 하며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인더스에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린 전통 요리인 하기스만 해도 돼지고기와 돼지 피를 넣어 만들지 않는가. 게다가 스코틀린 동부에서 가져오는 앵거스 쇠고기는 브라이튼을 통틀어 최고다.

프시케는 클라리사가 장바구니에 마구 쓸어 넣고 있던 망고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중 몇 개를 골라 덜어 냈다. 그리고 잘 익은 바나나 한 송이를 집어 든 후 값을 치르며 말했다.

“종교 때문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거야 그렇죠. 뭐, 우리도 사순 시기에는 고기를 먹지 않으니까, 그런 건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도 생선은 원 없이 먹을 수 있으니까 그건 참 좋아요. 스코틀린에서는 매번 말리거나 절인 생선만 먹었잖아요.”

클라리사는 과일이 가득 든 바구니를 품에 안은 채, 프시케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지나면 바로 항구가 있고, 그 주변에 그들이 자주 들르는 생선가게가 있었다.

“클라리사, 조심해!”

돌연 프시케가 비명을 질렀다. 바구니를 안고 있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클라리사는 앞에서 들이받는 충격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에서 놓쳐 버린 바구니가 땅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서 잘 익은 망고들이 퍽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들큰한 과일 향과 먼지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클라리사,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프시케는 사색이 되어 클라리사를 일으켰다.

뼈라도 부러지면 큰일이다. 알프레드가 보아주긴 하겠지만, 클라리사의 나이를 생각하면 회복 기간도 길고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클라리사는 과장되게 두 발을 구르고 팔을 툭툭 쳐 보이다가, 프시케의 뒤쪽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는 것을 본 프시케가 의아해하며 몸을 돌렸다.

“세상에, 이게 무슨!”

프시케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경악으로 몸을 굳히고 있을 때, 골목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인더스어를 쓰고 있어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말투가 상당히 거칠었다.

순간 프시케의 치맛자락이 홱 젖혀졌다. 클라리사와 프시케 둘 다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프시케의 드레스는 다시 제 모양을 찾았다. 골목을 돌아 한 남자가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험상궂게 생긴 인더스인이었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프시케와 클라리사를 빤히 쏘아보았다. 클라리사는 얼른 드레스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고 바구니를 주워 올렸다.

남자가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입을 닫았다. 인더스인들과 잉그린트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 같은 게 있었다. 그러므로 잉그린트 여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망설여졌을 것이다.

프시케는 머리에 쓴 보닛을 한 번 쓰다듬고는 턱 아래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드레스 속에서 파들파들 떠는 움직임이 고스란히 프시케에게 전달되었다. 그녀의 손도 따라서 떨리는 것 같아, 프시케는 끈을 묶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정신을 차린 클라리사가 그들 주위를 맴도는 남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잉그린트인들과 엮였을 때 손해를 보는 쪽은 그였다. 남자는 짜증 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후아아아! 그 사람 간 거죠, 아가씨?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더 확인할게요.”

클라리사는 남자가 사라진 골목 쪽으로 달려가 한참 동안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녀가 프시케의 치맛단을 조심스레 들쳐 올렸다.

“이런, 너 울고 있구나.”

프시케의 다리를 꼭 붙들고 있는 아이를 보며 클라리사가 혀를 쯧쯧 찼다.

그녀가 손을 뻗어 아이를 드레스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의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아가씨, 어쩌죠?”

클라리사가 당혹해하며 물었다. 프시케는 허리를 깊이 숙여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장 바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무구한 눈빛과는 달리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가 쉼 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넌 이름이 뭐야?”

아이의 눈동자는 새파란 색이었다. 인더스인들에게서 잘 볼 수 없는 홍채의 색깔에 프시케는 마음이 쿵 떨어졌다. 제 눈을 유심히 본다는 걸 알아챈 아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프시케는 아이의 얼굴에서 손을 떼어 내고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끅끅 울음만 토해 냈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나 봐요.”

“그렇겠구나, 참.”

프시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펴 작은 돌 하나를 주워 들었다.

“집, 집이 어디니?”

그녀는 돌로 흙바닥에 집 그림을 그렸다. 프시케와 클라리사가 지내고 있는 작은 방갈로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프시케의 손을 뚫어지게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유, 집이 없는 아이인가 봐요.”

클라리사가 측은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가 봐. 그러면 부모님도 없다는 말이겠지?”

“당연히 그렇겠죠. 쫓기고 있는 걸 봐서는, 부모가 팔아 치웠을 수도 있고요.”

“부모가 자식을 판다는 말이야?”

“그렇죠. 먹고 살기 힘들다고 그렇게 하는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갤러웨이 영지 부근에서 토탄 캐는 아이들 기억나시죠? 그 애들도 거의 다 팔려 온 거예요.”

“그렇구나.”

프시케는 우울해졌다. 아이의 헐벗은 몸은 앙상했다. 그녀가 여섯 살이었을 때, 꼭 이런 깡마른 아이의 등에 업혔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 아이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그의 몰골은 제 눈앞의 상처투성이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아이, 우리가 데려가자.”

“네에?”

프시케의 말에 클라리사의 눈은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는데 왜 데려간다는 말인가. 자칫하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일단 씻기고 뭐라도 먹여야 하지 않겠어? 치료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

“그걸 왜 우리가 해요. 어디 고아원 같은 곳에 데려다 놓으면 될 텐데요.”

“고아원에서 이 애를 잘 먹이고 치료해 줄 리 없잖아.”

“아니, 그래도, 애가 손버릇이 나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뭐라고 하긴. 릴리 스노우 선생이 인더스인 노예를 들였다고 하겠지.”

프시케가 슬프게 웃었다.

요즘 잉그린트인들 사이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인더스인들을 고용해 하인으로 삼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게 고용된 사람들은 하인이 아니라 노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진짜 노예 삼으실 거예요?”

클라리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이렇게 작고 마른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지. 그리고 우리 둘이 사는 집에 노예가 필요해?”

프시케가 빙긋 웃었다. 아직도 드레스 아래에 웅크려 있던 아이의 떨림이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차갑게 식은 손을 꼭꼭 주물렀다.

“아가씨, 이건 잘 생각해 봐야 해요. 아까 이 아이 쫓아왔던 남자도 있었잖아요. 잘못하다가는 범죄에 휘말릴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도 위험에 처한 아이를 모른 척할 수는 없어.”

클라리사는 오랜만에 프시케의 단호하고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마주했다. 이럴 때는 약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 클라리사.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프시케는 걸치고 있던 얇은 숄을 벗어 아이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에 그 남자를 다시 마주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이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러자 아이가 꼭 매달려 왔다.

“그래요, 아가씨. 일단 얼른 가서 뭐라도 좀 먹어요. 생선은 못 샀으니, 오늘은 망고로 마멀레이드를 만들어 망고를 찍어 먹으면 되겠네요. 망고 주스도 만들어 드릴게요.”

클라리사의 뚱한 말에 프시케가 웃음을 터트렸다.

“바나나도 있어, 클라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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