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인디아나
하르모니아 캐번디시 소공녀가 ‘조지 샌드’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소설 ‘인디아나’는 소위 대박을 쳤다. 그녀의 소설은 리던을 넘어 잉그린트 전역과 스코틀린에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고,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인디아나’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소설이었지만, 그만큼 작품에 대한 가혹한 비판들도 폭포처럼 쏟아졌다.
[조지 샌드, 결혼과 도덕의 가치를 흔드는 공공의 적]
[정숙한 여인들의 결혼을 의도적으로 반대하는 소설]
[여성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난잡한 쓰레기]
악평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백 개의 칭찬보다는 한두 개의 비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하르모니아 캐번디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몰리, 이제는 신문을 펼칠 때마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는 제 무릎 위에 작고 흰 강아지를 앉혀 놓은 채 중얼거렸다. 몰리는 그 소리에 잠깐 귀를 쫑긋했다가, 푸푸 소리를 내고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1)
“비평가들은 순수하게 쓴 글에 대해 순수하게 판단해 주지 않아.”
기죽은 하르모니아를 지켜보던 에우로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우로스야말로 리던 사교계를 통틀어 비난과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아 본 사람일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둘러싼 어떤 평가에도 무심했지만.
[사회적 인습에 대한 열렬한 도전]
[불행한 결혼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용기 있는 여주인공]
[인디아나, 그릇된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우다]
사무엘이 다른 신문을 펼쳐 들고는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인디아나’에 대한 찬사 일색인 비평이 실린 칼럼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의도를 가지고 쓴 소설은 아니었는데…….”
하르모니아는 그의 낭독을 들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꼬물거리는 그녀의 손가락 때문에 몰리는 간지러워 몸을 부르르 털어 내다 카펫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비평가들은 순수하게 쓴 글에 대해 순수하게 판단해 주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녀의 말에 에우로스가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말했다.
“어찌 되었든 좋은 게 좋은 거지. 호평만 들여다봐도 모자랄 시간에 굳이 혹평에 마음 쓸 것 있어?”
사무엘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긍정적인 사상의 소유자.
“곧 약혼인데, 날마다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에우로스가 버석해진 하르모니아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데본셔 공작은 지난여름, 하르모니아의 결혼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태번에 방문했다. 공작가와 태번 왕가 사이의 공고한 결합을 재차 확인하고, 기타 자잘한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르모니아와 약혼하게 될 카드모스 왕자는, 왕위를 이어받을 장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작의 말에 따르면 수완이 좋고 남자다운 성격이라고 했다.
남자가 남자를 평가할 때 ‘남자다운 성격’이라고 하는 경우, 여자들의 입장에서 그리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걸 하르모니아는 알고 있었다. 그건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들면서 체득한 사실이었다.
“그까짓 약혼이 뭐라고.”
그래서 하르모니아의 마음은 어수선했다. 그녀는 소공녀로 태어나 길러지면서 당연히 가문의 이해에 따르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자기만의 생각을 하고, 자기만의 글을 쓰게 되면서 하르모니아는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졌다.
소설의 여주인공 인디아나는 그녀를 족쇄처럼 옭아매는 약혼자에게서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레이몬드와의 짧은 열정에 좌절하고, 종래에는 제 옆을 지켜 준 레이프와 진정한 사랑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의외였어, 하르모니아.”
에우로스가 읽던 신문을 반듯하게 접으며 말을 꺼냈다.
“뭐가?”
“원래는 레이프가 그저 조연일 뿐이었다면서.”
“맞아, 그랬어.”
하르모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정도 바꾸고 싶지 않아 했잖아.”
“응.”
“그런데 왜 수정한 거야?”
“그건 프시케가,”
하르모니아가 대답하다 말고 에우로스의 눈치를 보며 입을 꼭 닫았다. 순식간에 응접실에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프시케가 사라진 지도. 그동안 그들은 그녀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실수로 프시케의 이름이 대화에 오르내릴 때마다 에우로스가 냉기를 폴폴 풍겼기 때문이었다. 웬만해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더비 백작부인마저도 이제 그 이야기만큼은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약혼 준비는 잘되어 가?”
사무엘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나는 잘 몰라.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니까. 듣기로는 결혼이 성사되면 태번 내에서 사업을 하는 게 좀 더 수월해질 거라고 했어.”
“그렇구나.”
하르모니아의 대답에 사무엘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름지기 소공녀의 결혼이란 그런 것일 테다. 재물과 명예를 나누고 덧붙여 서로의 이익을 불리는 것. 공작가에 비하면 한참 계급이 낮은 남작가의 결혼도 그럴진대, 그녀의 결혼은 오죽할까.
“아버지가 이번에 다녀오시면서 목걸이를 받아 오셨어. 약혼 선물이라고 하시더라. 이름도 있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그래?”
“황금이랑 보석은 아낌없이 썼더라고. 그런데 모양이 좀 별로야.”
“어떤데?”
“뱀 두 마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뭐, 독특하겠는데? 여자들이 착용하는 목걸이치고는 꽤 과격한 모양인 것 같기는 하지만.”
사무엘이 키득거렸다.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준다는 태번 왕가의 보물이래.”
“그럼 좋은 거 아니야?”
하르모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영원히 젊을 수 없어. 영원히 아름다울 수도 없고. 고작 목걸이 하나에 그런 의미까지 부여하는 게 불편해.”
어째서 자꾸만 불편한 것들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하르모니아는 요즘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세상의 질서와 규범들이 얼마 전부터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고귀하고 예쁘게 자라서 결혼하는 것은 운명의 신이 그녀에게 준 숙제였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글을 쓸수록, 그 숙제가 부당하다고 느꼈다. 운명의 주인은 따로 있고, 자신은 그저 실을 매단 인형처럼 움직여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최대한 좋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잖아. 젊고 예쁜 건 누구나 욕망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저 뜻이 좋은 물건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편할 텐데.”
사무엘이 말했다.
그는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불가능한 일에 만용을 부리지 않는 사람 말이다.
“왜 그렇게 말해?”
하르모니아의 말투가 뾰족해졌다. 이상하게도 사무엘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조금은 화가 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
“뭐가?”
사무엘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했다. 그 이상 더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무엘도 레이프가 좋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인디아나 말이야. 그녀를 구속하는 남편을 떠나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그건 그랬지.”
“그런데 왜 나에게는 델먼을 택하라고 해?”
사무엘은 말을 잃고 눈만 끔뻑거렸다. 그건 소설이니까. 소설에서는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해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으니까.
“현실과 소설은 다른 법이잖아, 하르모니아.”
2)
“사무엘, 인생을 닮은 소설보다 소설을 닮은 인생이 더 흔해.”
사무엘은 꼼지락거리는 하르모니아의 손가락을 한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소설을 닮은 인생이라니, 그거야말로 소설이다.”
사무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소설과 달리 인생에서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겨야 할 때가 있다고.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라고.
하르모니아와 프레데릭의 사연을 그는 알고 있다. 현실을 외면한 채 키운 마음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도 알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밀어붙인 마음 표면에는 결국 지독한 흉터가 남게 된다.
무엇보다 사무엘은 하르모니아의 결혼에 모래알만큼의 잡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우로스와 함께 알아본 바로는, 태번의 왕자 카드모스는 잘난 척이 심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격이라고 했다.
잉그린트보다도 여권이 낮은 나라가 태번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무엘도, 에우로스도, 하르모니아의 남편 될 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자의 아내가 될 하르모니아가 안쓰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귀족의 결혼이라는 건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에 든다면 행운이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불운은 아니라는 뜻이다.
에우로스는 결혼하기 전까지 귀족이 아니었다. 설령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관습에 그리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프시케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럼에도 귀족이었다. 하르모니아에 대한 마음만으로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그는 믿었다.
“하르모니아 너도 그럼 레이프를 선택해.”
에우로스가 시가를 물며 무심하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인디아나에겐 레이프가 있지만 나에겐 아무도 없어.”
하르모니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있을지도 모르지.”
비스듬히 기운 에우로스의 입술 사이로 시가 연기가 환상처럼 그 말과 함께 퍼져 나갔다.
1) 조르주 상드 《앵디아나》 서문 내용 일부 수정 인용.
2) 조르주 상드의 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