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94)화 (94/146)

94. 커피 스푼으로 되질한 인생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따뜻한 날씨 속에서 보내는 건 정말 신기한 경험인 것 같아.”

프시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유, 그동안 몸이 다 익어 버리는 것 같더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클라리사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처음 인더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관절통이 완화되는 것 같아 좋았는데, 한두 달 지난 다음부터는 매일매일이 찜통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 때문에 그녀는 영 맥을 추지 못했었다.

프시케와 클라리사는 고용주인 코번트리 대위 소유의 방갈로에서 지냈다. 클라리사는 이국의 풀과 나무들을 키우는 데 재미가 붙어, 베란다에 키가 크고 잎이 넓은 식물들을 많이 가져다 놓았다.

뜨거운 태양과 쏟아지는 폭우를 양분 삼아 식물들은 쑥쑥 컸다. 쌉싸래하고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는 초록 잎사귀들 틈에서 차를 마시는 것이 프시케와 클라리사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다.

프시케는 불그스름한 찻물에 우유를 몇 방울 떨어트렸다. 차에 우유를 넣을지, 우유에 차를 넣을지 이야기하던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산지에서 마시는 차맛은 정말 일품이에요. 알프레드 선생님은 커피를 더 즐기시지만요.”

클라리사가 알프레드를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알프레드가 갑자기 방문하는 바람에 그녀는 손님에게 제 자리를 양보하고 티 테이블 한구석으로 밀려난 참이었다.

“이번 연휴에는 무얼 하며 보내실 건가요?”

프시케가 맞은편에 앉은 알프레드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알프레드는 생각에 잠긴 채, 커피 스푼으로 잔에 담긴 커피를 몇 번 담아 올렸다가 따라 버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생님!”

클라리사가 알프레드 쪽으로 몸을 구부리며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예?”

“선생님, 세 살 먹은 애들이나 할 법할 장난을 치고 계시네요.”

알프레드가 클라리사와 제 손을 몇 번 번갈아 보고는 급히 헛기침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인정받는 군의관이었고 촉망받는 연구가였다.

그러나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 앞에서는 자꾸 이렇게 멍청하게 굴게 되었다. 뒤숭숭하게 얽히고설킨 머릿속처럼 행동도 자꾸 엉기는 것이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 그런 건 아닙니다.”

프시케의 물음에 알프레드는 귀가 새빨개진 채 허둥지둥 대답했다.

“저, 혹시 제게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알프레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클라리사가 허, 하고 웃으며 프시케 대신 말을 전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랑 새해 연휴 말이에요. 무슨 계획이 있으신지 릴리 아가씨께서 물어보시잖아요.”

그는 손에 쥔 커피 스푼을 내려다보며,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했던 생각을 꺼내 놓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계속 고민하던 중이었다. 가볍게 말하면 될 일인데도, 고민을 거듭할수록 자꾸 말이 무거워져 목구멍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선생님, 오늘따라 더 이상하시네요.”

클라리사가 눈매를 찡그리며 타박했다.

그녀의 눈에 알프레드는 참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사내다운 면모라고는 전혀 없는 샌님이었다. 툭하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대화를 잘라먹고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행인 점도 있었다. 프시케가 저 남자에게 반할 일은 없을 테니까.

“클라리사.”

프시케는 조용히 그녀에게 주의를 주고는, 알프레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를 보는 프시케의 심경은 꽤나 복잡했다.

프시케가 인더스에 파견된 잉그린트 육군 대위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최근 인더스에는 가족 단위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는데, 잉그린트 자치령이 생기면서 치안과 경제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대위의 아내인 코번트리 부인은 남편을 따라 마지못해 이곳으로 온 경우였다. 그녀는 향수병을 핑계로 수시로 자리보전하기 일쑤였고, 늘 신경증을 호소했다.

코번트리 부인이 즐거워하는 시간은, 할 일 없는 다른 부인들을 불러다 티 타임을 가지거나 파티를 열 때뿐이었다. 프시케도 가끔 그녀의 티 타임에 초대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부인들은 프시케와 알프레드 사이를 입에 올리며 차와 함께 삼키는 디저트로 삼곤 했다.

“스노우 선생님, 군의관과 사촌지간이라고 하셨죠?”

코번트리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네.”

프시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코번트리 부인과 다른 여자들이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그녀는 벌써 피곤해졌다.

“정말 사촌일 뿐이에요?”

“네.”

“그래도 사이가 각별하니 이곳까지 함께 온 것 아니에요?”

조금 먼 곳에 떨어져 앉아 있던 여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시기가 맞았던 것뿐이에요.”

프시케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던지, 코번트리 부인이 다시 질문했다.

“그 군의관 선생은 그런 것 같지 않던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말 그대로예요. 선생님만 보면 어쩔 줄 몰라 하는걸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코번트리 부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부인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타지에서 살다 보니 노상 우리끼리 수다나 떠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잖아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누가 누구랑 몰래 만난다더라, 그런 얘기들뿐이죠. 요즘 칼카트 부인들 입에 제일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선생님과 그 군의관이에요.”

그녀의 말에 프시케는 어색하게 웃었다. 손에 든 찻잔이 무거워 당장이라도 내려놓고 싶었다.

프시케를 둘러싼 소문은 리던에 살 때도 많았다. 그러나 많이 겪었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불편했고, 여전히 불쾌했다.

“사촌끼리 결혼하는 일이야 흔하잖아요. 여자는 그저 자기 좋다는 남자 만나 결혼해야 인생이 순탄해요. 그 군의관 선생은 미래도 창창하고, 착하고, 한눈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던데, 잘해 봐요.”

이럴까 봐 코번트리 부인이 초대하는 티 파티에는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칼카트 사회는 리던 사교계의 축소판이었다. 규모가 작으니 소문의 수는 적었지만, 대신 집요했다.

“저기, 음, 릴리.”

알프레드는 커피 스푼을 쥔 손에 힘을 한 번 주었다. 그리고 프시케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그녀는 코번트리 부인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새해에 총독저에서 하는 파티가 있습니다.”

“파티요? 무슨 파티인데요? 큰 파티인가요? 누가 오나요?”

알프레드의 말에 클라리사가 냉큼 끼어들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의 질문에 차근차근 답변해 주었다.

“새해를 축하하는 파티로 알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연중 가장 큰 행사라고 하더군요. 군인들이 가장 많이 참석하고, 사업가들도 꽤 온다고 합니다. 이 지역 태수와 유지들도 특별히 초대받았다고 해요.”

“태수라면, 인더스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잉그린트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관계 개선을 위해 총독 각하께서 일부러 초대했다고 하더군요.”

칼카트 지역의 태수인 웃달라는 잉그린트인들이 인더스에 진출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자였다. 그들이 자행하는 밀무역이 인더스 경제를 망가트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는 노예무역도 문제였다.

잉그린트 사람들의 거만한 태도도 태수의 반감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인더스인들을 미개한 종족 보듯 대하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파티 얘기는 왜 꺼내신 거예요?”

클라리사가 찻물을 호로록 들이켜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알프레드는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다.

“릴리, 그 파티에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1분 동안의 망설임이 끝나고, 알프레드가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그 용기에 클라리사는 들이키던 찻물을 도로 뱉어 낼 뻔했다.

알프레드가 프시케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뭘 어쨌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얼굴이 빨개지고, 머뭇거리고, 고개를 숙이고, 옷에 신경을 쓰고, 뭐 그런 수줍은 행동들이 다였다.

차라리 고백을 했다면 자신이 대신 나서서 딱 잘랐을 텐데.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맴돌기만 하니 먼저 거절할 수도 없고 마음만 잔뜩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번에는 웬일로 파티에 함께 가자고 청했을까. 아까 커피 스푼을 들고 넋이 나가 있었던 것도 다 저것 때문이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저치가 프시케를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프시케는 유부녀가 아닌가. 물론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지만, 어쨌든 남편이 있는 정숙한 귀부인을 마음에 품으면 안 되는 거다.

“저기!”

클라리사가 프시케 대신 거절의 말을 외치려 할 때였다.

“죄송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부담스러워서요. 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싶어요.”

프시케의 친절한 거절에 알프레드는 이내 수긍했다. 이미 예상했던 답이었다. 운명은 서로 어긋나고, 계획은 무너지기 마련이며, 늘 결과가 좋으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1)

애당초 캐번디시 부인에게 품은 연정 자체가 그릇된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나서겠는가. 어떻게 시작하겠는가.

2)

그럼에도 고백하고 싶을 때가 있기도 했다. 받아 주느냐, 마느냐는 캐번디시 부인이 결정할 일이었지만, 고백하느냐, 마느냐는 저 스스로 고민한 뒤 실행하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그 고민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데 있었다.

3)

커피 스푼으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단조롭고 사소하기 짝이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 소심하여 여전히 커피 스푼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알프레드는 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하며 살아왔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3막 2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

2)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

3)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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