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93)화 (93/146)

93. 절실한 일

에우로스가 데본셔 공작을 통해 발의한 인더스산 면직물 수입 금지 법안은 의회에서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법안 내용을 적당히 수정하고 몇몇 인사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인 덕이었다. 이를 확정해 공표하는 고든레녹스 총리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에우로스는 황금화살 클럽에서 그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전달받았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샴페인이라도 마실까?”

“…….”

사무엘이 물었지만 에우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케이스에서 시가 하나를 집어 올려 커터로 기술 좋게 끝을 잘라 냈다.

“그놈의 시가 좀 그만 피워. 내실에 들어올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사무엘이 투덜거렸다.

“그럼 들어오지 마.”

에우로스가 시가 연기를 아주 깊게 빨았다가 내뱉었다. 사무엘은 그 꼴을 보며 인상을 잔뜩 썼다.

에우로스는 제법 머리가 커졌을 때부터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시가를 꺼내 살펴본 다음 향기를 맡고, 완벽하고 깔끔하게 끝을 잘라 내어 불을 붙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즐겼다.

에우로스가 가볍게 연기를 마셨다가 퍼트릴 때면, 마치 추운 겨울에 흰 숨을 토해 내는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마저 있었다. 기가 막힌 광경임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래서 사무엘도 한때 그 모습에 홀려 몇 모금 피워 본 적이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 다시는 도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저와 다르게 에우로스는 시가와 참 잘 어울렸다. 산뜻하고 여유로이 즐기는 취미 같은 느낌이었달까.

취미란 자고로 행하며 즐거워야 한다. 그러나 요즘 에우로스는 어떠한가.

그에게 시가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었다.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절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에우로스는 본디 절실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어릴 적, 에우로스는 공부도, 운동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더 커서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든 일에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몰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사생아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그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서 에우로스를 지켜본 사무엘은 그에게 어떠한 간절함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에우로스는 절박하지 않았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대여섯 살쯤이었나, 사무엘과 에우로스가 겨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데본셔 영지의 들판을 가로질러 한참 동안 말을 달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지친 말의 목을 축여 주느라 그들은 작은 개울 앞에서 잠시 쉬었다.

싸한 냉기만 품어 내던 놈이었는데, 오래 말을 탔기 때문이었는지 그때의 에우로스는 어쩐지 뜨거워 보였다. 붉어진 얼굴, 이마와 목 뒷덜미에 맺힌 땀,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보자 사무엘은 뜬금없이 그가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흰 조각상이 갑자기 붉어지고 땀 흘리며 숨 쉬는 사람처럼 변한 것 같아 그랬던 것 같다. 피그말리온의 심정이 그와 비슷할까.

그래서 사무엘은 덩달아 상기된 얼굴로 일방적 친구가 된 에우로스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에우로스, 너는 꿈이 뭐야?”

“글쎄.”

“이루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없어.”

그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무성의한 대답만을 들려주었다. 그것도 매우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통 우리 나이 또래 소년들은 가슴속에 작지만 웅장한 꿈 하나 정도는 품고 살지 않나?

사무엘은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아직 그들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건 아니었으므로, 에우로스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제멋대로 결론을 냈다. 그래서 또 입을 열었다.

“내가 너라면 공작님께 입적을 졸라 볼 텐데. 공작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잖아.”

그 말은 사무엘의 부친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데본셔 공작은 그때부터 그의 가신들이나 친척, 친구들에게 이따금씩 에우로스의 이야기를 짧게 흘리곤 했다.

그저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놓고 사생아를 칭찬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작이 남을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그의 의중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딴 거 필요 없어.”

“입적되면 공작위는 아니더라도 다른 작위를 승계할 수도 있어.”

“귀찮아.”

“그리고 입적되면 상속권도 생기잖아.”

“돈은 내 힘으로 벌면 돼.”

그래, 대단한 자신감이다. 사무엘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적어도 사생아의 반란, 왕자의 난, 흑막의 음모, 그런 건 일어나지 않겠군.

“그럼, 돈 많은 집 영애와 결혼할 생각은 없어?”

“결혼?”

에우로스가 기막힌 표정으로 되물었다. 따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사무엘은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니, 뭐, 너 정도 얼굴이면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많을 거 아니야. 지참금 두둑이 들고 오면 너도 좋고, 잘생긴 남자랑 결혼하는 그 여자도 좋고.”

남자들의 대화에 이런 화제는 빠트릴 수 없는 법이다. 모든 대화는 돌고 돌아 결국 여자 얘기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또, 꼭 작위와 재산만이 꿈이 되는 건 아니잖아. 사랑하는 여자랑 만나서 진하게 연애하다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좋은 가정도 꾸리고. 그런 게 꿈일 수도 있지.”

“너는 그게 꿈이냐?”

사무엘의 말을 들은 에우로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응. 나는 그래 봤자 셋째 아들이라, 물려받을 작위도 없고, 재산도 별로 없어. 그러니까 이런 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사무엘이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뭐, 꼭 작위나 재산이 아니더라도,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그런 걸 꿈꾸기는 했다.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하얗고 작은 강아지도…….

“난 결혼 안 해.”

에우로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보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결혼을 안 한다고? 왜?”

“관심 없어.”

“그럼 연애는? 여자는?”

“그것도.”

그게 말이 되나? 사무엘은 요즘 영애들이 지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는 눈 때문에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사내의 본능 아닌가? 이제 우리도 어엿한 사내, 가 되기 직전인데.

“공작저에 자주 놀러 오는 스펜서 영애 말이야. 프레이아 스펜서.”

“…….”

“예쁘지 않아?”

“별로.”

“안 예쁘다고?”

“그런 여자, 질색이야.”

사무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놈, 혹시…….

프레이아 스펜서는 잉그린트 귀족 소년들의 우상이었다. 불타는 듯 새빨간 머리카락,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곱고 매끄러운 입매, 도도한 자태. 그런 여자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그건 남자도 아니다.

“에우로스, 너 말이야.”

“…….”

“남자 좋아해?”

사무엘은 살짝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 그들 사이의 간격을 벌리며 물었다. 성적 취향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에우로스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이놈은 웬만한 여자보다 훨씬 예쁘게 생기긴 했다. 예쁘긴 하지. 예쁜 것은 사실이다. 사무엘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며 에우로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친놈인가.”

에우로스가 그런 사무엘에게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뱉었다. 뱉은 건 말인데, 꼭 얼굴에 침을 맞은 것 같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야단이야.

그들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려던 찰나, 사무엘이 다시 질문했다.

“꿈도 없는데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내가 뭘 열심히 하는데?”

“수업도 열심히 듣고, 운동도 열심히 하잖아. 사실 난 너 따라가는 게 너무 버거워.”

에우로스가 아까에 이어 또다시 피식 웃었다. 괜한 고백이었다. 뒷말은 하지 말 것을. 사무엘은 조금 후회하며, 하던 말을 마저 했다.

“열심히 한다는 건 이루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것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공작님이 하라니까 하는 거지.”

“그건 나랑 똑같다. 나도 우리 아버지가 너랑 공부하라고 해서 하는 거잖아.”

사무엘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란 모름지기 동질감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들의 횡포와 압제를 이기지 못해 공부와 운동에 시달리는 아들들인 것이다.

“그거랑 달라.”

그러나 어렵사리 발견한 동질감을 에우로스는 단칼에 부정했다.

“뭐가 다른데?”

“공작님이 하라고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안 했을 거야.”

“공작님이 야단치셔도?”

“그러든가 말든가.”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그때부터 사무엘은 에우로스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꿈도, 목표도 없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간절하거나 절박하지 않은 소년. 공작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소년.

그래서 에우로스에게는 공부도, 운동도, 사업도 산뜻하고 여유로운 취미 활동이었다. 몰두하고 집중했지만, 그건 어떤 결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취미 활동의 수준과 능력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보는 게 타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가 또한 그에게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취미였을 뿐이었다. 각성을 위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순간적으로 많은 양을 피워 댈 때는 있었지만, 절실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저렇게 뺨이 홀쭉해지도록 연기를 빨아 대는 시가 흡연은 절대 취미 따위로 볼 수 없다. 사무엘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프시케 캐번디시가 떠나고 몇 달쯤 지나, 브라이튼 전역에 그녀의 드레스 천 한 자락 본 이가 없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을 때부터 에우로스는 시가에 중독되었고 마침내 절실해졌다.

사무엘은 알고 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이 고작 시가 따위가 아니라 프시케 캐번디시라는 사실쯤은.

그건 에우로스 주변에 있는 누구라도 알았다. 하르모니아도, 더비 백작부인도, 심지어는 데본셔 공작 내외까지도 말이다.

“다음 달에 출장 예정이야. 자네도 준비해.”

에우로스가 시가의 불을 끄며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출장이라니?”

“법안이 통과되었잖아. 이제 일을 해야지.”

출장은 질색인데. 사무엘은 마지못해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에우로스가 툭 대답했다.

“인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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