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시간이 지난 뒤
프로센의 왕 조지 하노버가 마침내 잉그린트의 수도 리던에 도착했다. 앤 스튜어트 여왕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지난 후였다.
조지 하노버는 앤 여왕의 고조부의 딸의 외손자였다. 한마디로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정통성만 놓고 따지자면 갤러웨이의 스튜어트 가문의 유일한 후계, 프시케 스튜어트가 왕위를 잇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왕의 직계 후손, 혹은 아주 가까운 방계 후손이 아니라 조지 하노버와 프시케 스튜어트 둘만을 놓고 저울질했을 때 사정은 달라졌다. 그 저울에 올라간 것에는 정통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적 이권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잉그린트의 왕은 스코틀린과 전 세계의 식민지들을 통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왕의 후계자가 부재할 시, 차기 왕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가문의 정통성이 아니라 잉그린트 각료들과 각 지역 총독들의 인정이었다.
프시케 스튜어트가 여왕이 될 경우, 잉그린트 귀족들은 당장 스코틀린 세력이 불어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다. 안 그래도 반란이다, 반역이다 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뻥뻥 터지는 곳이 스코틀린이었다. 그 와중에 프시케 스튜어트가 권력을 잡으면 잉그린트와 스코틀린의 관계가 역전되어 버릴지도 몰랐다.
조지 하노버가 왕이 된다면, 적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잉그린트 정치에 큰 관심도 없고, 언어를 배울 의지마저 없는, 늙고 게으른 외국인이 왕이 된다면 잉그린트 각료들의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든레녹스 총리와 대귀족들, 기타 등등의 잉그린트인들은 프로센 사람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프시케 스튜어트는 프시케 캐번디시가 되었고, 지금은 릴리 스노우가 되어 브라이튼 섬에서 내쳐졌다. 그리고 조지 하노버는 리던 대성당의 높고 높은 돔 아래에서 여왕이 물려준 왕관을 쓰고 보주와 홀을 든 채, 왕좌에 앉았다.
노쇠한 그는 습하고 뼛골 시린 잉그린트 겨울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대관식 내내 코를 훌쩍이고 재채기를 해 댔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은 벌써부터 왕위 계승 서열을 따져 보며, 누구 앞에 줄을 서야 할지를 계산했다.
줄의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 총리이자 진보당의 당수, 그리고 아레스 캐번디시 데본셔 공작이자 보수당의 당수였다.
고든레녹스 총리는 내각의 꼭대기에 있었으나 지지 기반이 약했다. 가문이 별 볼 일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골의 한미한 귀족 출신이었고,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실무에는 약했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여왕 바로 아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데본셔 공작은 내각의 꼭대기에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지지 기반이 탄탄했다. 대단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출신을 극복할 필요도 없었다. 거만한 성격 탓에 정치적 능력은 별로 없었으나 실무는 나쁘지 않게 했다. 그의 사생아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캐번디시였으므로 언제나 여왕의 위에 있었다.
최근 잉그린트 의회를 들썩이게 한 쟁점은 인더스산 면직물 수입 금지에 관한 법안 통과 여부였다. 대놓고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견제하는 총리와 대놓고 제 아들을 지지하는 공작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그 둘의 싸움이 당파 갈등으로 이어졌다.
에우로스는 데본셔 공작 가문의 직물 회사를 수십 배 규모로 키워 냈다. 적시에 인더스산 직물을 수입해 팔아 치운 결과였다.
그의 성공이 다른 사업가들을 자극했고 면직물 수입량은 팽창했다. 이제 브라이튼에서 면직물을 입고 쓰지 않는 가정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면직물의 수입으로 모직물 산업이 쇠퇴하자 급속도로 실업자 수가 증가했다. 그래서 빈민 구제 비용이 늘고, 그것 때문에 세금이 증가한다는 것이 고든레녹스 총리가 속한 진보당의 지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더스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에우로스는 실소했다. 고든레녹스 총리는 언젠가부터, 정확히는 프시케가 사라진 그즈음부터 끊임없이 그의 사업을 훼방 놓기 시작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더 크게 자라기 전에 싹을 밟아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면직물 수입 금지 주장도 그런 이유였다. 그렇지만 정작 총리 관저 내부는 오색빛깔 인더스산 직물로 뒤덮여 있다는 뒷이야기로 유명했다.
당연히 그런 치사한 공격을 에우로스가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이번에 그 법안이 통과되면 타격이 크지 않을까?”
“통과될 리가.”
사무엘이 미리 입수한 법안 발의문을 훑으며 걱정했다. 그러자 에우로스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박에 대답했다.
“고든레녹스 총리가 이번에는 이를 갈고 있을 거야. 지난 회기 때 한 번 부결되었던 걸 대거 보완해서 다시 들고나왔잖아.”
면직물 수입 금지 법안 발의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 발의는 총리의 참패로 끝났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뒷공작 때문이었다.
“물밑에서 작업하면 돼.”
에우로스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사무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번에 네 편을 들어준 진보당 의원들도 이번에는 압박을 견디기 힘들걸. 부결되고 나서 총리 눈 밖에 났다고 얼마나 징징거렸는지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부결시키지 않을 생각이야.”
“뭐?”
“아니, 그쪽에서 발의하기 전에 우리 쪽에서 금지 법안을 먼저 발의해 달라고 공작님께 말씀드릴 예정이지.”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은 황당해졌다.
이제 직물 회사를 닫을 생각인가? 그럴 리는 없고. 언제나 에우로스의 꿍꿍이는 파악하기 힘들다. 심각하게 일에 미쳐 있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법안 내용은 진보당 쪽의 내용과 완전히 같아. 단어 몇 개만 추가할 거야.”
“그게 뭔데? 뭘 추가할 건데?”
“‘채색, 염색, 착색’이라는 말을 넣는 거지. 채색, 염색, 착색한 인더스산 직물의 수입을 금지한다.”
“왜 그렇게 하는데?”
“지금 수입하는 직물은 채색하거나 염색해서 가공한 것들이잖아.”
“그런데?”
“법안 통과되고 나면 내가 가공하지 않은 원단을 들여올 거거든.”
“그걸 어디에 쓰게? 밋밋한 천일 뿐인데.”
“염색 공장을 세우면 되겠지.”
“그럼 일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저 정도의 단어만 추가해서 법안을 먼저 발의하면, 일단 총리나 진보당 쪽의 구미에도 맞추게 되니까 우리가 매수할 사람들도 크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거야. 통과되면 잉그린트 본토에 염색 공장 몇 개를 만들어서 매수한 의원들의 영지에 세워 주면 되는 거지.”
“…….”
“그리고 이제 슬슬 본토에서 면직물을 생산할 때가 왔어. 언제까지 수입해서 파는 마진만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하겠다고?”
“사무엘, 자네는 배포가 너무 작아.”
에우로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정부는 수입 상품에 대한 세금을 매번, 급격하게 올렸다. 실업자를 양산한다며 손가락질받는 일도 지긋지긋했다. 아직도 날씨가 좋지 않을 때면 칼을 맞았던 곳이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 볼 생각이었다. 염색하지 않은 직물을 일단 들여와 가공해서 팔면 공장 노동자들도 고용할 수 있을 것이고 세금도 덜 낼 것이다. 염색 기술이 안정화되고 나면 방적 공장도 세울 예정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다 증기기관의 발명 덕분이었다. 증기기관차, 증기선, 그리고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한 방적기. 그 방적기가 토해 내는 직물의 원가는 아마 인더스산 수입 제품 가격의 1할, 2할 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에우로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기는 한데…….”
“잉그린트의 소중한 금이 인더스로 흘러가는 걸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금본위제가 시행된 뒤로, 화폐를 대신하게 된 금은 계속해서 인더스로 반출되었다. 잉그린트에서 인더스로 수출하는 물목보다, 인더스에서 잉그린트로 수입하는 물목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자국 내 금 보유량 감소는 잉그린트 정부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이 또한 총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가 되었다.
카듀 강에서 금만 캐낸다면 인더스로 흘러가는 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사무엘은 문득 햇빛 아래 번쩍이던 카듀 강의 신성한 물줄기를 떠올렸다. 강물이 떠내려가 사라지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프시케 캐번디시도 떠올렸다.
사무엘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리던 사교계 최고의 미남이었고, 귀부인들과 영애들의 마음을 얻어 내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미모도, 마음을 얻어 내는 방식도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다.
프시케를 만나기 전 에우로스가 풍기던 분위기는 우수가 섞인 청초함이었다. 앳된 소년과 다 자란 청년이 공존하는 그의 얼굴은 언제 봐도 늘 새롭고 짜릿했었다. 그 당시 에우로스는 새롭고 짜릿한 미모를 뽐내며 천사처럼 아름답게 웃음으로써 여자들의 마음을 얻어 냈다.
프시케가 떠난 뒤 에우로스의 미모에는 청초함이 사라지고 우수만 남았다. 살이 내려 날카로워진 턱선과 광대뼈가 수컷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겼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천사처럼 웃지 않았다. 마왕처럼 차갑고 사나웠다. 그런데도 여자들의 마음을 얻어 냈다.
그건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사무엘은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었다.
“뭘 보는 거야, 사무엘?”
그때 에우로스가 깃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잘 빠진 수컷이 사무엘 쪽으로 시선의 방향을 틀었다. 그 각도가, 분하게도 새롭고 또 짜릿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