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열쇠와 자물쇠
“…….”
그 시각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방에 있었다.
채스웍 하우스에 마련했던 침실은 에우로스의 기호에 맞추어 꾸며져 있었다. 공작저에서 프시케가 사용하던 방은 공작부인의 취향이 드러난 곳이었다.
즉, 프시케가 쓰던 공간 중 그 어느 것도 프시케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결혼 후, 그녀만의 방을 가지지 못했다.
편지 한 통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는 그대로 없어져 버릴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더비셔와 갤러웨이로 급히 사람을 보내 찾았지만 모두들 같은 말을 했다. 그곳에도 프시케는 없었다.
브라이튼 섬 각지에 있는 정보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며칠이 흘렀다. 그들은 매우 유능했다. 그러나 그 유능한 사람들도 고작 귀족 여자 하나와 하녀 하나의 행적을 캐내지 못했다.
프시케는 갤러웨이 성의 유령이 맞았다. 유령처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에우로스는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과거의 불행 따위에 흔들린 적도, 매몰당한 적도 없었다. 흔들리기 전에, 매몰당하기 전에 먼저 단단히 묶어 수장시켰다. 불행은 그런 식으로 처리해 왔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에우로스는 잘 알지 못했다. 불행은 제삼자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패는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프시케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초한 실패를 수습하는 방법도 몰랐다.
프시케는 에우로스의 첫 실패였다.
“에우로스.”
사무엘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엘이 부르르 떨었다. 바깥 날씨가 따뜻해졌는데도 방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그를 등지고 서서 창밖을 보고 있는 에우로스에게 사무엘이 천천히 다가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찾아야지.”
“무슨 수로? 아직 아무 소식도 없잖아.”
“곧 찾아낼 거야.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뭔지 잊었어, 사무엘?”
재수 없긴 하지만 에우로스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는 훌륭한 정보수집가였다. 브라이튼, 그리고 도번 해협 너머 대륙까지 에우로스가 보고자 하고 듣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보고 들었다.
지금까지는 별 수확이 없다 하더라도 그라면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낼 거라고 사무엘은 생각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대단히 잘난 놈이니까.
“캐번디시 부인 말이야.”
사무엘은 하르모니아에게 기각당한 가설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단순히 그…… 자네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사이에 있었던 그 소문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닌 것 같아. 아무래도,”
“그래.”
사무엘이 에우로스의 짧은 수긍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소문 때문은 아니야, 사무엘.”
“어, 그럼,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둘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에우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자네가 알 필요 없는 문제야.”
애써 숨기려던 걸 프시케가 굳이 확인했고, 그래서 그녀를 내쫓은 뒤 모른 척했다. 하지만 이건 엄밀히 부부 사이의 일이고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알 필요도, 알 이유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에우로스. 내가 아는 프시케 캐번디시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물론 서운했겠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그것도 프레이아 같은 여자와 바람났다는 소문을 듣고 멀쩡한 사람은 없을 거야. 뭐, 그리고 나에게 말할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 당연히 에우로스 자네가 상처를 줬을 테고.”
사무엘은 그 점에 대해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우로스는 환하게 웃으며 독을 쏘아 대는 인간이니까. 상처를 주었다면 그건 에우로스지, 프시케는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캐번디시 부인이 이런 무책임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이야.”
사무엘이 에우로스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고 은밀한 정보를 넘기듯, 답지 않게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문제를 해결하는 여자지, 문제를 회피하는 여자가 아니야.”
“…….”
사무엘의 말이 맞았다.
프시케는 어렸을 적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겁내지 않았다. 망해 넘어가는 갤러웨이 성을 상속받아 아등바등 지켜 냈다. 말도 안 되는 여왕의 결혼 명령을 받아들였다.
시간을 들이더라도, 노력을 들이더라도, 프시케 캐번디시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촛불을 켜고 직시하는 쪽을 택했다. 어둠 속에서 안주하기보다는.
“그러니까 분명히, 내 짐작으로는 말이야.”
사무엘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가 떠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지.”
“다른 이유가 뭔데?”
에우로스가 천천히 이마를 쓸며 물었다.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진 금발을 걷어 올리는 손길이 전에 없이 초조했다.
“프시케 캐번디시를 움직일 만한 거라면…….”
사무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툭 말을 뱉었다.
“글쎄, 뭐 반역 정도는 되어야 하나.”
사무엘은 그동안 수없이 반역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입에 올렸다.
말콤 월레스를 신고하지 않는 것도 반역, 더비 백작부인의 불경한 말도 반역, 프시케와 에우로스의 결혼도 반역, 데이모스의 흉계를 알게 되었을 때도 반역.
그러나 지금만큼, 정말이지 시의적절하게 반역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사무엘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단숨에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반역…….”
“어, 농담으로 한 소리였어. 실수야, 에우로스. 설마 그런 이유겠어.”
비록 실수로 짚은 핵심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사무엘은 프시케의 가출 이유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사람이었다. 하르모니아와는 달리 에우로스는 그의 추측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에우로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셔츠의 칼라를 바르게 매만졌다. 외출하겠다는 신호였다.
“어디 가?”
돌변한 에우로스의 태도에 사무엘이 놀라 물었다.
“만날 사람이 있어.”
에우로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누구를 만나는데?”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아니, 다시 들어 보니 무심함을 가장한 냉랭한 말투였다. 차가웠던 방 안 공기가 삽시간에 더 싸늘해진 것 같았다.
“프레이아는 왜? 만났다가 또 무슨 소문을 달고 들어오려고!”
사무엘은 뒷걸음질 치다 반짝이는 작은 열쇠 하나를 발견했지만, 그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는 몰랐다. 에우로스는 사무엘이 발견해 제게 건네준 열쇠의 요철과 딱 들어맞는 자물쇠를 알 것도 같았다.
“확인해 봐야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바로 그 자물쇠인지 아닌지.
* * *
“정말 오랜만이군요.”
프레이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하자 에우로스는 밝게 웃었다. 화내는 웃음. 그 정도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프시케 캐번디시가 울며불며 고자질이라도 했나 보지. 갑자기 사람을 불러들여 화를 내는 걸 보니. 그 여자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더 화가 나 있는 사람은 프레이아 본인이었다.
“갑자기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필요할 때는 그렇게 불러 대더니.”
그녀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용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걸 인정해야 에우로스의 뺨이라도 때릴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프시케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에우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프레이아가 지금껏 수없이 머릿속에서 돌려 본 보복 상황과는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사라지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프시케는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그 하녀와 함께요.”
에우로스의 눈꼬리에 보기 좋은 주름이 잡혔다. 프레이아는 그 주름의 각도와 개수까지 분석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에게 말과 표정의 부조화는 늘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 간극이 컸다.
“그럴 리가요. 그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못 찾을 리도 없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꿀처럼 달게 뱉어지는 독기에 프레이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지금 에우로스는 아내를 잃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분노했던 만큼 에우로스가 분노해야 옳았다. 자신이 잃은 만큼 에우로스도 잃어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에우로스의 말은 그녀의 바람을 모두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그래서요?”
“저는 그 일과 부인 사이에 제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무슨 근거로?”
“근거는 없습니다.”
에우로스의 대답에 프레이아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충격을 심하게 받기는 한 모양이었다. 자로 재단하듯 살아온 에우로스가 근거도 없이 지레짐작만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근거가 없는데 그렇게 자신하는 건 그대답지 않은데요.”
“맞습니다.”
에우로스는 간결하게 수긍했다. 프레이아의 말대로 그는 근거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대본에 쓴 대로 이루어지는 연극이었다. 계산된 시간에 막이 오르고 내렸으며, 계획대로 무대장치가 움직였다. 배우들의 등장에도 그럴듯한 이유가 반드시 있었다.
그러나 프시케와 관련된 일에 에우로스는 늘 대본을 내던졌고 근거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계획은 항상 어그러졌고, 계산은 틀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했다. 에우로스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프시케가 유일했다.
그러므로 에우로스는 이번에도 각본에 없던 대사를 읊어야 했다. 예정에 없이 재등장시킨 악역 조연에게.
“프시케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