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증발
“하르모니아, 정말 너는 모르는 일이야?”
사무엘이 정신없이 방 안을 배회하다 말고 우뚝 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눈 주위를 꾹꾹 누르고 있는 하르모니아에게 물었다.
“사무엘, 그렇게 돌아다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하르모니아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 있었다. 그녀는 에우로스가 공작저로 돌아오자 그를 붙들고 한참 못된 말을 퍼붓고 난 참이었다.
프시케는 그녀의 하녀 클라리사와 사라졌다. 봄이 오면 자취를 감추는 눈이나 얼음처럼, 그렇게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이다.
그녀가 공작부인을 피해 따로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시케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특별한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르모니아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동안 하녀 하나가 식당 문 앞에서 종종거리고 있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그 하녀는 주방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아이가 아니었고, 클라리사를 도와 프시케의 시중을 드는 하녀였기 때문이었다.
하르모니아는 목석처럼 앉아 있는 공작부인의 눈치를 살피다 식당을 나섰다. 하녀가 조심조심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저어, 그게.”
“캐번디시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부인의 방에 한번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잔뜩 울상인 하녀가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났다. 하르모니아는 지체 없이 계단을 올랐다.
프시케의 방은 늘 그렇듯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르모니아는 하녀가 왜 자신을 그 방으로 안내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뭐야? 왜?”
“공녀님. 오늘 아침 시중을 들러 부인의 방에 왔을 때부터 이 상태였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정리한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이렇게 정리되어 있었어요.”
하르모니아는 정리되지 않은 하녀의 말에 버럭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니?”
“그러니까, 제 말씀은요. 간밤에 부인께서 이곳에서 주무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뭐?”
“제가 혹시나 싶어서 살펴봤는데, 옷 몇 벌이랑 여행 가방이 없어졌어요.”
그제야 하르모니아는 하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렸다. 그런데 그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부인이 공작저를 나갔다는 거야?”
“그, 그런 것 같아요.”
하녀는 갑자기 높아진 하르모니아의 음색에 기가 죽어 어깨를 움츠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당장 클라리사를 데려오렴.”
“그것도요. 아까 제가 곧바로 클라리사를 찾으러 저택을 이 잡듯 뒤져 봤는데요, 찾지 못했어요.”
“책상 위나 협탁 위에 편지 같은 것은 없든?”
“아무것도 없었어요, 공녀님.”
하녀의 말이 귓가에 뎅그렁뎅그렁 울리기 시작했다. 장례식이 있는 날, 리던 대성당에서 치는 종소리처럼 무시무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르모니아는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어린 하녀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니?”
“아직 저만요. 아, 그런데 제가 클라리사를 찾으러 다니면서 물어본 사람들도 꽤 많아요.”
하르모니아는 이마를 짚었다. 한동안 에우로스가 집에 들어오지 않더니, 이제는 프시케의 차례인가.
둘의 사이가 냉랭하다 못해 얼어붙어 버스럭거리고 있다는 건 공작저에 있는 그 누구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밤늦게 귀가해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데본셔 공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었다.
“드디어 신의 심판을 받는구나.”
공작부인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비아냥에 프시케는 시종일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악의적인 공격에 희미한 미소로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프시케는 꼭 짐을 잔뜩 지고 있는 나귀 같았다. 아주 가벼운 지푸라기 하나라도 등 위에 더 올리면 바로 폭삭 주저앉아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왜 그러는 거예요, 프시케? 이야기해 봐요.”
물론 하르모니아가 그걸 그냥 두고 보았을 리는 없었다. 방에 찾아가고, 티 타임을 함께 하자고 조르고, 승마를 권했다. 그렇지만 프시케는 말 그대로 유령처럼 수척한 얼굴로 그녀의 권유를 전부 완곡히 거절했다.
그리하여 하르모니아는 사무엘을 불러 제 앞에 대령시켰다. 에우로스는 절대로 제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까, 사무엘에게 이야기해 그가 적당히 에우로스를 설득하여 집에 데려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무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그건 나도 몰라. 에우로스는 그런 말을 시시콜콜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무엘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가장 친한 친구면서.”
하르모니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사무엘은 그녀의 입술을 홀린 듯 보다가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헛기침하는 사무엘을 향해 찡그린 얼굴로 하르모니아가 물었다.
“그런데, 사무엘. 그거 진짜야?”
“뭐가?”
“에우로스랑 프레이아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냐고.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 그럴 거였으면 에우로스가 결혼하기 전에도 기회는 많았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그렇게 티를 내고 안달복달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잖아.”
“그건 절대로 아니야. 절대로.”
“그런데 에우로스는 왜 그 여자를 단둘이 자주 만났던 거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더 이상은 묻지 마, 하르모니아.”
사무엘의 장점은 의외로 입이 무겁다는 것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는 비밀을 잘 지켰다. 에우로스가 그에게 사업 이야기를 터놓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와, 정말 서운하네?”
“네가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어.”
에우로스와 프레이아의 오붓한 만남에 사무엘이 찬성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에우로스의 뜻이었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사교계의 여왕이 된 데는 그 눈부신 자태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자질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상황을 읽는 눈치였다. 물론 그 눈치는 그녀가 필요할 때만 봤다.
그녀가 그 무엇보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상은 에우로스 캐번디시였다. 그가 프레이아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렇기에 에우로스는 그녀가 재빨리 눈을 굴리기 전에 그 앞에 희부연 안개를 뒤집어씌웠다. 그 안개는 바로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야릇한 분위기였다.
에우로스의 의도대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갑자기 특별해진 대우에 곧바로 촉수를 거두었다. 보통 때였다면 그가 총리의 근황을 물었을 때 즉시 견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에우로스는 원래 고든레녹스 총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물건을 건넬 때 가볍게 닿는 손가락이라든가,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머리 위에 얹어 준다거나 하는 그 사소하고도 거룩한 호의에 그녀는 안개를 헤치고 나올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에우로스의 질문에 술술 답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그럼 소문을 바로잡았어야지.”
“에우로스가 계속 누워 있는데 어떻게 바로잡아.”
하르모니아의 비난에 사무엘은 내심 답답했다. 이미 퍼진 소문을 다시 어떻게 주워 담는단 말인가. 게다가 에우로스는 난데없이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기까지 했는데.
그 소문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에우로스가 아내와의 금슬을 부러 자랑하는 것일 테지만, 근 두 달 동안 자랑은커녕 바깥출입도 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에우로스의 부상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그 허황된 소문을 진압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사무엘, 당장 에우로스에게 공작저로 돌아오라고 해.”
“네 오빠가 내 말을 듣는 사람이야?”
“기절시켜서라도 데려와.”
그렇게 된 거였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하르모니아의 억지에 약했고, 지금은 더 약하다.
그래서 그는 하르모니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에우로스를 들들 볶아 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전략은 성공했다.
에우로스의 성격상 사무엘에게 들볶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귀가를 결정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 어쨌거나 그의 결심에 사무엘의 잔소리와 하르모니아의 억지가 메인 디시 위에 뿌려진 파슬리 정도의 역할은 했을 것이었다.
마침내 에우로스는 프시케와의 화해를 위해 차림새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사무엘은 제 조언을 듣고 몸을 일으킨 친구가 기특해 입이 크게 벌어졌다.
슬프게도 그 직후에 하르모니아가 보낸 급한 전갈을 듣고 벌어졌던 사무엘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지게 되었지만.
잠적이라니. 그런 건 소설이나 연극에나 나오는 말인 줄 알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소식에 에우로스는 한참 동안 입을 닫은 채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끝나자 그는 일차적으로 채스웍 하우스와 갤러웨이 성에 사람을 보냈다.
불행히도 프시케는 그곳에 없었고, 그것으로 그녀의 잠적은 확실시되었다. 그 후로 에우로스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프시케의 행방을 쫓고 있는 중이었다.
“에우로스는 아직도 프시케의 방에 있어??”
“글쎄. 아마도.”
“그러게 있을 때 잘해야 할 것 아니야. 대체 남자들은 왜 다 그 모양인 거야.”
이쯤 되니 사무엘은 괜스레 억울해졌다.
에우로스가 절대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해서 입을 다물고 있기는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기껏 아무도 모르게 그 엄청난 사건을 다 처리하고 났더니, 엉뚱하게 욕만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르모니아.”
“왜.”
사무엘이 갑자기 심각한 말투로 저를 부르자 하르모니아가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캐번디시 부인이 고작 그 소문 때문에 집을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야.”
“고작이라니? 그런 소문이 여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데?”
하르모니아의 반발에 사무엘은 잠시 기가 죽었다가 다시 우물거리며 제 생각을 말했다.
“아니 물론, 기분은 상할 수 있어. 하지만 캐번디시 부인이 그런 성격은 아니잖아. 그건 그녀답지 않아.”
“그녀다운 게 뭔데?”
뭐지? 이 남매는 몰래 같은 통속소설을 탐독하고 있나? 사무엘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하르모니아의 퍼렇게 불타는 시선을 느끼고는 마지못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은 일단 그런 소문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야. 물론 기분이 상할 수는 있겠지만. 데이모스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려고도 했었잖아. 데이모스가 비올레타와 노상 놀러 다녔어도 그러려니 했었다고.”
“에우로스와는 좋아서 결혼한 거잖아! 그러니까 더 기만당하는 것 같아서 괴로운 거지.”
사무엘이 이래서 연애를 못 하는 거야. 하르모니아가 종알거렸다. 그 말에 사무엘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말했다.
“어쨌든, 내 생각에는 말이야. 캐번디시 부인이 이런 결정을 했을 때는 아마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야.”
“그게 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
하르모니아가 눈을 흘겼다. 그리고 작심한 듯 아주 천천히, 글자를 꼭꼭 눌러쓰듯 말했다.
“사무엘. 사무엘이 잉그린트 남자라는 건 잘 알겠어.”
“무슨 뜻이야?”
“여자 마음을 하나도 모른다는 뜻이야.”
아무튼 사무엘은 프시케의 가출 이유에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 하르모니아는 그의 추측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