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역전의 시간
데본셔 공작은 오랜만에 가내 만찬에 참석했다. 사고가 난 지 두 달이 지나, 에우로스가 완전히 몸을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만찬에는 공작저의 주치의와 그의 아들 알프레드도 초대받았다. 아끼는 장남을 후유증 없이 완벽하게 되살려 준 데 대한 치하와 보답의 의미였다.
“선생의 아들이 이번에 의과대학을 졸업한다고 들었는데.”
“아, 예. 맞습니다. 다음 주에 졸업식이 있습니다.”
공작의 물음에 주치의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는 알프레드가 자신의 뒤를 이어 공작저의 차기 주치의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었다. 공작이 아프지 않은 한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주치의는 이번 기회에 알프레드를 소개해 단단히 눈도장을 찍게끔 할 작정이었다.
“뭐, 주치의를 닮았다면 성적도 나쁘지 않았겠군.”
“그러잖아도 졸업생 대표에 최우등 졸업…….”
“아버지.”
공작의 심드렁한 질문에 곧장 자랑을 늘어놓는 팔불출 같은 아버지를 지켜보던 알프레드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제지했다. 그런 알프레드를 보며 공작이 픽 웃었다.
“선생이 공작저 주치의가 된 게 언제였지?”
“15년 전입니다. 제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제가 뒤를 이었으니까요.”
“그렇군.”
“제 아들도 졸업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저를 보조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다 보면 또 저처럼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요.”
주치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공작이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제 아버지 옆에 앉아 쉼 없이 물을 들이켜는 알프레드를 탐색하듯 살폈다.
“성격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공작의 말에 알프레드는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그대로 뱉어 낼 뻔했다.
실제로 만난 데본셔 공작은 마치 인더스 호랑이와 같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직시하며 말을 걸자, 알프레드는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피해 버렸다.
“알프레드는, 제 아들은 내성적인 아이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실력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알프레드가 우물쭈물하자 주치의가 냉큼 나서서 대답했다.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치의 자리는 의학 지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귀족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 주는 것이 의학 지식보다 더 중요시되는 자질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알프레드는 어릴 적부터 영 숫기가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홀로 책을 보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아들에게 대학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맥을 넓히라고 수시로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예?”
“우리 가문의 주치의가 되고 싶냐고.”
공작이 포도주를 들이켜며 무심하게 물었다. 주치의는 이때다 싶어 알프레드를 향해 바쁘게 눈짓했다.
알프레드는 지난번 프시케와의 티 타임 이후,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하는 것은 그의 주특기였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의미였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그는 항상 생각했다.
아니, 생각‘만’ 했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각들이 머릿속에 빠듯하게 들어차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에게 선택하는 것은 난제였다. 차를 마실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옷을 맞출 때도, 뭐 하나 쉬운 적이 없었다.
이쪽저쪽의 장단점을 비교하다 보면, 그 무엇도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타인의 취향을 따르는 편이 좋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노란 안개가 비비적대며 리던 곳곳에 퍼져 나가던 그 저녁, 알프레드는 처음으로 장단점을 따지지 않고 생각했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오로지 호와 불호, 원과 불원이었다. 그 뒤로 몇 주간, 생각할 시간은 있었다.
“저는, 저는.”
알프레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해도 될까, 말하면 안 되는 걸까. 말할 수 있을까, 말하지 말까.
주치의는 그 순간, 제 아들이 자신이 다 지어 놓은 식사에 침을 뱉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알프레드의 말을 막아 버리기 위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요, 공작 각하. 이 아이가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알프레드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집에 돌아가면 또 얼마나 타박을 들을지 생각하니, 차라리 그 뒷말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의 합리화는 그에게 자주 있는 일이었고, 알프레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그와 프시케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의 그 대화, 그 대화에서 느꼈던 흥분, 흥분이 가고 난 뒤 밀려온 두근거림. 알프레드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1분간에도 시간은 있다. 결정하고 수정할, 1분이 역전시킬 시간은 충분하다.
1)
영원할 것만 같던 고민이 한순간에 수정되고 결정되었다.
“알프레드!”
주치의가 기겁하며 아들을 말리는 사이, 데본셔 공작이 퍽 즐거운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 건가?”
“인더스에 가서 풍토병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인더스?”
공작도 그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알프레드의 아버지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풍토병이라면, 콜레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식사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에우로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식민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선원들이나 무역회사 직원들이 잉그린트로 전염병을 옮겨 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원인을 조사하고, 치료할 방법도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상당히 흥미롭군요.”
에우로스가 대답했다. 알프레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근 인더스에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서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다가 죽어 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감염률과 치사율이 꽤 높은 질환이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병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여왕 사후 왕위가 비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정부에서 쉬쉬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의 직물회사가 인더스와 교역을 늘릴수록 직원들과 선원들이 콜레라에 걸릴 위험성도 높아졌다. 아직은 전염 사례가 없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에우로스가 알프레드의 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주치의는 데본셔 공작의 아들 에우로스가 흥미를 드러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레스 캐번디시 공작이 편애하는 아들로부터 알프레드가 호감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머지않은 미래에 공작가의 질서는 아마 재편될 것이다. 군림은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한다 해도, 지배는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하게 될 테니까. 주치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원한다면 내가 추천서를 써 주지.”
데본셔 공작이 말했다. 용기를 모두 쥐어짜 낸 뒤 바닥만 보고 있던 알프레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떤 추천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인더스에 주둔하고 있는 잉그린트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건 어떤가?”
알프레드는 잠깐 고민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인더스에서 체류하기 위해서는 일자리와 숙소가 필요했다. 군의관이 된다면, 많지는 않지만 꼬박꼬박 월급이 지급될 것이고 군의관용 관사도 제공될 것이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추천장을 받으러 오게. 준비되면 사람을 보내지.”
공작은 흡족해하며 웃었다. 주치의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 * *
만찬 후 며칠이 지나 알프레드는 다시 데본셔 공작저를 방문했다. 공작의 추천장을 받아 가기 위해서였다.
그날 밤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데본셔 공작이 추천서를 써 주고,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흥미를 보인 마당에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대신 그는 알프레드에게 연구를 마치면 반드시 자신의 뒤를 잇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은퇴가 조금 늦어질지 모르겠다는 아버지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알프레드는 1분이 역전시킨 그 시간과 프시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알프레드가 집사에게서 추천장을 받아 챙긴 뒤 막 공작저를 나서려 할 때였다.
“선생님.”
향기처럼 가벼운 목소리. 알프레드가 뒤를 돌았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심장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콜레라가 아니라 상사병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 날이 갈수록 마음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오늘 알프레드는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을 마주칠까 기대하는 마음에 머리카락을 갈라 뒤로 넘기고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 온 참이었다. 이 모습을 알아봐 주실까.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프시케를 마주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프시케가 주위를 살피고는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인더스에 가실 때, 저도 데려가 주세요.”
1)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