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구원자의 등장
겨울의 테임 강은 스산하다. 물기를 먹은 강바람을 맞으며 흐린 하늘 아래를 걷다 보면, 한기에 몸이 오싹해져 저절로 숄을 몇 번이고 고쳐 두르게 된다.
“마님, 이제 그만 들어가요.”
프시케의 뒤를 따르던 클라리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스코틀린의 살을 에는 추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날씨가 적잖이 매서웠다.
“예? 돌아가요, 마님!”
지금쯤은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이 힘을 뺄 때도 되었는데, 이상하게 올해 봄은 좀 늦게 찾아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늦은 봄만이 아니었다. 프시케 마님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이상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난리를 치면서 결혼하고, 깨를 볶아도 모자랄 신혼에 남편이 칼에 찔려 드러누웠으니 충격이 극심할 것이다. 게다가 남편이 불여시 같은 고든레녹스 총리부인과 눈이 맞았다는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이번에는 그 소문을 전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 하녀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팔자 좋게 누워 있는 주인 나리에게 달려가 그게 진짜냐고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프시케의 얼굴을 보자 그 기세는 쪼그라들다 못해 말라붙어 버렸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마음, 괜히 더 휘젓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 클라리사의 마음도 몰라주고 데본셔 공작부인은 기어이 그 소문을 발설해 버렸다. 식당에서 프시케에게 표독스럽게 구는 공작부인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졌다.
하녀들 말로 공작부인은 모든 일에 관심 없고 오로지 교회 가는 것에만 몰두한다던데, 교회에 가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은 별개의 사정인가 보다.
“마님,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요.”
프시케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을 때 클라리사는 기절초풍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끔 프시케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여자를 만나서 무얼 하시게요. 차라리 주인 나리께 여쭤보세요.”
빚을 탕감하겠다며 평민들도 꺼리는 밀주를 빚겠다고 했을 때도, 갑자기 뒤통수치듯 잘 알지도 못하는 잉그린트 대귀족과의 혼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도, 프시케는 저렇게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방법이 없었다.
“총리부인을 만나서 기분 좋았던 적이 없잖아요. 괜한 말 듣기 전에 제발 마음을 돌리세요.”
소문의 당사자는 둘이고, 그중 한 명이 곁에 있는데 왜 굳이 총리 관저까지 가겠다는 건지 까닭을 모르겠다고 클라리사는 생각했다.
프시케가 에우로스와 이야기할 때마다 휩싸이는 어둠을 클라리사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긴 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총리부인과 짧은 만남을 마친 뒤 응접실에서 나오는 프시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군가 그때 프시케를 봤다면, 그녀가 갤러웨이 성의 유령이라는 소문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마님? 네? 그 부인이 또 무슨 소리를 늘어놓던가요?”
공작저로 돌아오는 내내 클라리사가 끈덕지게 물었지만 프시케는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내심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프시케는 그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르모니아와 시간을 보내고, 순해 보이는 주치의의 아들과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예전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곧 해가 질 거라고요!”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쁘게 걷는 프시케의 뒷모습은 절대로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나마 겨울이라 강변에 사람이 없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또 뒤에서 무슨 소문을 퍼트릴지 모를 일이었다.
듣자 하니 등 따습고 배부른 리던 귀족들은 어떻게든 남들 꼬투리를 잡아 저들 생각대로 부풀리고 거짓을 섞어 소문을 만드는 데 이골이 난 족속들이라고 했다.
죽은 여왕이 프시케의 결혼을 명령한 이래로 그녀가 쉼 없이 소문의 중심에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즘 그 족속들의 최대 관심사는 또다시 프시케였다.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 노랑나비, 사교계의 새 여왕, 남편이 될 사람의 형과 야반도주한 요부, 그리고 금방 버려진 비련의 여인. 기막히게도 이 모든 것이 프시케 한 사람을 둘러싼 소문이었다. 그것도 채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남편의 바람 때문에 미쳐 버린 여자. 미쳐서 바람이 쌩쌩 부는 강변을 달리는 여자. 안 그래도 뻑적지근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추가되면 큰일이었다. 암, 그렇게 되면 안 되고말고.
이제 클라리사에게는 억지로 프시케를 막아서서라도 당장 데본셔 공작저로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곧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프시케가 앞서가던 길을 살폈다.
“……마님?”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프시케가 사라졌다.
* * *
프시케는 빠른 속도로 테임 강변을 걸었다. 클라리사의 잔소리가 그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뻗어가는 마음 자락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를 만났던 날 밤, 제 손으로 초를 켜고 확인한 진실은 잔인했다. 프레이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럴듯한 앞모습 뒤에 숨긴 추악한 뒷모습. 제게는 보여 주지 않던 뒷모습을 프레이아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열패감이 들었다.
많이 힘들었을까. 그래서 말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저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걸까. 말했어도, 보여 주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다. 그러므로 에우로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에우로스가 여태껏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보여 주지 않았던 비밀을, 프레이아는 알고 있었다. 아내만 알 수 있는 비밀을 프레이아와 공유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프레이아만이 알고 있던 비밀을 자신이 몰래 훔친 것이다.
호기심이 해결되었지만 의심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의심은 그 키를 더 키웠다. 간신히 맞춘 수평이 다시 급격한 경사를 만들어 냈다. 프시케는 다시 굽 높은 구두 위에 위태위태하게 섰다.
그 밤 이후, 에우로스는 프시케의 방문을 거부했다. 불화설은 현실이 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이지러졌다.
“프시케.”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들릴락 말락 한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프시케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하고는 몸을 휘청거렸다.
“말콤 월레스 경!”
“쉿.”
수풀 사이에 몸을 낮추고 은신한 이는 말콤 월레스였다. 프시케는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고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에요?”
프시케의 물음에 말콤은 웃기만 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프시케는 당혹했다. 웃음이 울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너무……. 어디 아픈 건가요?”
듬직했던 말콤의 체격이 기형적으로 말라 있었다. 핼쑥한 얼굴 위로 당당한 눈빛만이 초연하게 형형했다.
“별일 아니야. 프시케, 너는? 아, 이제는 캐번디시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프시케가 불안한 낯으로 물었다.
블랙워치가 습격을 받아 부대원 전원이 몰살되었다는 기사는 그녀도 읽었다. 유일하게 도주한 사람이 말콤 월레스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잉그린트 정부는 말콤 월레스의 이름 앞에 엄청난 액수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리던 시내 곳곳에 붙어 있는 수배 전단을 떠올리며 그녀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리던 시내를 이렇게 마음대로 다녀도 되는 거예요? 사복경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말콤은 그런 프시케를 한참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그녀를 만나니 벙어리가 된 것만 같았다.
나이젤에게 떠밀려 말을 집어 타고 블랙워치를 벗어난 뒤, 그는 앞만 보며 달렸다. 프시케가 산다던 채스웍 하우스로 가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엮여 반역 누명을 쓰게 된다면 프시케는 곧바로 사형당할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말콤은 스코틀린의 독립에 자의로 투신했으니 사형당한다고 하더라도 억울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프시케는 반역과 전혀 상관없는 선량한 시민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친구 나이젤 때문에 죽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가까스로 채스웍 하우스에 도착했지만, 이미 프시케는 리던으로 떠난 뒤였다. 그는 곧바로 리던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블랙워치 막사에서부터 혹사당하며 달렸던 말은 리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중에는 돈도 별로 없었다.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 시간을 이용해 걸어서 리던으로 왔다. 고생스럽던 여정을 끝내고 리던에 도착해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신문이었다.
반역과 관련된 기사가 실리지 않았는지 샅샅이 확인했지만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단지 블랙워치를 소탕했다는 내용의 기사들만 잔뜩 실려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내렸다.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블랙워치는 와해되었다.
그게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나이젤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것은 분명히 제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나이젤을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고문으로 육체와 정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이젤이 아닌 자신이 끌려갔다 해도 결과가 별반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프시케 캐번디시는 무사했다. 무고한 죽음을 피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제 다시 스코틀린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신문 끄트머리에 실린 가십 기사를 읽기 전까지 말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가십의 제목은 이러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의 은밀한 관계. 어디까지가 진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