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촛불
“오늘, 옆에서 자도 괜찮을까요?”
프시케가 에우로스의 눈가를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얇고 섬세한 눈매에 보기 좋은 주름이 잡혔다.
“당연하지요.”
프시케는 그의 옆자리에 베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에우로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미안하지만 프시케, 커튼을 닫아 줄래요?”
“지금보다 더요?
“완전히 어두워지게요.”
“…….”
“부탁해요.”
홀로 잠들 때 에우로스가 커튼을 다 여미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부탁은 자신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다. 프시케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환한 보름달이 토해 낸 흰빛이 내리박혔다. 겨울의 달은 참 밝다. 겨울의 밤하늘이 짙어서일 것이다. 겨울이 되면 별이 더 잘 보인다던 에우로스의 말이 생각났다.
채스웍 하우스에 있는 푸른 수염의 방. 그 문을 열면 안 돼. 프시케의 무의식이 속삭였다.
방 안은 완연히 검어졌다. 프시케는 조심조심 침대로 향했다. 체온으로 따스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서 에우로스가 그녀를 꼭 안았다.
그의 품에서 프시케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실은,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을 만났어요.”
“그래요? 어쩐 일로?”
에우로스의 입매가 약간 비딱해졌다. 공작저에 또 프레이아가 쳐들어왔나 보군.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프시케의 어깨에 아프지 않게 박혔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제가 총리 관저로 찾아갔어요.”
“프시케 그대가요?”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프시케가 프레이아에게 확인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지? 에우로스가 손가락의 위치를 바꾸려다가 돌연 멈추었다.
“네.”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소문이요.”
“소문?”
“에우로스 당신과 고든레녹스 부인 사이의 소문 말이에요.”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다치기 전에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총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매일 프레이아를 만난 일 때문에 뻗어 나갔던 소문.
“설마 그 소문을 믿는 거예요?”
“리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어요.”
“그래서 그대도 믿는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믿고 싶지 않아요.”
믿고 싶지 않다. 그러면 믿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갤러웨이 성의 붙박이 유령이라는 소문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던 프시케다. 겨우 이따위 저급한 소문에 휘둘릴 법한 사람이 아니다. 에우로스는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그러면 믿지 말아요.”
“내가 믿지 않도록 해 줘요.”
“어떻게 하면 믿지 않을 건데요?”
“황금화살 클럽의 내실에서 고든레녹스 부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세요.”
에우로스는 곤란해졌다. 그가 데이모스가 올린 야심 찬 연극을 주저앉힌 목적은 단 하나였다. 프시케 캐번디시가 그 연극에 대해 절대로 몰라야 하는 것.
지금이라도 말해 줄 수는 있었다. 조작된 반역 모의가 있었고, 데이모스가 그것을 빌미로 그대를 거꾸러트리려 했다고.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프시케의 꿈속 망령이 하나 더 생겨나게 된다. 그녀를 눈물을 흘리게 하고, 큰 그림자를 무서워하게 만들고, 깜짝깜짝 놀라며 잠을 깨게 만드는 그 꿈속의 망령 말이다.
데본셔 공작저에서 그녀는 데이모스의 서재 쪽으로 눈도 돌리지 못했다. 언제든 데이모스가 나타나 서재로 그녀를 이끌고 가서 가둘 수 있을 거라는 극도의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껏 애써 왔던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에우로스가 연극 무대에 뛰어 올라가 무대장치를 박살 내고 배우 몇을 죽인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들이었어요.”
그러므로 에우로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프시케는 언제나 안전하게, 장막과 베일 뒤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내실에서 단둘이 있었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요?”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프시케?”
질투하는 아내는 매력이 없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설령 이 감정이 질투라 해도, 그래서 매력이 없다고 손가락질받을지언정 프시케는 묻고 싶었다.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바로 뜨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고 싶었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편하다. 진실이라는 건 원래 그렇다. 적당히 외면하면서 사는 것이 편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프시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막대한 빚을 탕감하기 위해 밀주를 빚고 갤러웨이 성을 지켜 왔을 만큼 불편한 진실에 과감하게 맞서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러니까 물어야 했다. 아마 지금이 대낮이었다면 에우로스는 자신을 보며 보름달보다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 밀어내기 위해, 화를 내기 위해.
“고든레녹스 부인이 그러더군요. 아내만 알 수 있는 비밀을 이제 그 여자도 알게 되었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죠?”
프시케의 질문에 에우로스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프레이아의 말뜻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의미 없는 환담 속에 무슨 비밀이 오갔단 말인가. 에우로스가 이야기했던 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프레이아가 은근슬쩍 꽃향기를 흘릴 때마다 시가 연기를 뿜으며 차단해 왔다.
“그건 나도 궁금하군요.”
에우로스의 말투가 조금 냉랭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원했던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를 꼭 안고 한 번씩 입을 맞추고, 그렇게 잠들고 싶었다.
프시케는 이 대화로 끌어낼 수 있는 진실이 거의 없다는 걸 절감했다. 에우로스는 하르모니아와 달랐다.
대화법도 답변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대답을 꺼리고 대화를 차단하는 사람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까이 와요.”
에우로스가 말했다. 낮고 부드러운, 그만의 음색이 쌉쌀한 약초의 향과 함께 밀려들었다.
프시케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자 에우로스가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닮아 그의 입술 또한 부드러웠다.
“지금은 내가 움직일 수 없어서,”
한참 동안 프시케의 입술 위에 머물던 촉감이 사라지자 소리가 생겨났다.
“그대가 대신 좀 움직여 줄래요?”
웃음을 머금은 소리가 포근해졌다. 프시케가 사뿐히 그 소리를 타고 올랐다. 심한 부상을 딛고 회복세에 들어선 이클립스의 경기력은 여전히 월등했다.
* * *
프시케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질주를 마친 이클립스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어머니 릴리아나는 언제나 과한 호기심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오르페는 호기심 때문에 지옥에서 건져 올린 아내를 다시 한번 잃었다. 푸른 수염의 아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었다가 죽을 뻔했다.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는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다. 에우로스의 아내만 알 수 있는 비밀을 그녀도 알게 되었다고. 에우로스의 아름다운 몸 뒤편에 가려진 추악함이 있다고.
프시케만 알 수 있는 비밀 따위는 없었다. 아름다운 몸 뒤에 가려진 추악함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모른다.
에우로스와 결혼한 뒤로 그녀는 늘 어둠 속에서 살았다. 말해 주지 않는 것은 묻지 않았다. 보여 주지 않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검은 베일을 씌우면 그 뒤에 숨었다. 커튼을 싸매고 촛불을 끄면 그 안에 머물렀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충고, 오르페의 비탄, 푸른 수염의 아내가 겪은 고통이 그녀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제 안의 호기심이 피어날 때마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에우로스를 거역하고 싶지 않은 체념을 상기했다.
하지만 프레이아의 말, 그 고운 입매가 뱉어 내던 새빨간 말에 프시케의 내면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흐릿했던 시야에 박혀 핏방울처럼 붉게 맺히던 말.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프시케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에우로스는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협탁 위에 있는 초를 집어 들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방 안에 노란빛이 퍼져 나갔다. 에우로스를 깨울까 노심초사하며 그의 등에 붙어 있던 흰 천을 떼어 냈다. 순간 프시케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참았다.
촛농이 뚝뚝 떨어져 내려 프시케의 손에 달라붙었다. 억지로 뜨거움을 참아 내며 그녀는 그 추악하다던 에우로스의 뒷모습을 살폈다.
프시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프레이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의 등은 추악했다. 터지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다 생겼을 무수한 흉터들. 가혹한 학대의 흔적이었다.
그때, 촛농 한 방울이 에우로스의 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프시케는 황급히 촛농을 쓸어 냈다. 그녀의 손바닥이 스친 자리에 촛농 대신 검붉은 문양이 남았다. 그 문양을 눈에 담으며 프시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그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초를 쥐고 있던 프시케의 손이 당황으로 마구 흔들렸다. 그 손을 따라 초가 내뿜는 불빛도 사납게 흔들렸다. 에우로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몇 번 오르내리다가 숨기고 있던 눈동자를 드러냈다. 햇살을 머금은 호수도, 잔잔히 밀려드는 수레국화 들판도 아닌, 아주 깊고 어두운, 짙푸른 심연을 마주하자 프시케는 숨을 죽였다.
적요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소리는 없어졌고 분노만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나가요.”
에우로스가 명령했다. 그의 음성은 낮았고,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편하다. 진실이라는 건 원래 그렇다.
그 밤, 홀로 누운 프시케는 완두콩을 숨긴 침대 위에 누운 공주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나도 불편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