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알프레드의 연가
공작저 주치의의 아들 알프레드 스노우는 리던의 왕립 의과대학에 다니는 수재였다.
재학 중 수석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고, 곧 있을 졸업식에서도 최우등상 수상이 예정되어 있을 정도로 똑똑했다. 해박한 의학 지식으로 학생 신분임에도 웬만한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등한 의학 성적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드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이 앓고 있는 상사병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공작저에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었다. 데본셔 공작저의 주치의는 아버지였지만 아버지가 은퇴한 후에는 그 자리를 자신이 이어받게 될 것이었다. 그랬기에 공작저의 사람들은 알프레드에게도 호의적이었다.
아버지가 에우로스 캐번디시를 치료하는 동안 알프레드는 그를 보조했다. 다친 지 한 달쯤 지난 시점부터는 에우로스의 완연했던 병색이 많이 가셨다.
의사로서 하면 안 되는 생각이지만 알프레드는 에우로스가 조금만 더 아프길, 조금만 더 누워 있길 바랄 때가 있었다. 그래야 그 핑계로 계속 공작저에 들락거릴 수 있을 테니까.
오늘도 알프레드는 공작저에 갈 채비를 하다가 거울 속 제 모습을 보고는 우울해졌다. 그가 문득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아버지를 닮아 일찍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조금쯤은 휑한 머리 한가운데를 더듬고 있자니,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패배감을 느끼는 운동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프록코트의 칼라를 턱 끝까지 빳빳하게 세웠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숨겨 보려 의상실에서 새로 지어 입은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머리카락을 갈라서 뒤로 넘겨보면 어떨까. 어정쩡한 길이로 떨어지는 바지의 끝단을 접어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방을 나섰다. 여전히 제 모습은 너무도 마뜩잖았다.
1)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제 외모에 불만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상쇄하는, 예를 들면 비상한 두뇌와 보장된 미래와 같은 것들 덕분에 알프레드는 리던의 중산층 계급에서 알아주는 신랑감이었다. 프시케 캐번디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별로 고민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알프레드는 여태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그건 프시케 캐번디시의 남편에게 가지게 된 열등의식이었다.
그는 같은 사내의 눈으로 보아도 멋진 남자였다. 만일 그가 고대에 태어났더라면, 에우로스의 아름다운 외모를 칭송하는 시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귀족 부부가 각자 연인을 두고 생활하는 것은 꽤나 보편적인 일이었다. 에우로스 캐번디시는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데, 그렇다면 프시케 캐번디시도 언젠가는 정부를 두게 될까? 그때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까?
알프레드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가 데본셔 공작저의 웅장한 정문을 통과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공작저는 크고 아름답고, 그리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아니,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근사한 남자의 아내가 자신을 좋아해 줄 리 없으니까. 알프레드는 저도 모르게 제 숱 적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프시케는 오랜만에 응접실에서 티 타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공작저로 출근해 세심하게 에우로스의 상태를 살피고 그녀에게 따로 자세히 경과를 설명해 주는 주치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티 테이블에 잔과 마멀레이드와 차가 놓였다. 프시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알프레드는 연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응접실에 자신과 프시케 단둘만 있는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 몽롱한 느낌이었다.
2)
“주치의 선생님께서 함께하지 못해 아쉽군요.”
프시케가 차에 우유를 따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알프레드와 그의 아버지가 응접실로 안내되는 순간, 공작저의 하인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캐번디시 방계 출신의 한 부인이 진통 중이라는 소식을 하인이 전달하자마자 그의 아버지는 차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다.
“아버지, 저도 함께 갈까요?”
“너는 이곳에 있어라. 모처럼 귀부인께서 마련하신 자리인데 우리 둘 다 참석하지 않으면 실례가 되는 거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알프레드는 뛸 듯이 기뻤다.
여태까지는 아버지의 뒤에서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허락된 자리에서 마음껏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버지도 매우 아쉬워하실 겁니다.”
프시케의 상냥한 말에 알프레드는 심상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하나도 심상하지 않았다.
그녀와 둘만 있는 자리다. 시선이 서로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부족한 머리숱도, 가느다랗고 긴 팔다리도, 딱 떨어지지 않는 바지 길이도 눈에 띌 것이다.
알프레드는 오늘 머리카락을 갈라 뒤로 넘기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바짓단을 접어 올리지 않았던 것도 후회했다.
늘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망설이기만 하다가 실행을 못 한 적도 많다. 그는 요사이 제 우유부단한 성격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곧 의과대학을 졸업하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졸업하고 나면, 그 후에는 어떻게 되나요?”
“아버지는 제가 보조하기를 바라십니다.”
알프레드의 대답을 들은 프시케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선생님도 그걸 바라시나요?”
“예?”
프시케의 질문에 알프레드는 조금 당황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난 의사였다. 데본셔 공작가를 비롯해 귀족들의 쏟아지는 진료 의뢰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알프레드는 졸업함과 동시에 그를 보조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일을 배우고, 환자를 나누고, 그러다 보면 아버지가 은퇴할 때쯤에는 알프레드가 완벽하게 아버지의 일을 대신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선생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신 것 같아서요. 혹시 넘겨짚었다면 사과할게요.”
알프레드가 당황하자 프시케는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조금 멋쩍어졌다. 제 앞에서 심하게 긴장하는 주치의의 아들이 안쓰럽게 느껴져 그녀는 계속 이것저것 묻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프레드는 프시케가 제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싫지 않았다. 프시케의 말대로 그건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다.
사실 알프레드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을 감히 행동으로 옮길 마음은 먹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이었다.
“……실은, 졸업한 뒤에 인더스에 가고 싶습니다.”
알프레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프시케 캐번디시 부인에게 최초로 털어놓는다고 생각하니 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인더스, 말씀이신가요?”
예상치 못한 답을 듣자, 이번에는 프시케가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한때는 갤러웨이 영지 밖으로도 나가 본 적 없던 그녀였다. 바다 건너 대륙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도 직접 가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브라이튼을 벗어나 홀로 해외를 여행하는 것은 남성들에게나 허락되었지, 여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예.”
“인더스에는 왜 가고 싶으세요?”
“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공부도 더 해 보고 싶고요. 또……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알프레드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무슨 공부를 하시고 싶은지 물어봐도 될까요?”
“어, 그게……. 인더스의 풍토병을 연구해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풍토병이요?”
“예. 인더스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잉그린트로 병을 옮겨 오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거든요. 아직까지 크게 문제가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프시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알프레드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을 머금은 듯한 캐번디시 부인의 검은 눈동자가 그렇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어떤 병이죠?”
“대표적인 것이 콜레라입니다. 원래는 인더스의 풍토병이었는데, 그곳에 다녀온 선원들이 퍼트리고 있지요.”
알프레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프시케는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찻물이 식었어도 대화는 뭉근하게 지속되었다.
알프레드는 뒷목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긴장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마님.”
클라리사가 프시케에게 눈치를 주었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네요. 즐거웠어요, 스노우 선생님.”
프시케의 인사에 알프레드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지체 높은 귀부인과, 그것도 제가 연모하는 여인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또 뵈어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알프레드는 내일도 아버지를 쫓아 공작저에 올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리고, 선생님.”
“예?”
“저는 선생님께서 인더스에서 꿈을 펼치셨으면 좋겠어요.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겠지만요.”
프시케가 살짝 웃고는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알프레드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렀다.
그렇게 해도 될까. 가도 될까. 아버지를 거역하고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에는. 졸업까지 시간은 아직 몇 주 정도 남아 있었다. 문제를 들었다 놓는 시간, 망설일 시간.
3)
알프레드는 살며시 왼쪽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었다.
그래, 생각할 시간은 아직 있었다.
4)
유리창 밖으로 석양의 색을 품은 노란 안개가 등을 비벼 댔다.
알프레드는 안경을 한 번 추켜 올린 뒤 천천히 그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가슴은 빠르게 두근거렸다.
1)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
2)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
3)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
4) T.S. 엘리엇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내용 부분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