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78)화 (78/146)

78. 대화법

“에우로스의 아름다운 몸에 그렇게나 아픈 과거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않나요, 캐번디시 부인?”

“그게 무슨 뜻이죠?”

“그럴듯한 앞모습 뒤에 추한 뒷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다니. 그것도 그 남자의 부인에게. 프시케는 저도 모르게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숨기기 위해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프시케는 며칠 전 고든레녹스 총리 관저에서 프레이아가 지껄였던 말을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의 음절, 음절을 쪼개어 곱씹어 봐도 자신이 무슨 비밀을 아는지, 에우로스에게 어떤 추한 뒷모습이 있다는 말인지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했다.

“음, 프시케. 말 타러 나가지 않을래요?”

하르모니아가 눈을 굴리다가 불쑥 물었다. 프시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연극을 보러 가는 건 어때요?”

“괜찮아요.”

“매일 집에 있으면서 지겹지도 않아요? 에우로스도 이제 어느 정도 회복했잖아요.”

“지겹지 않아요.”

프시케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한 뒤, 다시 묵묵히 독서에 열중했다.

그러나 하르모니아는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프시케의 손에 들린 책의 페이지가 오랫동안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가라앉지 않은 소문만 아니라면 프시케를 데리고 어느 부인이 여는 티 파티에라도 참석할 텐데. 에우로스가 피습당하고 난 뒤 소문은 오히려 날개를 달았다. 푸드덕푸드덕 날갯짓을 따라 말이 옮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문이 마음껏 날개를 펼쳐 범위를 넓히게끔 조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프레이아 고든레녹스였다. 먹잇감을 구하는 귀부인들의 질문에 오묘한 미소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인하지 않는 것은 대개 긍정이란 의미다. 침묵에 덧붙여진 그녀의 미소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들의 입을 막고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에우로스밖에 없었다. 그러나 에우로스는 지금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가 누워 있는 방에 쳐들어가 멱살이라도 잡아 해결을 종용하고 싶기도 했다.

“전에 내 책상에 새겨진 G.S.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 있었죠?”

프시케가 책에 묻고 있던 시선을 들어 하르모니아를 바라보았다.

갤러웨이에서 공작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르모니아가 자랑스레 보여 주었던 그녀의 책상. 그리고 그 책상 한 귀퉁이에 새겨진 철자가 떠올랐다.

“그거, 제 이름이에요.”

“이름이요? 하지만…….”

프시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하르모니아가 빙긋 웃었다.

“G.S.는 ‘조지 샌드’의 약자예요.”

“‘조지 샌드’라니요?”

“원래는 황금화살 클럽에 드나들기 위해서 만들었던 이름이에요. 에우로스가 지어 줬죠.”

“하지만 그곳은 신사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아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도움을 받아 신사복을 입고 출입했어요.”

“네에?”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던 프시케의 눈에 어렴풋한 호기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하르모니아는 그녀의 눈에 간혹 실리는 그 반짝반짝한 궁금증을 좋아했다. 최근에는 그 눈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제가 야심 차게 꺼낸 얘기에 흥미가 동했나 보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 놀랄 건 없어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들키면 안 되니까. 곧장 특별실로 올라가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죠.”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신사들의 숨겨진 모습들이 잘 보였거든요.”

“예를 들면요?”

하르모니아는 프시케가 연달아 하는 질문에 내심 즐거워졌다. 어느새 프시케는 책을 덮어 버리고 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디어스 백작 말이에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아내를 끔찍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유명하거든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미친 사람이었더라고요. 남자들끼리 하는 말로는, 하디어스 백작이 마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어떤 영애를 보게 됐는데 한눈에 반했대요. 그러면 정식으로 구혼했어야지, 그런 절차도 없이 얼마 뒤에 그 여자를 납치하듯이 제 영지로 데려가 버린 거예요.”

“그럴 수가…….”

“당연히 그 영애의 집안은 난리가 났고요. 그런데 별 수 있겠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그 사실이 알려지면 하디어스 백작과 결혼하지 않는 이상 그 영애는 영영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게 지금 그 부인이라는 거예요?”

“맞아요. 쉬쉬하면서 했던 결혼이라 그 내막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저 백작이 나이가 많으니 급하게 결혼했나 보다 생각하고 넘겼던 거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남자들은 어떻게 알죠?”

“하디어스 백작 본인이 술에 취해 말했으니까요. 남자들끼리의 같잖은 연대 의식 때문인지 빌어먹을 의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클럽 안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자기들만의 굳은 약속이라나 봐요.”

“세상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 부인이 너무 안됐어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남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 부인이 귀염받으며 살고 있다고 하지만, 누가 알아요? 그 여자는 지옥 속에 살고 있는지도.”

하르모니아는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아내에 대해 지껄이던 하디어스 백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창피한 일인 줄도 모르고, 아니, 실상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뿌듯해하는 꼴을 보자 너무나 기가 막혔더랬다.

더 기가 막혔던 건, 다른 신사들의 반응이었다. 그 누구도 하디어스 백작을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리고 예쁜 여자를 강탈한 그 행위에 동경과 찬사를 보냈다. 하디어스 백작은 남자들의 영웅이었다.

“있다고 다 보여 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주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말아요.”

“리어왕.”

하르모니아의 엄숙한 말을 프시케가 곧바로 살풋 웃으며 받았다.

그래, 모든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들리는 것도 전부는 아니다. 프레이아의 말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사이좋은 하디어스 백작 부부의 이야기처럼.

그러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반대편에서 다른 마음이 솟아올라 수평을 맞췄다. 그건 의심을 해결하고 싶은, 프레이아의 말을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었다.

“아, 그런데 황금화살 클럽에는 왜 드나들게 된 거예요?”

하나의 호기심이 발아하자 그 옆에 있던 다른 호기심들도 제각기 순을 틔웠다. 프시케의 물음 폭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건, 제가 소설을 쓰기 때문이에요.”

“소설이요?”

“네에. 에우로스와 사무엘은 알고 있어요. 클럽에 드나들기 위해서 털어놔야 했거든요.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프시케도 꼭 비밀을 지켜줘요.”

“어떤 내용의 소설인가요?”

“좀 복잡하긴 한데, 여주인공과 그 주변에 있는 세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여주인공이 상황과 감정에 끌려다니다가, 나중에 자기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가는 내용이에요.”

“상황이라면?”

“뭐, 신분이나 가문, 재력 같은 거죠. 여자들은 대부분 그런 것에 맞추어 결혼하게 되니까요.”

“그럼 감정은요?”

“욕망이에요. 자기 상황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몰두하는 거요.”

하르모니아가 대답하며 코끝을 찡그렸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이 꼼지락거렸다.

욕망. 어쩐지 입 밖에 내기 씁쓸한 말. 그녀는 소설을 써 나가면서 프레데릭에 대한 제 마음이 참으로 성숙하지 못했음을 필연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구애. 일방적인 동정. 그리고 일방적인 후원.

미숙했고 서툴렀던 사랑은 결국 욕망밖에는 되지 않았다. 프레데릭도 아마 그래서 밀려 나갔을 것이다. 제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서.

“그럼 나중에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간다는 건요?”

“그건 말이죠. 원래 나는 여주인공이 끌려다니던 상황과 감정을 전부 정리하고 홀로 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멋있잖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에우로스가 느닷없이 조연을 주인공으로 등극시켜 보라고 조언하지 뭐예요.”

“에우로스가요?”

“네. 여주인공 주위를 맴돌면서 그녀를 흠모하는 남자 조연이 있어요. 전개에 재미를 주기 위해 넣었던 인물인데요, 에우로스는 그 사람이 좋대요. 그래서 여주인공이랑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하르모니아의 생각은 어때요?”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그렇게 설정하지 않았거든요. 이제 와서 글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고요.”

“하지만 저도 에우로스의 의견에 동의해요.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남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요.”

“좋은 사람이에요. 쾌활하고 즐거운 사람이라서 여주인공을 웃게 만들어 주는 인물이지요.”

“그리고요?”

“착하고, 순수하기도 하고, 의외로 섬세한 구석도 있고요.”

“그렇다면 왜 망설이는 거예요? 그런 남자라면 여주인공에게 썩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게, 그 남자의 신분이 여주인공보다 낮거든요.”

“세상에, 하르모니아.”

“네?”

“아까 분명 하르모니아가 그랬잖아요. 상황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는 여주인공이라고.”

“…….”

“그런데 뭘 걱정하는 거예요? 이미 하르모니아의 소설 속 그 여성은 씩씩하고 용감한데요.”

수다를 멈추지 않던 하르모니아의 입술이 돌연 딱 닫혔다.

머나먼 인더스에만 현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하듯이, 현자도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제 앞에 앉은 현자를 보며 감탄했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대화법으로 지혜를 구했던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하르모니아에게는 인더스의 현자처럼 제3의 눈이 하나 더 생겼다.

그 눈을 번쩍 뜨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대화법의 달인, 물음폭격기 프시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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