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태풍 전 고요
에우로스는 아침 식사 중이었다. 식당에서 일찍 식사를 마친 프시케가 에우로스의 방에 들러 늦은 식사를 하는 그의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요즘 그들 부부의 일상이었다.
“그대와 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겠군요, 프시케.”
그를 대신해 칼등으로 달걀을 깨고 있는 프시케를 물끄러미 보던 에우로스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상에는 달걀 깨는 방향 때문에 전쟁하는 국가도 있다니까 말입니다.”
에우로스의 말에 프시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이내 생긋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가져다준 책을 읽었군요, 에우로스.”
프시케는 얼마 전 서점에 다녀오면서 책을 한 권 샀다. 스위프 경의 신간이었다.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에우로스가 협탁 위에 놓인 책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굉장히 신랄한 내용이더군요.”
그 책은 주인공이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또한, 여행기의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풍자소설이었다.
특히, 달걀의 둥근 쪽을 깨느냐, 뾰족한 쪽을 깨느냐 하는 문제로 두 나라가 수년간 전쟁을 한다는 챕터에서 에우로스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잉그린트와 갈리아 간의 무의미한 장기 전쟁을 꼬집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도 나도 달걀의 둥근 쪽을 두드려 깨니까,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의 농담에 프시케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문제도 있어요.”
“……그게 뭐죠?”
“당신은 우유를 먼저 붓고 그 위에 차를 따르잖아요. 그 습관은 정말 이상하다고요.”
그녀의 말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건 하르모니아도, 사무엘도 질색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먼저 따르고 우유를 섞어야 해요.”
“그건 싫어요, 프시케.”
“왜요?”
“그러면 꼭 맑은 물이 흙탕물처럼 변하는 것 같아서 별로예요.”
“우유에 차를 부으면, 차의 본래 색깔을 즐길 새도 없이 섞여 버리잖아요.”
프시케는 진지했다. 고집스레 꼭 다문 그녀의 입술을 보며 에우로스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고든레녹스 총리가 이 소설을 읽지 않기를 바랍시다.”
“어째서요?”
“여기서 외줄 타기로 수상이 된 사람이 아무래도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 총리 같거든요.”
에우로스가 속삭였다. 그건 아마 사실일 것이다. 스위프 경은 고든레녹스 총리를 극도로 경멸했으니까.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는 능력보다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총리가 저지른 실정을 파헤쳐 재판을 받게 한다면 곧바로 사형을 선고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는 무능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무능에도 불구하고 수상직을 연임할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프레이아와의 결혼으로 총리는 몇 년 후 잉그린트 역사상 최초로 삼선 연임에 성공하는 사람이 될 터였다. 그때가 되면 달걀을 깨는 방향이 아니라, 차에 우유를 붓는 순서 때문에 또다시 갈리아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소인국의 성질 더러운 왕비는 아마도 죽은 앤 여왕을 생각하면서 만든 인물이겠죠.”
프시케도 조용히 속삭였다.
그것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소설 속 왕비처럼 죽은 여왕도 물에서 구해 놓았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식의 억지를 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에우로스가 잔잔히 웃었다. 벽난로에서 이따금씩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깥은 아직 뼈 시리게 추운 겨울이지만, 곧 방 안에 도는 훈기처럼 따스한 봄이 올 테다. 날이 따뜻해지면 소설의 주인공처럼 가 보지 못한 곳을 여행해도 좋을 것이다.
잉그린트 남부의 바스는 어떨까. 온천이 솟는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때로는 열렬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면 내년쯤에는 채스웍 하우스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도번 해협을 건너 갈리아에 가 보는 것도 좋겠다. 프시케의 어머니를 짝사랑했던 대공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는 노르망 지역을 지나, 갈리아 수도 외곽에 지은 호화로운 궁전을 구경하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겠지.
“참, 봄이 되면 갤러웨이에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프시케가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갤러웨이 성의 주인이었고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그대 좋으실 대로.”
갤러웨이 성은 프시케의 부재로 현재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집사가 있었지만,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프시케가 직접 방문해 영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밀주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건 아쉽군요.”
에우로스가 말했다. 프시케가 생산한 위스키의 맛이 꽤 좋았기 때문이었다. 달이 유난히 밝던 밤, 술잔에 비쳐 일렁이던 달빛과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눈동자에 비쳐 술렁이던 달빛도.
“이제 직접 관리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프시케는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밀주를 빚던 장소 아래쪽에 농장이 하나 있어요.”
프시케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금징수원들과 단속반원들이 영지에 오면, 일단 그 농장 주인의 부인이 그 사람들을 초대해 차와 스콘을 대접하면서 한참 시간을 끌도록 했어요. 그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동안 농장주가 몰래 나와 빨간 깃발을 올리고요. 우리끼리의 약속이었죠. 그 깃발이 보이면 우리는 증류소 건물을 폐쇄하고 멀리 도망가는 거예요.”
“재미있네요.”
“덕분에 한 번도 벌금을 낸 적이 없었어요.”
프시케가 뿌듯해하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돌아가신 여왕 폐하께서 슬퍼하시겠군요. 그 돈이라면 드레스 몇 벌은 더 지으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 말에 프시케가 살풋 웃었다.
여왕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악당이었지만,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바람에 프시케는 에우로스를 만났다. 세상에는 영원한 악인도, 선인도 없다. 고운 것도 더러울 수 있고, 더러운 것도 고울 수 있다.
1)
“저는 작년까지 한 번도 갤러웨이 영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행을 많이 하게 되었네요. 리던, 더비셔, 그레트나 그린도요.”
“그래서 어때요?”
“네?”
“여행 말이에요.”
“음…… 잘 모르겠어요. 계속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잖아요.”
그건 그랬다. 그 여행들은 모두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단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처음 리던에 올 때, 채스웍 하우스에 들렀던 건 즐거웠어요.”
“그랬어요?”
“예상치 못한 방문이어서 설레기도 했고, 또 채스웍 하우스도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요. 더비 백작부인도 그곳에서 처음 만났고요.”
프시케는 처음 채스웍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경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에우로스와 결혼한 뒤, 죽 그곳에서 지내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곳을 감탄하며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에우로스는 생각을 바꾸었다. 연극은 싫지만, 연극을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녀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난번 함께 연극을 보러 가자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것을 그는 조금쯤은 후회했다.
“올여름에는 함께 이탈린에 가요.”
에우로스가 프시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병자 특유의 따끈한 체온이 고스란히 그녀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이탈린으로요?”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요.”
에우로스의 제안에 프시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에우로스가 말을 더했다.
“베니스, 베로나, 파도바, 피렌체, 시칠리아.”
그 말을 듣자 점점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번지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
프시케의 기쁨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에우로스가 열거한 도시들은 전부 셰익스피어 연극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연극을 싫어하잖아요.”
“맞아요. 그래도 이번 여행은 이탈린으로 갑시다.”
에우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은 싫지만, 연극을 좋아하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 정도는 괜찮다.
“베니스에서는 샤일록을, 베로나에서는 줄리엣을, 파도바에서는 캐서린을, 피렌체에서는 헬레네를, 시칠리아에서는 페르디타를 기리도록 해요. 무엇이든 그대 좋으실 대로.”
에우로스가 말하는 그때 사무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객석에서 무대로 뛰어 올라온 관객이 물었다.
“안토니오가 아니라 샤일록을 기리다니?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야?”
“나는 그 연극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 한 명을 지목하라면 샤일록을 꼽겠어.”
“왜? 유태인 주제에 잔인하기까지 하잖아. 살을 베어 내라는 발상도 끔찍하고.”
에우로스의 말에 사무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꾸했다. 사무엘은 잉그린트인이고, 귀족이었으며, 남자고, 그리고 유태인을 좋아하지 않는 잉그린트 국교회 신자였다.
“사무엘, 자신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하며 모욕하는 사람에게 아무 원한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이지.”
에우로스는 잉그린트인이고 남자였지만, 유태인과 다를 바 없는 천한 사생아였고, 무신론자였다.
“어쨌든, 이탈린에 갈 생각인가 보지?”
사무엘의 질문에 프시케가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여름에 에우로스와 함께 여행하기로 했어요.”
“그럼 나도 미리 준비해야겠군.”
사무엘의 밝은 갈색 눈동자도 함께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네가 왜?”
“그거야 당연히 나도 함께 갈 거니까.”
에우로스는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사무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대에 뛰어든 관객이 아니라 엄연한 ‘배우 3’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까.
사무엘이 프시케에게 물었다.
“캐번디시 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사무엘이 동행해도 좋아요.”
프시케는 스코틀린인이었고, 남편의 마음을 잘 모르는 여자였으며, 잉그린트 국교회로 개종하기 직전까지 만인에게 관대하라고 가르치기‘만’ 하는 로미아 교황청의 충실한 종이었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1막 1장 대사 일부 수정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