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75)화 (75/146)

75. 다행이다

프시케를 태운 마차가 리던에 진입한 시간, 마침내 에우로스가 눈을 떴다.

“헉, 에우로스!”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던 사무엘이 에우로스의 밭은 신음에 기겁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물었다.

“정신이 들어?”

“…….”

에우로스가 대답하지 않자, 사무엘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에우로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거 몇 개야?”

“…….”

“설마…… 말을 못 하게 된 건 아니겠지, 에우로스?”

사무엘이 울먹이며 재차 물었다. 여전히 손가락 세 개를 에우로스의 얼굴에 바짝 붙인 채였다.

“2.”

에우로스가 아주 작은, 쉬어 버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2? 이게 2로 보여?”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무엘이 급히 침대맡으로 다가가 줄을 당겼다.

이제 숫자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건가, 아니면 시력에 문제가 생겼나. 의사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던데. 거세게 울려 대는 종소리를 들은 의료진이 급하게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눈은 떴는데, 어쩐지 좀 이상합니다. 이걸 보고 ‘2’라고 했어요.”

사무엘의 말을 들은 주치의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등에 자상을 입었다고 해서 인지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군요.”

에우로스의 몸 곳곳을 이리저리 살피는 주치의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의사는 여러 번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들추어 보고, 비추어 보았다. 그가 세심하게 검사하는 와중에도 사무엘의 방해 같은 걱정은 그치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이라든가,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울상을 한 사무엘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에우로스가 피식 웃었다.

“저것 보십시오. 웃고 있잖아요.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

“글쎄, 그럴 리가 없는데. 상처는 아물고 있는 중이고, 아직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의식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치의는 호들갑 떠는 동네 과부를 보는 심정으로 사무엘을 일별한 뒤, 에우로스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간호사들이 남아서 붕대를 갈아 주는 동안에도 사무엘은 계속 미심쩍은 눈으로 에우로스를 바라봤다.

“내 기억에, 금광 수익 분배가 아마 8 대 2였지?”

간호사들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에우로스가 입을 열었다.

“뭐?”

사무엘이 눈을 끔벅거리며 되물었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는데.”

설마 그 뒤의 기억을 잃었나? 손가락 세 개도 두 개라고 답하더니, 기억마저 온전치 않은가 보다.

가짜 반역 사건도 잘 해결되고 이제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앞에 갤러웨이 성 정원의 진흙탕이 떠오른다.

“아니야. 6 대 4였어.”

기억을 잘 못 하는 것 같으니 일단 다시 한번 질러 보기로 하자.

사무엘은 새끼손가락을 마저 펴고 손가락 네 개를 만들었다. 진흙탕이 있어도 위에 코트를 펼쳐 깔고 건너면 되는 거지.

그러자 갑자기 에우로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천 몇 장을 집어 입에 대어 주었다. 얕은 기침이 그치고, 에우로스의 입에서는 다시 희미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기꾼.”

숨을 따라 웃음기 어린 말도 함께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자 사무엘은 네 개의 손가락이 펼쳐져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말아 접다가 그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먼저 헛소리를 한 사람은 저놈이다. 죽네 사네 해서 걱정을 시키더니 눈 뜨자마자 친구를 등쳐 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한 대 때려서 좀 더 오래 누워 있게 만들어야 하나.

“잘 있었어, 사무엘?”

부들부들 떠는 사무엘을 지켜보던 에우로스가 인사했다. 그 장난기 어린 낯간지러운 말에 사무엘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잘생긴 사람은 와병 중에도 미모가 죽지 않는가 보다. 오래 누워 있어 날카로워진 얼굴선에 허약함이 끼얹어지니 몹쓸 병에 걸린 미남 철학자 같다. 가녀린 우수와 병약한 매력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사무엘의 주먹이 사르르 풀렸다. 황금빛 머리카락의 병약한 로렐라이가 사무엘이 진흙탕 위에 펼친 코트를 이번에도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갔다.

더러워진 코트 뭉치를 끌어 올리며 사무엘은 진심으로 울 뻔했다. 멀쩡히 살아나서 정말 잘됐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인제라도 눈을 떠서 다행이야. 에우로스.”

6 대 4가 아니면 어때. 코트는 다시 세탁하면 되지.

* * *

대부분의 병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에우로스는 눈을 떴다가 곧 다시 잠들었다.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러할 것이다.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쪼그라든 폐는 두어 달 안에 완전히 회복할 겁니다. 상처 부위가 회복되는 속도도 빠른 편이에요.”

공작저 주치의가 비보를 듣고 달려온 프시케를 다독이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은 새신부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 누군들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프시케가 조용히 대답했다.

주치의 뒤에 서 있던 그의 아들 알프레드가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귀족이 아닌 알프레드의 귀에도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인 에우로스와 프레이아의 염문설이 돌고 돌아 들어왔다.

자리를 비운 아버지 대신 프시케의 발목을 치료하러 왔을 때, 기품 있고 단정한 미모의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알프레드의 심장은 난생처음으로 거세게 뛰었다. 잠시 잠깐의 인사 사이에 불쑥 끼어든 에우로스가 아니었다면 진료를 핑계 삼아 조금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정도였다.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공작의 아내가 될 여자라고 들었는데, 에우로스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는, 남자로서의 본능이 알려 준 것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에우로스가 결혼했다는 깜짝 소식이 광풍처럼 리던을 덮쳤다. 그리고 그제야 알프레드는 그때 그 야릇했던 분위기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들 부부의 불화설과 함께 에우로스와 총리부인 사이의 염문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왕의 장례식에 함께 참석한 뒤 부인을 먼저 돌려보낸 에우로스가 수시로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총리부인을 불러다 황금화살 클럽 내실에서 별짓을 다 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인.”

주치의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알프레드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놀리며 뒷걸음질로 방을 벗어났다. 시선은 계속 프시케 캐번디시의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참 착하게 생겼어요.”

난데없는 클라리사의 말에, 에우로스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고 있던 프시케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저 주치의 선생 아들 말이에요.”

“알프레드?”

“이름이 알프레드였나요? 저번에 들었는데 늙어서 자꾸 깜박깜박 하나 봐요.”

클라리사의 말에 프시케가 옅게 웃었다.

알프레드는 제화점에서 발목을 다쳐 돌아왔을 때 주치의 대신 그녀를 치료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선하고 똑똑해 보이는 인상으로 기억했다. 도수 높은 안경은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했지만.

“그런데 마님, 저 사람이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프시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연애에 관한 한 클라리사의 추측은 돌팔이 의사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그건 아니야.”

클라리사는 예전에 사무엘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그의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리고 급기야 나중에는 제가 사무엘을 흠모하는 줄 알았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또 알프레드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클라리사는 모든 남자가 프시케에게 사랑을 느낀다고 믿는, 착각의 요정이었다.

“이번엔 확실해요. 처음에 발목 치료하러 왔을 때도 좀 수상하다 했는데, 오늘 보니 맞아요. 마님을 보는 눈빛이 어찌나 애처롭던지요!”

“클라리사.”

“진짜예요. 인사하고 나서도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더라니까요.”

클라리사는 진심이었다. 남의 연애에 관한 한, 언제나 클라리사는 진심이었다. 그동안 몇 번 헛발질을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사무엘은 워낙에 잘 웃고 장난도 많이 치니까 착각했던 거고, 프시케 마님은 자주 속을 숨기니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알프레드인지 뭔지 하는 주치의 아들은 딱 봐도 마음이 조각처럼 얼굴에 새겨지는 사람이었다.

“누가?”

그 물음에 프시케의 손놀림이 뚝 멎었다. 클라리사 쪽으로 잠깐 향했던 시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누구의 눈빛이 그렇게 애처로웠어, 클라리사?”

잠에서 깬 에우로스가 짓궂게 물었다. 아주 작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또 부드러웠다.

“아이고, 주인 나리!”

클라리사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이제 깨셨어요? 저희도 막 도착했어요. 주무시고 계시길래 깨우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이리 금방 일어나셨어요? 주치의 말로는 잠든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던데. 혹시 제가 너무 크게 말했나요? 그래서 일어나신 거예요?”

에우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프시케와 둘이 있고 싶은데 잠시 자리 좀 비켜 주겠어, 클라리사?”

원하는 게 있는 웃음. 프시케가 속으로 그 말을 속삭이며 살짝 웃었다.

“물론이지요. 오랜만에 두 분이 만나셨으니까 어서, 음, 그럼 저는 나가 보겠어요.”

클라리사가 당황해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볼을 붉혔다. 그러고는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게 뻔한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방을 나가 버렸다.

“괜찮아요?”

프시케가 물었다. 에우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아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에우로스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신경 쓰게 해 미안해요.”

프시케는 ‘신경 꺼.’라고 말하던 잿빛 머리카락의 초라한 소년을 떠올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에우로스는 괜찮지 않고, 아픈 상태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달라진 그 대답이 못내 기뻐서 그녀는 걱정도 잊고 활짝 웃어 버렸다. 정말 다행이라는 말을 쉼 없이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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