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잃을 것 없는 사람들
데본셔 공작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장남이자 사생아인 에우로스 캐번디시와 차남이자 적자인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그들이다.
낳아 준 어미가 달라서인지 형제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적당히 섞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섞이는 것보다는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둘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더 많긴 했다.
그러나 이번에 형제는 마침내 공통점을 만들어 냈다. 매음굴에서 칼잡이 살인마 잭에게 당하고 돌아온 데이모스의 뒤를 이어, 에우로스까지 황금화살 클럽 앞에서 웬 실업자에게 칼에 맞은 채 공작저로 실려 온 것이다.
“일단 할 수 있는 처치는 클럽에서 했습니다.”
에우로스를 공작저까지 데려온 황금화살 클럽의 매니저가 데본셔 공작에게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매우 송구한 얼굴을 한 채였다.
“목숨에는 이상이 없는 게 확실한가?”
데본셔 공작의 물음에 매니저는 황급히 대답했다.
“부상 정도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괜찮으실 겁니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다. 에우로스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호흡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도 문제였다.
조금 더 빨리 발견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시위대 놈들이 일을 벌이고 나서 전부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그는 도로가 피로 흥건히 젖을 때까지 길 위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에우로스는 분 단위, 초 단위로 시간을 나누며 살았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수배하고, 정보를 끌어모으고, 그 정보를 토대로 일을 지시하고, 그 일이 해결되면 다시 새로운 일을 꾸미고.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프레이아 고든레녹스 총리부인을 불러다 마음에도 없는 환담을 나누어야 했다. 그게 가장 귀찮은 일이었다.
“마차도 타지 않고 시위대 앞을 걸어가다 당한 거라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데본셔 공작이 혀를 끌끌 찼다. 매니저가 계속 자책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매니저는 늘 마차로 움직이던 평소와는 달리 걷겠다는 그를 차마 말리지 못했다. 제임스 몽고메리 총독의 편지는 길게 나열된, 난해하고도 어려운 문장 끝에 찍은 마침표였다.
마침표와 그다음 문장 사이에는 마땅히 짧은 공백이 있어야 한다. 에우로스가 원하는 공백의 순간에 그가 참견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참으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침표를 찍자마자 운명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 뒤에 새로운 글자를 바싹 붙여 적어 나갔다. 그것도 피에 적신 깃펜으로.
클럽의 매니저는 이 일을 되도록 늦게 신고할 작정이었다. 여러 정황을 살폈을 때, 소문은 가급적 늦게 퍼지는 것이 좋았다.
또, 당장 급한 건 에우로스의 회복이지 가해자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여왕 위에 있는 캐번디시를 해한 범인은 언제든 잡힐 테니까.
그러나 성질 급한 데본셔 공작은 한시도 참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는 경시청장 앞에서 펄펄 날뛰었다. 물론 데이모스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비밀리에 가진 회동이었다.
그 덕에 사건이 일어난 지 하루 만에 에우로스의 등에 칼을 꽂고 달아난 남자는 쥐와 벌레와 자식들이 들끓는 초라하고 더러운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온몸을 칼로 난자해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공작은 자비를 베풀었다. 그의 관대한 처분으로, 자식들과 생이별한 범인은 쥐와 벌레가 들끓는 초라하고 더러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서야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었다.
“몸조심해라.”
“예.”
“밥그릇을 뺏기는 자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작은 일전에 에우로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밥그릇을 뺏긴 자들은 답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데본셔 공작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에우로스의 얼굴을 힐끗 보고 방을 나섰다. 잃을 게 없는 자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감히 제 아들에게 칼을 들고 설친 놈을 죽는 날까지 감옥에 처박아 두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처사였다. 그가 튈 곳이라고는 곰팡이로 뒤덮인 독방의 지저분한 벽밖에 없을 테니까.
* * *
여기 잃을 게 없어진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데본셔 공작은 고작 에우로스를 쓰러지게 만든 범인 하나를 감옥에 쑤셔 박아 놓고 뿌듯해하고 있지만, 밥그릇을 뺏긴 자보다 더 큰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이 또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말콤 월레스를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블랙워치를 쓸어버린 건 잉그린트 육군 역사상 고무적인 업적이야. 정말 잘했어.”
랑글로우에 주둔한 잉그린트 제13보병연대의 연대장은 요즘 조금만 건드려도 웃음을 톡 하고 터트릴 정도로 행복한 상태였다. 그는 이 일에 제일 큰 공훈을 세운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위가 너무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건방지긴 하지만 고문 실력 하나는 브라이튼 섬을 통틀어 최고인 데다가, 나이젤 로스를 겁박해 블랙워치가 주둔한 곳을 알아내고 마침내 그것들을 타도한 데이모스 캐번디시.
그 덕분에 연대장은 1계급 특진, 아니, 2계급 특진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보잘것없는 삶에 찾아온 기적과 같은 인물이 바로 데이모스였다.
“…….”
데이모스는 연대장이 대접한 싸구려 차를 한 입 마시려다가 역한 냄새에 찻잔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조심성 없는 행동에 찻물이 벌컥 넘쳐 테이블을 적셨지만 연대장과 데이모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네도 이번에 진급하게 될 거야.”
연대장의 말에 데이모스는 얼굴을 구겼다. 그까짓 진급, 안 해도 그만이다. 기껏 에우로스와 프시케를 날려 버릴 기회가 어이없이 날아간 게 뼈아플 뿐이지.
나이젤이 작성한 문건을 가지고 리던으로 향하던 병사 둘은 행방불명되었다가 어제 부대로 돌아왔다. 두 명 다 시체가 된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몸을 수색했지만 제가 들려 보낸 서신은 사라져 있었다.
데이모스는 다시 회군하여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의 진군을 막는 것은 늘 ‘에우로스의 존재’다.
바로 그때, 에우로스가 지금처럼 대단해지지 않았을 때, 고작 사생아뿐이었을 때 망가트렸어야 했다. 망가트리지 못한다면 죽였어야 했다. 그가 넘지 못하는 것은 누구도 넘지 못하도록.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미래였다.
이미 늦었지만 데이모스는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것도 용기라면, 그런 의미에서 데이모스는 겁쟁이였다. 그는 제동하는 법을 몰랐다. 그것은 데이모스와 프레이아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언제가 되었든, 그는 장미 정원에서의 그 일을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데이모스 인생에 있어 첫 상실의 시대였던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심장에 대못이 박힐 사람은 에우로스가 될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자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데본셔 공작의 그 생각은 옳았다.
* * *
“어휴,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예요.”
클라리사가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말을 뱉었다. 전운이 감도는 것처럼 팽팽하게 조여들었던 마차 안의 공기가 일순간 확 풀어졌다.
“별일은 없겠지요? 네?”
한번 입이 트이기 시작하자 클라리사의 수다도 거침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어떤 미친놈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사람에게 칼을 휘둘러요? 그것도 귀족에게? 지금쯤은 범인이 잡혔을까요? 누굴까요? 곧바로 목을 매달아서 본보기로 삼아야 해요.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결하면 될 것이지 악질도 악질도 그런…….”
“클라, 클라리사. 그, 그만 좀.”
프시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프레이아가 보낸 서신을 받아 본 순간부터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상태였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을 때 조금 비틀거리는 것처럼, 오랜만에 수틀을 들면 바늘 쥔 손이 헛도는 것처럼 말이 비틀거리고 헛돌았다. 그래서 목소리도 굽 높은 신발 위에 선 것처럼 후들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에우로스는 건강하니까 금방 털고 일어날 거예요. 데이모스도 그랬잖아요.”
얼핏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신체 말단 부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새파랗게 질린 프시케의 손끝을 들여다보던 하르모니아가 조용히 위로하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미세한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버지도, 사무엘도 아닌 프레이아가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뭐지?
칼에 찔렸다던 에우로스의 상태가 가장 큰 걱정이었지만, 그보다는 좀 못 미치게 하르모니아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이 프레이아 고든레녹스라는 사실이었다.
에우로스와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사무엘 스태포드였다. 그러므로 이 일을 알리기 위해 가장 빨리 채스웍 하우스로 서신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사무엘 외에는 없었다. 사무엘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 아버지, 혹은 황금화살 클럽의 매니저가 대신 서신을 쓸 수도 있겠지만.
사무엘도, 데본셔 공작도 아닌 프레이아 고든레녹스가 에우로스의 피습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의 아내에게 제일 먼저 서신을 보냈다. 프레이아가 프시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할 리는 절대로 없었다.
과시와 도발, 그리고 도전. 그게 목적이라면 프레이아의 재빠른 행동을 납득할 수 있다. 납득은 할 수 있지만 정말 추잡하고 지긋지긋하다.
에우로스의 행동은 납득도 불가하다. 토마스에 의하면, 그는 아내를 먼 곳으로 보내고 매일같이 프레이아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래서 프레이아와 사적으로 친밀해진 건가. 이제부터 친구와 투자자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놀아 보겠다는 거야, 뭐야.
그럴 거면 결혼하기 전에 그랬어야지. 그때는 프레이아가 아무리 유혹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더니. 결국 에우로스도 캐번디시 성을 달자마자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진정한 캐번디시 가문의 남자가 된 것이다.
프시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리던에 도착하면 에우로스와 프레이아가 친하게 지낸다며 입방아 찧는 인간들을 수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하르모니아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꼼지락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프시케가 다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마차가 조금 더 빨리 달렸으면 좋겠어요.”
클라리사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마차의 벽을 쾅쾅 쳤다. 말들이 속력을 더 내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이 달리는 길 뒤편으로부터 말 한 마리가 빠르게 달려와 마차를 지나쳤다. 말 등에 타고 있는 남자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여자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잠시 스쳤던 말과 마차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저만치 앞서가던 말은 지평선 너머로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