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73)화 (73/146)

73. 고난의 행군

고난의 행군. 최근 며칠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다.

사무엘은 잠시 붙였던 눈을 떴다. 그의 옆에서 에우로스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있었다.

“아직이야?”

사무엘이 눈을 벅벅 비비며 물었다. 에우로스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이 아니었다. 핏발 선 눈과 재가 떨어져 엉망이 된 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사무엘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곧 오겠지.”

에우로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들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로 내던졌다.

그들은 현재 제임스 몽고메리 총독으로부터의 서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데이모스가 보낸 전령의 행방을 쫓은 지 나흘이 지났다.

황금화살 클럽의 내실은 시가 연기로 가득했다. 나흘 동안 에우로스가 증기기관처럼 쉼 없이 뿜어 올린 것이었다.

사무엘이 따가운 눈을 몇 번 끔벅였다. 그러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겹겹이 시공된 작은 창들을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다. 좁은 창문을 통해 축축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안개처럼 낀 시가 연기를 이리저리 몰며 돌아다녔다.

“만일, 만일 말이야.”

에우로스는 잠자코 사무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데이모스가 보낸 그 문서가 고든레녹스 총리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글쎄.”

에우로스는 여왕의 장례식에서 만났던 총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프시케를 탐색하던 그의 시선이 꽤 불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프레이아의 남편은 그 자신의 안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방해되는 사람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프레이아를 계속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왕이 사망한 이후 고든레녹스 총리가 프시케 캐번디시를 정적으로 규정할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그 말도 안 되는 서류가 총리에게 쥐어지면, 그는 고민하지 않고 칼을 휘두를 것이었다.

“그럼, 우리 다 죽겠지.”

에우로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사무엘은 표정을 구긴 채 못 들은 척했다.

사무엘이 데본셔 공작저에 드나든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10년은 길고,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에우로스였다.

10년간 행운의 여신이 편애해 준 덕에 에우로스는 부자가 되었고 이제 귀족까지 되었다.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잘생긴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출 것이다. 여신도 여자니까,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때, 일정한 규칙성을 띤 노크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에우로스가 급히 문을 열고 서신을 받아 들었다. 서신을 펴자 사무엘이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었다.

“…….”

내용을 확인한 둘은 침묵했다.

“집에, 가야겠군.”

사무엘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에우로스는 고개를 대충 까닥이고는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사무엘이 내실을 떠나며 제대로 문을 닫지 않은 탓에, 바람이 굴리던 시가 연기가 훅 빠져나갔다. 모호한 안개 같던 연기가 걷히자 시야가 명료해졌다. 에우로스는 새로이 등장한 선명한 세계를 음미하며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이번에도 데이모스가 올린 연극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위조된 서신 원본을 품에 안고 리던으로 향하던 배우 두 명이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이 옳았다. 행운의 여신도 여자였다.

* * *

에우로스는 황금화살 클럽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그를 태우기 위해 클럽 앞에 서 있던 마차를 물린 채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프시케 캐번디시를 잡기 위해 데이모스가 놓았던 덫을 치워 냈다. 비겁하고 교활한 음모는 그대로 묻혔다. 늘 그랬듯, 그것은 에우로스에 의해 단단히 봉인된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곧 채스웍 하우스로 돌아가야겠다. 하르모니아가 잔뜩 불만을 쏟아 낼지도 모르겠다. 프시케는 아마 늘 그렇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풋 웃어 주겠지.

사무엘을 데리고 갈까. 그곳에 더비 백작부인이 있다는 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에우로스는 발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어서 데본셔 공작저에 가서 떠날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도 함께 보내지 못했는데, 리던을 출발하기 전에 그럴듯한 선물을 준비하는 게 먼저다. 이번에는 경매장에 대리인을 보내는 대신, 본드 스트리트의 단골 상점에서 직접 선물을 골라 보고도 싶다.

앞쪽에 시위대가 보였다. 제법 많은 수의 인원이 잔뜩 화가 난 채 발을 쾅쾅 구르고 있었다. 에우로스가 경영하는 직물 회사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얼마 전까지 모직물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에우로스가 들여오는 값싸고 질 좋은 인더스산 면화 때문에 공장이 문을 닫아 졸지에 생계를 잃었다.

마차를 탈 걸 그랬나.

에우로스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최근 시위대 활동이 더 극성이었다. 모직물 공장이 폐쇄되면서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은 점점 테러의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강도도 더 심해졌다. 면직물 옷을 입은 사람들을 공격하고, 면직물 상품을 파는 상점에 침입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인더스산 면화 수입을 금지하라!”

“해고된 노동자들의 생계를 보장하라!”

황금화살 클럽 앞은 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에우로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역시 분노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저기, 에우로스 캐번디시가 있다!”

남자가 달렸다. 그리고 금세 에우로스의 등 뒤에 도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에우로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깔린 돌 사이사이로 끈적한 핏물이 흘렀다. 검붉은 피를 보자마자 제가 한 짓을 깨달은 사람의 분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우물쭈물 뒷걸음질 치던 남자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웅성웅성하던 시위대도 곧장 해산되었다.

소리와 분노가 사라졌다. 에우로스가 눈을 느리게 떴다. 시야는 다시 희미해졌다.

* * *

프레이아는 요 며칠 연락이 없는 에우로스를 기다리다 기어이 저택을 나섰다.

황금화살 클럽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그녀가 발견한 것은 핏자국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들이 선의 형태를 그리며 안쪽까지 주욱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한참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클럽 내부에서 다급하게 움직이는 발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렸다. 고함 소리도 왕왕 터졌다.

“에우로스 님을…….”

“……이리로…….”

불분명한 외침 중간중간에 에우로스의 이름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왔다. 프레이아는 자석에 이끌리듯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핏방울이 만들어 낸 선을 밟으며 그녀가 클럽의 내실에 들어섰다. 평생 맡아 본 적 없던 냄새가 확 끼쳐 들어왔다. 비릿하고 짠 냄새였다.

“에우로스!”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프레이아가 이내 에우로스를 찾아냈다. 클럽의 매니저와 경비들이 피로 얼룩진 흰 천을 들고 그의 곁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아래쪽을 보았다. 굽 높은 구두의 앞코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제야 프레이아는 제가 밟았던 피가 에우로스의 것임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었어?”

클럽 매니저가 에우로스의 옆에 서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프레이아는 지체 없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새된 비명을 지르자 매니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내실 밖으로 이끌었다.

“클럽 앞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니?”

“누가 에우로스 님을 칼로 찌르고 도망간 것 같습니다.”

“뭐?”

단순히 다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프레이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잡힌다면 총리 직권으로 사형을 언도해도 모자라다.

“경시청에 연락했어?”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본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벌건 대낮에 대로에서 캐번디시 성을 가진 남자를 칼로 찌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매니저는 몇몇 인물들의 이름을 잠시 떠올리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계획된 범죄가 아닌 우발적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신고가 늦어도 범인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데본셔 공작의 아들이니 범인은 반드시 잡힐 수밖에 없다.

그의 대답에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 프레이아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내가 들어가 봐야겠어. 에우로스의 옆을 지켜 주어야 해.”

“고든레녹스 부인.”

매니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비키지 못해?”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의사를 불렀으니 치료가 끝나고 회복하시거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의 고개가 돌아갔다. 곱게 단장한 프레이아의 손톱에 긁힌 뺨 위로 핏방울이 맺혀 올라왔다.

“지금 감히 누구 앞을 막아서는 거야?”

프레이아가 앙칼지게 덤벼들자, 얼얼한 한쪽 볼을 쓰다듬던 매니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 보십시오.”

프레이아는 끝까지 그를 쏘아보며 다시 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에우로스는 소파를 붙여 만든 침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는 못한 듯했다.

가느다란 숨을 따라 환부를 덮은 붕대로 피가 순식간에 배어 나왔다. 동시에 프레이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핏빛 눈물을 머금었다.

“에우로스.”

프레이아가 떨리는 손으로 깨끗한 붕대를 찾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가 넓게 올려놓은 붕대를 걷어 냈다. 피에 물든 천이 사라지자 에우로스의 등이 온전히 드러났다.

문득 프레이아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녀는 붕대를 손에 꽉 움켜쥔 채, 에우로스의 몸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핏빛이 사라진 보랏빛 눈동자가 경악을 머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프레이아의 손에 있던 붕대를 낚아챘다. 그리고 칼이 벌려 놓은 상처 사이로 쉼 없이 솟구치는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의사가 도착했다.

프레이아는 제게 소리친 자를 향한 들끓는 화를 눌러 참았다. 의사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어떤가요?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아직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호흡 상태를 보니 폐를 찔린 것 같고, 출혈량도 극심해서 말입니다.”

의사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조금 더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건, 왜 이런 거죠?”

프레이아의 예쁜 손톱이 짚은 곳은 에우로스의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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