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베드로의 죽음
“말콤, 지, 지금 당장, 여기, 여기서 빠져나가.”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이젤이 창밖을 살피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말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이젤의 옆에 섰다. 바깥을 탐색하는 말콤의 눈빛은 제법 날카로웠지만, 그는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제발, 제발, 아, 아무것도 묻지 마. 빠, 빨리, 얼른 도망가.”
“나이젤, 무슨 일 있어?”
말콤은 사시나무 떨듯 하는 친구의 어깨를 꼭 붙잡았다. 나이젤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곧, 곧, 이, 잉그린트 군대가, 그, 그놈들이, 여, 여길, 덮치러 오, 올 거야.”
“…….”
나이젤의 말에 말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네가?”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 진심이야. 나는, 저엉, 정말…….”
말콤의 질문에 나이젤이 시선을 아래로 푹 떨구며 웅얼거렸다.
말콤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여러 번 핥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제대로 된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었다.
네가 우리 모두를 배신했냐고, 친구인 나마저도 배신했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목구멍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높은 담벼락에 갈고리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말콤도 사태를 인지했다. 나이젤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럴, 시, 시간 없어. 어, 어서, 어서, 말콤.”
나이젤이 재촉했다. 말콤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소리를 내자 목 안쪽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 저 담벼락을 긁어내리고 있는 갈고리처럼.
“나 혼자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
“다른 사람들은 죽이고 나 혼자 살아남으라고?”
“어차, 어차피 네가 여, 여기 있다고 한, 해서 다른,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게, 사는 건 아니야.”
“나이젤, 너 정말…….”
말콤은 끝까지 나이젤을 비난하지 못했다. 나이젤은 눈을 꾹 감았다. 부끄러워하지 마. 아비게일의 차분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자꾸 들려왔다.
“프, 프시케 캐번디시가, 그녀, 그 여자가 위험해.”
“지금 뭐라고 했어?”
말콤이 총칼로 무장하다 말고 휙 돌아보았다.
“데이모스, 데이모스 캐번디시, 그, 그 새끼가 프, 프시케를 노리고 있는, 있어. 네, 네가 그녀를 왕, 여왕으로 추대, 추대해 반, 반역을 도모했다는, 그, 그런 혐의를 씌울 거, 거든.”
“뭐? 그게 사실이야?”
“어차피, 어차피 이, 이곳은, 이제 가망, 가망이 어, 없어. 더, 더 큰 희생을 피할, 피해야 해. 그, 그러려면 넌, 네가 잡히, 잡혀서는 아, 안 돼.”
나이젤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시력을 잃은 한쪽 눈동자가 일순 더 탁해 보였다.
“어서, 어, 어서 가, 가서 프시케를 구하, 구해.”
* * *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위가 이끈 잉그린트 제13보병연대는 나이젤 로스가 내어 준 길을 따라 블랙워치에 당당히 입성했다.
잉그린트 군이 흘린 피의 양은 매우 적었다. 나이젤이 닦은 길 위에는 블랙워치 부대원들의 피만 낭자했다.
혈투를 뒤로하고 데이모스는 곧장 말콤 월레스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에우로스와 프시케 캐번디시를 무너트릴 불륜과 반역의 증거를 찾아내었다.
생각보다 나이젤은 치밀한 자였다. 스코틀린 고대어를 이용해 암호를 만들고, 그 암호로 문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암호가 서류의 신빙성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부대로 바로 복귀하지 못하고 문서를 해독하는 데 시간을 하루 이틀 더 쓴 건 데이모스에게 짜증 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프시케 캐번디시와 말콤 월레스 사이에 오갔던 사랑의 밀어와 반역 모의는 완벽하게 해독되어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손에 들어왔다. 데이모스는 조작된 서신을 곧장 크리스티안 고든레녹스 총리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서신이 총리에게 무사히 전달되는 순간 프시케 캐번디시는 반역 누명을 쓰고 리던 탑으로 끌려갈 것이고, 그걸 묵과했다는 책임을 물어 에우로스 또한 치죄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법학 수업에서는 반역을 묵인하는 것도 반역이라는 점을 똑똑히 가르쳤다.
1막 아비게일 몽고메리를 이용한 나이젤 로스의 포섭
4막 프시케와 에우로스의 몰락
3막이 끝나 가고 있다. 종막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2막에서 열연해 준 배우와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다.
“오랜만이야, 나이젤 로스.”
데이모스가 한가로이 인사했다. 나이젤은 두려움에 움찔 몸을 굳혔다.
밤마다 데이모스의 목소리는 수천, 수만 개 벌레의 형상으로 조각조각 나뉘어 나이젤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을 잘 수도, 맨정신으로 깨어 있을 수도 없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 아비게일은?”
“아.”
“아비게일, 아비게일은?”
나이젤이 재차 물었다.
“그 전에 하나 묻지, 나이젤 로스.”
데이모스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말콤 월레스는 어디로 빼돌렸어?”
“…….”
“응?”
“그, 그게 무슨 마, 말이야. 말콤, 말콤 월레스를 왜, 왜 내, 나에게서 찾는, 찾아?”
나이젤은 부정했다. 그러나 그 항변에는 힘이 없었다. 미약해진 심신은 공포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네 친구는 개처럼 떠돌다 결국은 잡히게 될 테니까.”
데이모스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의 총구가 향하는 과녁은 에우로스와 프시케지, 말콤 월레스가 아니었다. 도망을 가든, 도망가다 죽든, 그가 알 바도 아니고 아쉽지도 않았다.
연대장은 블랙워치의 수장을 놓친 것에 실망하겠지만 데이모스는 아니었다. 군대에서 아무리 진급해 봐야 데본셔 공작위에 비할 수는 없었다.
“아비게일 몽고메리는 너 때문에 신세를 망치게 될 거야. 이 배신자 새끼야.”
하지만 나이젤 로스는 봐줄 수 없었다. 말콤 월레스가 무사히 아비규환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이젤 로스의 협조.
“그게, 대, 대체 무슨, 무슨 말인, 말이야?”
“나는 신사답게 약속을 지켜 아비게일을 고문실에서 빼내 줬지. 그녀는 지금 아늑한 여인숙에 있고, 네가 리던까지 서류를 무사히 전달하면 곧바로 풀려날 예정이었어. 그런데 네가 말콤 월레스를 살려 주고 우리를 배신했으니 그 여자를 무사히 가족에게 되돌려 보내겠다는 약속도 지킬 필요가 없어졌잖아. 네 덕분에 내 병사들이 포식하게 되었으니 뭐, 그건 잘된 일이지. 안 그래도 네 전 약혼자를 보고 침 흘리는 새끼들이 많았거든.”
“그런, 그런…….”
나이젤은 더 대답하지 못했다. 아비게일을 지키려다 동료들을, 동료를 지키려다 아비게일을 나락으로 빠트려 버린 것이다.
결국 자신은 모두를 배신하고 모두를 지키지 못한 인간이 되었다. 힘을 잃은 몸이 풀썩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긴, 애초에 동료들을 배신한 스코틀린 반군 새끼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생각한 내가 순진했던 거지. 사람을 너무 잘 믿어, 내가.”
그 앞으로 성큼 다가선 데이모스가 구둣발로 나이젤의 손등을 짓이겼다.
“널 믿고 리던에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또 화가 나네? 응?”
나이젤은 눈을 부릅떴다. 피눈물이 쏟아졌다. 데이모스는 혀를 쯧 차고는 문 앞에 서 있던 병사에게 턱짓했다. 병사가 곧바로 달려왔다.
“데리고 가서 거꾸로 묶어 놔.”
데이모스의 지시에 따라 나이젤은 바깥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른 블랙워치 부대원들이 매달린 곳의 정반대 쪽에 홀로 거꾸로 매달렸다. 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스코틀린의 겨울은 매우 축축하고 어둑했다. 웬일로 안개가 끼지 않고 밝게 개인 오늘의 하늘이 비정상적인 거였다.
그 비정상적인 날씨 때문에 햇빛 아래 묶인 동료들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오면 좋겠다. 차마 감지 못하고 죽은 옛 동지들의 눈꺼풀이라도 덮어 주게.
거꾸로 매달렸던 나이젤의 몸이 물고기처럼 몇 번 펄떡거렸다가 잠잠해졌다. 피눈물로 굳은 눈이 크게 벌어진 채 그대로 경직되었다.
첫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다음 날 스코틀린 전역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눈은 공평하게 음지에도 쏟아져 주었다.
* * *
암호를 해독하는 하루 이틀의 시간이 데이모스의 짜증을 돋우었다면, 아비게일 몽고메리에게 그 하루 이틀은 구원의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병력이 블랙워치 소탕을 위해 부대를 떠나 있었던 그때, 정체 모를 사람들이 랑글로우에 들이닥쳐 아비게일을 구출했던 것이다.
그녀가 고문실이 아니라 여인숙에 감금되어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비게일을 구출한 사람들은 에우로스가 고용한 용병들이었다. 부대 근처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던 용병들은 아비게일이 고문실에서 끌려 나와 근처 여인숙으로 옮겨졌다는 첩보를 듣자마자 그곳을 급습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데이모스가 돌아오고도 남을 시각이었지만, 그때 그는 암호 해독을 위해 아직 블랙워치에 있었다. 붕 떠 버린 그 짧은 시간을, 에우로스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리하여 나이젤 로스는 결국 아비게일을 구한 셈이 되었다.
아비게일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로스는 곧장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몽고메리 총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그리고 총독은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밤중에, 그것도 저택에서 딸이 갑자기 사라진 후, 백방으로 그녀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아비게일이 전 약혼자인 나이젤 로스와 내통한 혐의로 랑글로우의 군부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총독은 딸에게 지워진 혐의를 즉각 부인했다. 또한 예고 없는 납치 감금에 대해 제13보병연대의 연대장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연대장은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눈치를 보느라 중앙정부에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때를 틈타 에우로스가 보낸 사람이 총독에게 접근했고, 총독은 곧바로 리던으로 마차를 달렸던 것이다.
“총독 각하.”
에우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화살 클럽에 도착하자마자 아비게일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총독이 급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이 은혜는, 반드시…….”
총독의 지친 눈에 잠시 물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에우로스는 총독이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 은혜, 지금 당장 갚아 주셔야겠습니다.”
에우로스가 말했다. 총독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무엇입니까?”
“데이모스 캐번디시가 보낸 전령이 잉그린트 영토에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조처해 주십시오. 스코틀린 군권과 치안권은 각하께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시겠지요.”
몽고메리 총독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몹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빠른 말을 준비해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