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든 애로우 (71)화 (71/146)

71. 황금빛 머리카락의 로렐라이

“미쳤군.”

에우로스가 신경질적으로 서신을 구겨 내팽개쳤다. 사무엘은 어안이 벙벙해 에우로스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에우로스는 대개 단정한 편이다. 시가 끄트머리를 잘라낼 때도 포장된 잎사귀 하나 나달거리게 하지 않고 정밀하게 마무리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도 코트 꼬리에 주름이 지지 않게 세심히 펼치곤 한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차림새 전부를 점검하고 우아하게 다리를 뻗는다.

서신을 읽을 때도 그의 단정함은 바래지 않는다. 다 읽고 난 편지를 고이, 각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접어 정리하는 것도 에우로스의 습관 중 하나다.

사무엘은 그가 읽은 서신을 구기는 것을 오늘로써 두 번째 보았다. 첫 번째는 프시케 스튜어트를 구하러 달려갈 때였고, 두 번째는 지금이다.

그 말인즉, 지금 에우로스가 내던진 저 서신에 분명히 지난번 사건에 준하는, 극상의 중요도와 심각도를 자랑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뜻이 된다.

“뭐야? 뭔데?”

사무엘이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서신을 주워 들어 구김을 폈다. 미간을 찌푸리고 내용을 여러 번 읽은 사무엘이 다시 그 서신을 발밑에 처박았다.

“진짜……. 진짜 미쳤네?”

사무엘의 아래턱이 충격과 공포로 덜덜 떨려 왔다. 매일같이 반역, 반역, 노래를 불렀더니 진짜 반역 모의를 접하게 될 줄이야.

“이게 전부 사실이야?”

사무엘이 에우로스에게 물었다.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제발. 천국의 문을 지키고 선 천사에게 구원을 바라는 부자의 눈빛을 한 채로.

“사실이 아니야.”

에우로스가 차갑게 내뱉었다.

지금 받은 서신은, 나이젤 로스가 작성한 서류를 필사해 온 것이었다. 그 서류란, 프시케와 말콤 월레스 사이에 주고받은 가짜 편지 여러 장이었다.

이미 예상했듯 프시케 캐번디시를 스코틀린의 여왕으로 추대하여 잉그린트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프시케와 말콤 월레스 간의 절절한 사랑 고백은 덤이었다.

나이젤은, 딴엔 그 서신의 신빙성을 위해, 스코틀린 고대어를 기초로 한 암호를 활용했다. 이미 원본은 데이모스 캐번디시의 손에 넘어갔고, 지금쯤은 암호 해독을 완료했을 것이다.

“그럼 뭐야?”

“조작된 거야.”

“그게 조작이 아니라는 근거가 있어?”

에우로스는 지금껏 매니저와 그 둘 사이에서만 오갔던 이야기들을 사무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면, 대신 이 사건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 난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사무엘이 경기하듯 소리 질렀다. 에우로스는 피식 웃었다.

“어떡하지, 사무엘? 이미 전부 들어 버렸잖아.”

“아니, 뭐 이런! 나는, 내가, 나는! 내가 도대체 뭐라고!”

“자네는 유서 깊은 스태포드 남작가의 무려 삼남이지. 데본셔 공작가의 장자인 에우로스 캐번디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개소리하지 마, 에우로스!”

또다시 연대보증의 순간이 돌아왔다. 사무엘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꾸욱 주었다.

어릴 적 하르모니아의 애교에 넘어가 뻔질나게 데본셔 공작저를 들락거린 게 실책이었다. 그때 모른 척했다면 이 인간과 절대로 엮이지 않았을 텐데.

죽을 때까지 에우로스와 연대책임을 질 앞날이 걱정된다. 아니, 그럴 앞날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 잘못되면 바로 리던 탑 광장에서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목이 잘릴 테니까.

잔뜩 털을 세운 사무엘을 들여다보며 에우로스가 상냥하게 다독였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일이 잘 풀리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생각이나 해.”

뭐지? 이 익숙한 상황은?

이런 식으로 화제를 돌리는 건 예전에 갤러웨이 성에서도 겪어 본 적이 있다. 프시케 스튜어트에게 청혼하려던 반군을 신고하겠다고 길길이 날뛸 때도 에우로스는 사업 얘기를 꺼내며 제 애국심을 시험했다.

“지금 사업이 중요해?”

사무엘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대꾸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넘어가 줄 생각이 없다. 반군 하나 신고하지 않는 것과 아무리 조작된 것이라 해도 반역 모의에 휘말리는 건 아예 규모 자체가 다른 사안이다.

“8 대 2.”

“뭐?”

에우로스가 난데없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8 대 2?

“카듀 강 금광 수익, 8 대 2.”

“……갑자기?”

“잘 생각해 봐. 나는 이제 프시케의 남편이야. 이 일이 잘 해결되면 프시케에게 금광의 존재를 알리고 본격적으로 광산 회사를 설립할 거야. 사무엘 자네도 봤지? 사금량이 어마어마했던 것 말이야. 그러면 묻혀 있는 금의 양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래서?”

“그 땅은 내 아내의 소유고, 회사는 내가 설립해. 투자자들을 제외하고 우리 부부가 가져갈 수 있는 수익이 엄청나다는 뜻이지.”

“그렇지.”

“그리고 사무엘 자네는 투자할 돈도 별로 없을 테고. 그러니까 1년에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받아 챙기는 게 전부겠지.”

“내가 그렇게 돈이 없는 건 아니,”

“쉿.”

사무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우로스가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런데 사내새끼 입술이 왜 저렇게 붉어? 사무엘은 저도 모르게 그 손가락과 입술에 눈의 초점을 맞추고 침을 꿀떡 삼켰다.

“어쨌거나, 자네가 이번 일을 함께해 준다면, 나와 프시케가 가져가는 수익의 2할을 떼어 줄게. 금광 개발 이후 10년 동안.”

2할. 10년. 사무엘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그는 갤러웨이 성에서 에우로스와 방에 틀어박혀 광산 개발 시 예상되는 수익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측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돈만 투자해도 꽤 짭짤한, 아니, 매우 짭짤한 수익이 날 것이 분명하다며 기뻐했었다. 그런데 캐번디시 부부 몫의 2할이라니, 그 돈이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일 것이다.

“할 거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 하나. 세상에서 가장 아리따운 처녀가 황금빛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노래한다네. 사공은 그 노래에 사로잡혀 암초를 보지 못하고 물결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네.

1)

눈앞에서 황금빛 머리카락의 로렐라이가 지저귀고 있었다. 사공 사무엘은 로렐라이의 미모와 노랫가락에 홀랑 넘어가 바로 앞의 암초에 뱃머리를 부딪쳤다. 결국 그는 로렐라이가 인도하는 대로 반역 사태의 물길에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6 대 4.”

하지만 물에 빠져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댔다고, 사무엘은 그 순간에도 정신줄을 아예 놓아 버리지는 않았다.

“뭐?”

“6 대 4로 해. 기간은 20년.”

“하!”

에우로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사무엘은 지지 않았다.

“싫으면 말고.”

“7 대 3. 기간은 15년으로 해 주지. 그 이상은 안 돼.”

로렐라이가 웃으며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좋아.”

사무엘이 냉큼 대답했다. 그러고는 장렬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 *

“오늘은 또 무슨 일이죠, 에우로스?”

프레이아가 도도한 표정으로 에우로스를 내려다보았다. 에우로스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맞았다.

“내실로 가시죠.”

프레이아는 에우로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금화살 클럽의 내실로 향했다. 요즘 부쩍 에우로스의 행동이 이상했다. 매일같이 그녀를 클럽으로 초대해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켜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리던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말에 말이 쌓이자 소문이 되었다. 호사가들은 에우로스가 아내를 멀리 보내 버린 뒤 프레이아와 놀아나고 있다고 씹어 댔다.

소문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배신감과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마음은 에우로스의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단숨에 꺼졌다. 처음으로 받는 사적인 초청, 처음으로 안내된 내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대와 달리 에우로스는 단둘이 있는 내실 안에서도 깔끔하게 굴었다. 필요 이상의 사담은 하지 않았고, 정치 이야기와 그녀의 남편 고든레녹스 총리의 안부와 같은 내용을 입에 올렸다.

그건 좀 못마땅했다. 그래도 어쨌든 에우로스가 프레이아와 둘만 있는 시간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프레이아는 맹렬하게 고민했다. 그사이에 마음이 변한 건가? 충동적으로 결혼하고 나니 후회가 밀려온 것은 아닌가?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태도가 바뀌는 일이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 자신이 그랬다.

들쑥날쑥한 심경의 변화. 그토록 미워했지만 에우로스가 보낸 서신 하나에 하르모니아가 키우는 강아지처럼 혀를 쪽 빼고 달려 나갈 정도로 삽시간에 뒤바뀐 태도.

에우로스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는 얼굴이 안심을 준다니 그거야말로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손가락에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날카로운 장미 가시 같은 그 웃음을 마주하지 않는 것, 손바닥이 쩍 달라붙어 살갗이 뜯겨 나갈 정도로 차가운 그 웃음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프레이아의 예쁜 입꼬리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최근 그녀의 손톱은 예전처럼 길쭉하고 고운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총리님은 잘 계십니까?”

에우로스가 시시각각 변하는 프레이아의 표정을 꾸준히 살피다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프레이아는 책과 같은 여자였다. 잘 읽히는 책. 사무엘도 그 동류였지만 느낌은 조금 달랐다.

사무엘이 줄줄 풀어내는 소설이라면, 프레이아는 함축적인 시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어로 축약했다 해도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고든레녹스 총리 쪽으로 아무 정보도 새어 나가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고든레녹스 부부는 사생활에 대해서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사안에 관해서는 긴밀했다. 프레이아의 친정이 정치 명문 중 하나인 스펜서 백작가이기 때문이었다.

“늘 똑같아요.”

슬쩍 떠보는 말에 프레이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일이 조금은 쉬워질 것이다.

분명히, 아직까지는 그렇다.

1) 하인리히 하이네 「로렐라이」 일부 수정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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