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세 번의 대답
심한 고문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있던 나이젤 로스의 육체는, 단지 손목을 칭칭 감은 거친 밧줄의 촉감이 주는 두려움만으로도 사정없이 진동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벌벌 떠는 기색은 숨기지 못했나 보다. 깊은 한숨 소리가 바로 앞에 앉은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거칠게 묶여 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렸다.
블랙워치의 막사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린 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안으로 옮겨져 있었다. 다 부서져 가는 낡은 의자 두 개만 놓인 좁은 실내. 심문을 위해 쓰이는 방, 나이젤도 잘 아는 공간이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잉그린트 군대에서 고문당하던 사람이 탈출했다는 운 좋은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잉그린트인들은 스코틀린인들보다 잔인했다.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블랙워치로 되돌아온 데에 의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왔다. 주저 없이 받아 마셨다.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물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울음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책감과 공포심이 부옇게 녹은 울음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자꾸만 터져 오를 것만 같았다. 나이젤은 형편없이 부어오른 목 안쪽의 근육을 움직여 보려 애썼다.
밤이 떠나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들었다. 그 빛 속에 또다시 한숨 쉬는 사내가 있었다.
시야가 흐려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사내의 한숨에 걱정과 안도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창문을 투과하는 빛의 세기가 증가할수록, 나이젤의 시야는 점점 더 짙어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앞에 서 있는 사내와 모든 것을 숨기고 어둠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은, 이제 빛과 어둠처럼 섞일 수 없었다. 빛이 강해지면 어둠과의 경계가 더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나이젤.”
사내의 부름은 무거웠다. 나이젤은 몇 번 입을 열려다 그만두었다.
“이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미안해.”
그 말에 나이젤의 목울대가 다시 한번 울렁거렸다. 내어놓지 못할 말들이 꽉 조여든 목 안쪽에 첩첩이 쌓여 갔다.
미안해할 사람은 말콤, 네가 아니야. 너는 이것보다 더 가혹한 방식으로 나를 취조할 수도 있었어. 고작 손목에 밧줄 몇 겹 감아 놓고, 조용히 물잔을 입에 대어 주면서 사과하면 안 돼.
말콤은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이젤을 보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한동안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랑글로우에 주둔한 잉그린트 군대에 나이젤 로스가 잡혀 있다는 첩보를 받고 난 후부터였다.
군대에 침입해 그를 구해 오려 시도한 횟수만 세 번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대원 여럿이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잉그린트의 영토에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잉그린트 군을 고작 게릴라 작전으로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한계는 명확했다.
“포기하시지요, 대장님.”
나이젤 로스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도전을 계속하는 것은 부대 전체의 손실이었다. 남은 부대원들은 세 번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진지하게 말콤을 설득했다.
말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젤의 목숨이 다른 부대원들의 목숨보다 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친우이고 동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에 찬바람이 마구 들어찼다. 그 바람을 잠재우려 밤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꼼짝없이 잃은 줄 알았던 나이젤 로스가 블랙워치의 막사 근처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이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를 부대 내로 들여 처치하도록 지시했다.
피투성이가 된 옷을 벗기자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만큼의 고문 흔적들을 보자 부대원들은 말을 잃었다.
잉그린트인들은 간악한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두 나라 사이에 겹겹이 쌓인 지층 같은 반목의 역사 속에는 간혹 양심이나 우정, 또는 자비와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화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야만의 시대에는 말콤의 선조처럼 사지가 찢겨 죽은 사례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스코틀린에 뿌리를 둔 스튜어트 왕조가 출범한 이후로 그런 식의 보여 주기식 폭력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양국은 끊임없이 전투를 치르고, 암살을 사주하고, 고문도 자행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악마적인 짓거리는 서로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이것은 필시 데이모스 캐번디시 때문일 것이다. 모종의 이유로 갑자기 국경에 있는 부대에 장교로 부임한 데본셔 소공작. 프시케 스튜어트의 남편이 될 뻔했던 남자.
사랑했던 프시케가 데본셔 공작의 사생아와 그레트나 그린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은 더할 나위 없이 충격적이었다. 때마침 데이모스의 입대도 결정되었다.
내막을 알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데본셔 공작의, 그리고 프시케의 남편 에우로스의 철저한 입막음 탓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고개 들어, 나이젤.”
데이모스 캐번디시 소위가 지독히도 악취를 풍기는 놈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악마의 현신이라며 수군거렸다. 악마라니, 늘 그렇듯 소문은 과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이젤 로스의 끔찍한 꼴을 목도하고 나니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데이모스 캐번디시는 악귀가 맞았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에게 차마 모질게 굴 수는 없었다. 부대원들 중에서는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수상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번 나이젤을 구출하려 노력했어도 잉그린트 군대의 고문실은 마치 결계가 둘린 듯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 곳을 맨몸으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쉬이 믿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에도 말콤은 나이젤을 믿고 싶었다. 가문과 연인을 버리면서까지 그가 바라보던 이상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모두가 권력에 순응하고 독립이 불가능하다 말하며 자신들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 꿋꿋하게 버티며 함께 신념을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고생…… 많았어.”
말콤은 나이젤의 몸을 세워 벽에 기대 주며 어렵사리 말했다.
온몸의 관절이 뒤틀려 의자에도 제대로 앉지 못하는 나이젤은, 벽을 등지고 기댄 자세마저도 힘겨워했다. 말콤의 관자놀이에 굵게 핏대가 올랐다.
나이젤은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마음속으로 엉엉 울었다.
아니다. 이건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마음은 한없이 무르고, 가끔 엉뚱한 행동을 해 대긴 해도 쉽게 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그런 충직한 친구의 말이 버겁고 또 버겁다.
“이건 그냥, 절차일 뿐이야. 묻는 말에 대답해.”
말콤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이젤은 묵묵히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자력으로 탈출한 게 맞아?”
“…………그래.”
블랙워치에 와서 처음으로 뱉는 말이었다. 목 안쪽에 붙어 있던, 준비된 대답이 울컥 올라왔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황급히 혀로 입천장을 쓸었다. 입안에 엉겨 붙었던 핏덩이가 툭툭 터져 더러운 피비린내가 흘러나왔다.
하고 싶지 않은 말,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 더럽고, 또 더러운 말.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래.”
두 번째 대답은 조금 더 쉬웠다.
데이모스는 악귀였다. 그리고 나이젤은 그 악귀의 손을 잡고 그에게 영혼을 팔아 버렸다.
악귀가 반대편 손아귀에 쥐고 흔들던 아비게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해서, 사랑해서, 결혼 전까지 지켜 주겠다 마음먹었던, 그래서 그 흔한 입맞춤 한 번 하지 못하고 돌아섰던 여자.
그런 여자의 옷이 다 찢겨 속살이 드러났다. 그 누구도 밟은 적 없는 흰 눈 같은 목덜미가 악귀가 낸 발자국에 쉽게 짓이겨졌다. 그랬으면서도 아비게일은 벌거벗겨져 거꾸로 매달린 자신을 보며 침착하게 마음을 전했다.
“그때, 네 편을 들어주지 못했던 걸 내내 후회했어. 겁내지 말걸, 네 손을 잡을걸, 그게 널 보낸 뒤 항상 했던 생각이야.”
차라리 그녀가 원망했다면, 울부짖었다면 달랐을까.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화를 내었다면, 그랬다면 말콤을 배신할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믿어도 되는 거지?”
“그래.”
세 번째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블랙워치에 입대하겠다고 했을 때 아비게일은 조용히 흐느꼈다. 그런 그녀를 등지고 말을 달리면서, 이 정도의 고통은 제 신념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허세 가득한 자부심도 있었다.
신념이란 지극히 고결한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절대로 뭉개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여자의 고백에 흔들려 버릴 줄 알았다면 그따위 신념은 애초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세 번의 질문이 끝났다. 나이젤은 그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답했다.
말콤은 나이젤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는 곧바로 밖을 지키고 있던 부대원 하나를 불렀다.
“이걸로 심문은 끝났다. 병상으로 옮기도록.”
그 말을 듣자 전신을 빠르게 돌던 피의 흐름이 돌연 속도를 낮췄다.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벽에 기댔던 몸이 털썩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 네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마. 나도, 비록, 지금 이런 모습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을게.”
아비게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멀리서 마일스 할아범이 키우는 닭이 크게 첫울음을 울었다. 이제 곧 아침이었다. 빛이 좀 더 강하게, 더 깊숙이 들어왔다.
첫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그 빛을 피해 구석의 시커먼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